타이베이 토크

국제와의 연결 -탐라문견록의 대만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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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과 한국의 다양한 문화 이야기

-2024.08.13.
-진행: 노혁이, 백조미

-국제와의 연결 -탐라문견록의 대만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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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이어 <탐라문건록>과 관련하여 국제 간의 연결, 동서양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1700년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잠시 타이완에 머물게 된 한국인이 그 당시 직접 보고 느꼈던 타이완을 기록한 내용이 있다. 일부 표현은 다소 과장된 듯하나 그래도 매우 소중한 사료가 될 수 있어 그러한 기록을 남겨준 분들이 많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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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9년 윤도성(尹道成) 일행 30인이 제주에서 육지를 향해 배를 띄웠다가 불행히 풍랑을 만나 대만에 표착했다. 창화현 대돌두. 9개월의 시간이 걸려서야 복건성(福建省), 소주(蘇州) 등지로 해서 북경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돌아갔다. 

à 대만과 조선의 최초 민간 교류 문자 기록(진경지 정치대교수, 18세기 조선 표류인의 눈으로 바라본 대만(臺灣)의 겉과 속))

대만으로 표류했던 윤도성은 제주의 상인이었고, 송완은 제주의 관원이었다. 윤도성은 1729년 장사를 목적으로 제주에서 육지를 향해 배를 띄웠다가 표류했으며 함께 동승했던 인원이 30인이었다.

송완의 간략한 표류기에 비해 윤도성 표류기의 내용은 비교적 많고 자세하다. 날짜별로 표류, 구조, 이송 등의 과정을 순서대로 서술 송완은 그냥 공무원. 윤도성은 사업가.

대만의 1729년의 풍경

ㅡ ‘서우’의 크기는 보통 소의 세 배가량 되었다. 뿔은 길이가 서너 자나 되고, 색깔 은 옻칠처럼 검었다.5) 양과 말과 나귀는 모두 토산이 아니라 몹시 희귀하다. ‘서우’는 아주 많다. à 대만의 물소

ㅡ 원주민의 생활상: 온 마을의 남녀가 모여서 일행을 보며 시끄럽게 떠드는데, 말소리가 짱알짱알하여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윤도성이 나뭇가지 끝으로 땅에다 글을 써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곳은 어느 나라 어느 땅인가?” 한 사람이 나서서 이를 보더니만 또한 땅에다 썼다. “대청국 대만부와 맞닿은 창화현 대돌두사번(大突頭社番)의 통사관이다. 너희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어떤 연유로 여기에 이르렀는가?”10)

ㅡ  통사란 관직은 정 씨(정성공) 정권부터 설립된 하급 관리로서 주로 원주민 말에 능통한 한족 사람이 담당했다. 통사는 원주민 부락 안이나 근처에 살며 부역 내용을 전달하거나 통역하는 역할을 했다.11) 윤도성 일행이 간 곳은 바로 통사가 근무하는 통사관이었으며 일행이 만났던 사람들은 한족 통사관과 평포족 원주민

ㅡ 양옆에는 군사가 따라오는데, 모두 대나무로 만든 활과 뽕나무로 만든 화살을 지니고 있었다. 모두 두 귀를 뚫어 사슴뿔 귀고리를 달았고, 쇠로 만든 팔찌를 두 팔뚝에 차고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긴 웃옷만 입고, 바지는 입지 않았다.1

ㅡ 날씨는 따뜻했고, 땅에서 올라오는 기운은 습했다. 여염집은 모두 2층의 다락집으로 지었다. 네 계절 언제나 다락 위에서 산다. 방은 모두 갈대와 대나무로 시렁을 짰다

ㅡ 표류하던 사람들의 짐에서 마패가 나왔다. 마패는 관원들이 공무를 수행하며 지방으로 나갈 때 역마를 징발하는 증표로 쓰던 둥근 구리 패였다. 한쪽 면에는 연호와 연월일을 새기고 다른 한쪽에는 말을 새겼다. à “마패 가운데 어째서 명나라 때 쓰던 천계(天啓) 연호가 있는가 (명나라는 1644년 멸망)

ㅡ 대만 사람이 마패 가운데 천계 연호가 있는것을 보고 다투어 전하여 살펴보더니,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대명의 제도가 여기에 남았구나.” 어떤 이는 탄식하면서 마패를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기색이 말과 얼굴에 드러났다 -> 대만을 잠시 지배했던 정성공은 1962년 39세 나이로 사망. 당시 정성공의 대만은 반청복명주의… 1729년은 표류할당시. 1721년에도 주일귀란 사람이 반란. 2개월만에 진압. 청나라 정부는 대만에 잔류한 반청 세력을 없애기 위해 1723년까지 군사활동 지속

윤도성 일행이 창화현에 있는 상제묘에 있었을 때 진사(進士)라고 자칭한 자가 와서 글을 써서 물었다. “너희 나라의 법은 같은 성씨끼리 혼인하는 것을 금하는가?” “그렇다.” 그가 또 글을 써서 물었다. “부인네는 개가( )를 하는가?” “아니다. 그런 풍속은 없다.” “청상과부가 자식이 없으면 어디에 기대어 생활하는가?” “비록 쓸쓸히 돌아갈 데가 없어도 친척이나 이웃에 기대어 살더라도 개가하는 일은 없다.” 진사가 말했다. “아! 조선은 예의의 나라로구나. 아름다운 풍속이 이 같은 줄은 몰랐다.”

1683년 청나라가 대만 정 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나서 반청 세력을 방비하기 위해 대만편사유우령(臺灣編査 寓令)」을 내렸다. 이 명령 때문에 대만 해협을 건널 때마다 사전에 허락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대만으로 갈 때 가족과 동행할 수 없고 이미 대만에 있는 사람도 가족을 데려올 수 없게 되었다. 이 명령으로 인해 발생한 첫 번째 사회 문제는 바로 남녀 성별의 불균형 현상이다. 남다여소(男多女少)의 대만 이민 사회에서는 심지어 결혼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형편없는 나한각(羅漢脚)이란 계층 형성되어 절도나 싸움과 같은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20) 그리고 한족 여자를 찾지 못해서 현지 원주민인 평포족과 결혼하는 것도 한족과 원주민 간의 갈등을 많이 야기했다. 이렇듯 여자가 귀한 대만 사회 구조에서는 전통 유교 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었던 동본과의 혼인 문제와 이혼, 그리고 개가 같은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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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토크By jennifer pai-白兆美, 최세훈, R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