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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과 한국의 다양한 문화 이야기
2022.07.26.
-진행: 노혁이, 백조미
-타이완과 한국의 일본에 대한 시각의 차이
노:
한국과 대만이 각각 일본에 대한 감정의 차이가 아주 크게 다르다. 왜일까? 양국이 모두 함께 일제강점기 시기가 있었고, 한국이 1910년부터 45년까지 35년, 대만은 청일전쟁이 끝나고 시모노세키조약이 맺어진 1895년부터 50년, 한국보다 15년이나 더 길다.
한국에 반일감정이 많은 이유 -- 징병과 강제징용
백:
타이완에서는 반일감정이 그리 크지 않았던 원인 -- 이민사회의 특성, 통치자가 자주 바뀌었고 중국의 판도였다가 일본으로 넘어갔음
노:
일제는 1931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아시아ㆍ태평양전쟁기간 동안 조선에 대하여 막대한 물적ㆍ인적 자원을 강탈해갔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강점기 일본군대로 동원된 조선인은 1938년부터 시작하여 일제 패망까지 대략 21만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7세 이상 징병대상이었으나, 1944년10월이후에는 17세 미만의 조선인도 끌려갔다.
강제징병은 해외로 150만, 조선내 200만명. 피해자들 대부분은 식민지에서도 힘없고 가난한 농촌 젊은이들이나 청소년들이었다. 도망가도 부모를 협박해서 데려가기도 했고.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듬해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강제징용을 시작. 초기에는 겉으로나마 ‘모집’의 형태를 취했으나 실제로는 강제와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 일본 기업이 조선총독부 허가를 받은 뒤 경찰이나 면장 같은 조선 내 유력자의 도움을 받아 농촌 지역의 힘없는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강압적으로 끌고 가는 방식이 곧잘 사용됐다. 총독부가 몇 명을 뽑아서 어떤 기업에 인계하라고 할당하면 지역 말단 행정기관이 직접 할당량을 채우는 방식도 사용됐다. 1944년 9월부터는 처음부터 대상을 특정해 징용 영장을 발부하는 방식인 강제 노무징용 방식도 사용됐다. 강제징용된 조선인 숫자는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일본과 만주 등 조선 밖으로 동원된 사람 150만명, 조선 내 작업장에 동원된 사람은 약 200만명으로 추정된다. 해방 당시 조선의 인구가 2500만명가량이었으니 강제징용 피해는 조선 전체에 걸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강제징용된 이들이 혹독한 노동환경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고로 사망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1942년 야마구치현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로 조선인 136명이 떼죽음당했다.
해방 뒤에도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일본은 패전 뒤 조선인 귀국 수단 마련에 적극 나서지 않았고, 악천후 속에서 ‘야미선’이라고 불리던 작은 목선에 몸을 실었다가 태풍을 만나 귀향의 꿈과 함께 가라앉은 이들이 많았다. 히로시마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일했던 강제징용자 240여명도 귀국길에 올랐다가 실종됐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이들은 태풍을 만나 그렇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위안부… 일본군의 성노예
병영에 별도의 성행위 장소인 군대 위안소를 만들고, 식민지/점령지 출신의 여성들을 모집하여 관리. 일본 본토, 한반도, 대만에서 포주들이 "일자리를 소개시켜 준다.",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라며 모집하였는데 막상 도착한 곳은 위안소인 식으로 여성들을 끌어들였다.
백:
타이완인 위안부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일본군 위안소로 가게 된 것인데 특히 ‘일본군대에서 군간호사로 일하게 해준다’는 유인 방식에 넘어간 여성이 많았다고 한다.
노:
위안부 모집방식
위안부 규모는 얼마였을까? 군인 29명~45명당 1명의 군위안부가 있었다고 추정. 300만 군인에서 보면, 10만~20만. 150명당 1명을 둔다는 설도 있어서 최소 2만명으로도 가정. 조선인 52%, 중국인 36%, 일본인 12%로 추정.
대만에서도 14살에서 30세 사이의 2천명 이상으로 추정
백:
타이완인 위안부가 처음으로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한 건 1992년이다. 이는 한국에서 주도한 ‘아시아 위안부 회의’ 공동선언에 호응하며 일본정부는 공식 사과와 배상할 책임을 져야한다는 요구를 하게 되었다.
1999년 타이완인 위안부 9명이 일본정부를 대상으로 제소하였는데 도쿄지방재판소와 도쿄고등재판소 및 최고재판소에서 모두 타이완 위안부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노:
아시아의 일본 전쟁터에 흩어진 이들 위안부는 전쟁이 끝나고도 제대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돌아와서도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할 수 없었다. 이분들이 이제 세상을 떠날 나이, 즉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백할 수 있게 되었던 일.
백:
부녀구원기금회가 2016년에 다다오청 디화가에 위안부 ‘할머니의 집(평화와 여성 인권기념관’을 개설했으나 민간 자본 모집을 통해 경영한 것이라 지탱하기가 어려워 2020년11월에 폐관하였고, 2021년11월에 청더로에 터를 잡고 경영을 회복하게 됨. 위안보 역사를 보존하는 데 있어서 타이완은 한국보다 훨씬 못하다는 비판을 받았었다.
대만과 한국의 다양한 문화 이야기
2022.07.26.
-진행: 노혁이, 백조미
-타이완과 한국의 일본에 대한 시각의 차이
노:
한국과 대만이 각각 일본에 대한 감정의 차이가 아주 크게 다르다. 왜일까? 양국이 모두 함께 일제강점기 시기가 있었고, 한국이 1910년부터 45년까지 35년, 대만은 청일전쟁이 끝나고 시모노세키조약이 맺어진 1895년부터 50년, 한국보다 15년이나 더 길다.
한국에 반일감정이 많은 이유 -- 징병과 강제징용
백:
타이완에서는 반일감정이 그리 크지 않았던 원인 -- 이민사회의 특성, 통치자가 자주 바뀌었고 중국의 판도였다가 일본으로 넘어갔음
노:
일제는 1931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아시아ㆍ태평양전쟁기간 동안 조선에 대하여 막대한 물적ㆍ인적 자원을 강탈해갔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강점기 일본군대로 동원된 조선인은 1938년부터 시작하여 일제 패망까지 대략 21만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7세 이상 징병대상이었으나, 1944년10월이후에는 17세 미만의 조선인도 끌려갔다.
강제징병은 해외로 150만, 조선내 200만명. 피해자들 대부분은 식민지에서도 힘없고 가난한 농촌 젊은이들이나 청소년들이었다. 도망가도 부모를 협박해서 데려가기도 했고.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듬해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강제징용을 시작. 초기에는 겉으로나마 ‘모집’의 형태를 취했으나 실제로는 강제와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 일본 기업이 조선총독부 허가를 받은 뒤 경찰이나 면장 같은 조선 내 유력자의 도움을 받아 농촌 지역의 힘없는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강압적으로 끌고 가는 방식이 곧잘 사용됐다. 총독부가 몇 명을 뽑아서 어떤 기업에 인계하라고 할당하면 지역 말단 행정기관이 직접 할당량을 채우는 방식도 사용됐다. 1944년 9월부터는 처음부터 대상을 특정해 징용 영장을 발부하는 방식인 강제 노무징용 방식도 사용됐다. 강제징용된 조선인 숫자는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일본과 만주 등 조선 밖으로 동원된 사람 150만명, 조선 내 작업장에 동원된 사람은 약 200만명으로 추정된다. 해방 당시 조선의 인구가 2500만명가량이었으니 강제징용 피해는 조선 전체에 걸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강제징용된 이들이 혹독한 노동환경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고로 사망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1942년 야마구치현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로 조선인 136명이 떼죽음당했다.
해방 뒤에도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일본은 패전 뒤 조선인 귀국 수단 마련에 적극 나서지 않았고, 악천후 속에서 ‘야미선’이라고 불리던 작은 목선에 몸을 실었다가 태풍을 만나 귀향의 꿈과 함께 가라앉은 이들이 많았다. 히로시마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일했던 강제징용자 240여명도 귀국길에 올랐다가 실종됐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이들은 태풍을 만나 그렇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위안부… 일본군의 성노예
병영에 별도의 성행위 장소인 군대 위안소를 만들고, 식민지/점령지 출신의 여성들을 모집하여 관리. 일본 본토, 한반도, 대만에서 포주들이 "일자리를 소개시켜 준다.",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라며 모집하였는데 막상 도착한 곳은 위안소인 식으로 여성들을 끌어들였다.
백:
타이완인 위안부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일본군 위안소로 가게 된 것인데 특히 ‘일본군대에서 군간호사로 일하게 해준다’는 유인 방식에 넘어간 여성이 많았다고 한다.
노:
위안부 모집방식
위안부 규모는 얼마였을까? 군인 29명~45명당 1명의 군위안부가 있었다고 추정. 300만 군인에서 보면, 10만~20만. 150명당 1명을 둔다는 설도 있어서 최소 2만명으로도 가정. 조선인 52%, 중국인 36%, 일본인 12%로 추정.
대만에서도 14살에서 30세 사이의 2천명 이상으로 추정
백:
타이완인 위안부가 처음으로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한 건 1992년이다. 이는 한국에서 주도한 ‘아시아 위안부 회의’ 공동선언에 호응하며 일본정부는 공식 사과와 배상할 책임을 져야한다는 요구를 하게 되었다.
1999년 타이완인 위안부 9명이 일본정부를 대상으로 제소하였는데 도쿄지방재판소와 도쿄고등재판소 및 최고재판소에서 모두 타이완 위안부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노:
아시아의 일본 전쟁터에 흩어진 이들 위안부는 전쟁이 끝나고도 제대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돌아와서도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할 수 없었다. 이분들이 이제 세상을 떠날 나이, 즉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백할 수 있게 되었던 일.
백:
부녀구원기금회가 2016년에 다다오청 디화가에 위안부 ‘할머니의 집(평화와 여성 인권기념관’을 개설했으나 민간 자본 모집을 통해 경영한 것이라 지탱하기가 어려워 2020년11월에 폐관하였고, 2021년11월에 청더로에 터를 잡고 경영을 회복하게 됨. 위안보 역사를 보존하는 데 있어서 타이완은 한국보다 훨씬 못하다는 비판을 받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