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 세력이 광해군을 쫓아낸 명분은 크게 3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폐모살제였습니다.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10년간이나 유폐시킨 죄와 8살짜리 이복동생(영창대군)을 죽인 죄 등을 물었습니다. 또하나는 임진왜란으로 불탄 궁궐을 중수하면서 백성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는 죄였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배반하고 오랑캐(후금)와 화친한 죄였습니다.
세가지 죄상 중 첫번째, 즉 폐모살제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큰 죄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두번째 궁궐의 중수도 보기에 따라서는 잘못된 내정으로 지탄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의 업적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임진왜란 때 분조(分朝)의 책임자로서 전국을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했습니다. 또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무릅쓰고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의성 허준의 동의보감 편찬을 도와줌으로써 질병으로 속절없이 죽어나간 백성들을 구제했습니다. 이덕형 이항복 이원익 등 명망가들을 등용함으로써 당파색을 줄인 업적도 만만치 않으며, 궁궐 중수도 좀 무리한 감은 있지만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은 바로 ‘명나라에 대한 배은망덕’입니다.
광해군은 과연 오랑캐 후금에 굴복한 외교정책을 폈을까요. 아닙니다. 광해군은 욱일승천하는 후금(청나라)과 다 쓰러져 가는 대국(명나라)와 줄타기 외교로 조선을 지키려 했습니다. 그렇다면 광해군을 쓰레기로 손가락질 하고 인조반정을 일으킨 이후, 조선은 어찌 되었을까요.
지난주 인조반정 이후 폐위되어 유배지를 전전했던 광해군의 삶을 조명했습니다. 이번 주는 광해군이 쫓겨난 후의 조선을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42회는 ‘인조는 과연 광해군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