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상 가장 한심한 임금을 꼽으라면 신라 경애왕이요, 최악의 인간말종을 꼽으라면 아마도 견훤 정도일 것입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경애왕은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졌는데도 포석정에서 술판을 벌이다가 후백제 견훤의 침입을 받아 ‘강요에 의한 자결’로 비참한 생을 마감한 인물입니다. 자기만 죽으면 될 일이 아니라 신라의 1000년 사직도 급전직하했지요.
견훤은 또 어떻습니까. 경애왕을 자결토록 한 것도 모자라 경애왕의 왕비마저 강간하고, 부하들에게 ‘경애왕의 비첩들을 마음껏 농락하라’고 명을 내렸다지요. 이런 인간말종이 어디있습니까. 문제는 1934년 일제가 포석정을 사적 1호로 지정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너희는 적이 쳐들어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금과 중신들이 질탕 퍼마시고 놀았으니 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식민지로 살 수밖에 없다”는 패배주의를 은연중 심어주려 했겠지요. 후백제 견훤의 난행을 덤으로 얹어놓았겠지요.
그러나 사서의 기록은 ‘참’일까요. 아무리 정신이 없는 임금이라도 그렇지 나라가 망할 지경인데 그것도 한겨울에 야외에서 술판을 벌였을까요. 또 백성들의 민심을 얻어 나라(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아무렴 남의 나라 임금의 부인을 강간했을까요.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역사기록입니다.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미 경애왕은 두달 전에 후백제군의 위협 때문에 왕건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던 터였습니다. 아마도 경애왕은 위기에 빠진 종묘사직을 위해 제사를 지냈고, 제사음식을 음복하러 왕족과 귀족들과 함께 나왔다가 그만 후백제군의 침입을 받아 죽임을 당했을 겁니다.
경애왕이 제사를 지냈던 곳이 바로 포석사이고, 음복하러 나왔던 곳이 포석정이겠지요. 이런저런 문헌과 발굴성과 등을 토대로 재해석해보고자 합니다.
포석사와 포석정은 신라 귀족들이 혼례를 치르거나 제사를 지낸 뒤 연회를 베풀거나 음복을 했던 성스러운 공간이라는 해석이 요즘들어 나오고 있거든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57회는 ‘경애왕은 그날 술판을 벌이지 않았다’입니다.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블로그 http://leekihwan.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