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소개할 삼월이는 학문이나 시 같은 것으로 유명세를 떨치지는 못했다. 오히려 50살이 되도록 혼자 살았던 노처녀였다.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지금도 놀림감이 될 만 한 존재다. 하지만 그녀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조선시대에는 일찍 결혼하는 조혼풍습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대략 10대 중후반이 되면 배필을 찾아서 혼사를 치렀다. 평균수명이 짧은 이유도 있지만 혼인을 해서 자식을 낳는 것이 연금 같은 것이 없던 이 시대의 가장 확실한 노후보장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독신이나 솔로 같은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늦도록 혼인을 못하면 국가가 나서서 짝을 지워주고 혼수를 지원해주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늦도록 결혼을 못하는 것은 큰 흉이 되었다. 장가를 가서 상투를 올리지 못하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어른 대접을 못 받은 것도 이러한 인식 때문이리라. 이런 분위기속에서 서른이나 마흔도 아니고 쉰을 넘긴 노처녀가 대낮에 한양을 활보하는 것은 대단히 이채로웠을 것이다. 자세한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계집종에게나 어울릴법한 삼월이라는 이름하며 늦은 나이까지 혼자 살았다는 점을 보면 일찍 부모를 잃은 가난한 집안 출신 인 것 같다. 유명인이나 스타보다는 오히려 조롱거리에 가까울 법한 그녀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다름 아닌 독특한 버릇과 성격 때문이었다.
삼월이는 할머니 소리를 들을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처녀처럼 곱게 차려입고 화장까지 한 채 떡과 엿을 팔러 다녔다. 지금도 노인이 젊은 사람처럼 차려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돌아다니면 단박에 눈에 띌 것이다. 하물며 조선시대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왜 매일 처녀처럼 옷을 입고 곱게 화장을 하고 다니는지 궁금해 했다. 떡과 엿을 팔 것이라면 굳이 번거롭고 돈이 드는 치장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물음 속에는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못했느냐?’는 비꼼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삼월이는 뜻밖의 대답을 한다.
“세상 모든 남자들이 내 배필이라서요. 잘 보여야 하지 않겠어요?”
늙어 보이기 싫다는 대답 정도를 기대했던 상대방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는 답변이었다. 세상 모든 남자를 내 짝으로 생각한다는 당찬 생각을 한 그녀는 곧 한양의 명물이 되었고, 누구나 아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동구 밖에 사는 삼월이는 처녀인데 남편이 많다고 하네’라는 민요도 만들어졌다. 비록 남들을 울리고 웃기는 재주나 뛰어난 학문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특유의 당당함으로 백성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요즘이라면 ‘세상에 이런 일이.’이나 ‘생생 정보통’ 같은 프로그램에서 당장 섭외했을 것 같다. 페미니즘의 선구자라고 부른다면 과한 얘기일까? 사실 삼월이는 괴짜이거나 히스테리 가득한 그저 그런 노처녀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신세한탄 하는 법 없이 떡과 엿을 팔아서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졌다. 세상을 비관하거나 좌절하는 대신 씩씩하게 돌아다니면서 세상 모든 남자가 내 남편이라는 배포도 부렸다. 조선 시대 그 어떤 여성보다 당당하게 스스로의 삶을 살아간 인물이었다. 사람들의 그녀의 삶을 경외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호기심어린 눈길을 보냈다. 그녀의 주 고객이었을 아줌마들은 홀로 사는 그녀의 멋진 삶을 응원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