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연예인 비사(祕史)

조선연예인 비사(祕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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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연예인 비사(祕史) episodes

  • 33. 나는 종놈이로소이다. 이단전
    그는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이단전(李亶佃), 즉 진실로(亶), 밭을 가는 놈(佃)이라는 뜻인데 설마 부모가 지어줬을 리는 없고 아마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 이렇게 부른 모양이다. 그리고 필재(疋漢)라는 호를 가지고 있었는데 누가 의미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아래 하(下)자와 사람 인(人)자를 파자해서 필(疋)자로 정했습니다.”
    뒤에 붙은 한은 보통 천한 남자를 지칭하는 상놈이라는 뜻의 상한(常漢)에 따온 것이다. 그러니까 이름보다 더 자주 불렸을 호는 하인 놈, 혹은 아랫것이라는 뜻이다. 괴상한 이름에 아랫사람을 지칭하는 호를 가지고 있는 이 인물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스스로 가장 낮은 인물이라고 선언하고 다녔다. 심지어는 패랭이라고 불리는 평량자를 늘 쓰고 다녀서 이단전 대신 이평량이라고도 불렸다. 연안 이씨 집안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일부 기록에서는 양반집 종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고도 되어있다. 전자가 맞 다고 해도 아마 몰락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을 가능성이 높다. 조금만 돈을 모으면 양반신분을 사거나 양반 행세를 하던 시대에 일종의 역주행을 한 셈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삐딱하게 만들었느냐 하면 다름 아닌 ‘시’였다. 그가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시를 짓는 솜씨하나만큼은 글공부를 한 양반 뺨을 칠 정도였다.
    洞葉蕭蕭下 마을의 나뭇잎 쓸쓸히 떨어지고
    溪雲寂寂生 시냇가의 구름이 조용히 일어나네.
    짤막한 그의 시를 보면 과장되고 부풀어 올린 것이 아닌 서정적이면서 차분한 감정이 그려진다. 그는 자신이 지은 시를 남들에게 잘 보여주지 않았다고 했는데 대신 갑자기 방문해서 자신이 쓴 시를 보여주곤 했다. 추재기이를 쓴 조수삼도 그의 방문을 받았는데 금강산에 대해서 쓴 시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18세기 후반에 살았던 선비 심노숭도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겨놨다. 그는 이단전을 천인이라고 표현했는데 아마도 노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규장각의 사검서와 절친하게 지냈다고 설명한다. 사검서는 서얼출신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은 모두 백탑파의 핵심인물이다. 이들과 친했다면 아마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과도 교류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당대의 문장가이자 영의정까지 역임했던 남공철이 그를 통해 최북과 만났는데 이것을 보면 최북은 물론 남공철 같은 양반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재기발랄한 그의 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왜 하인이라는 뜻의 이름과 호를 지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태어나면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대한 나름대로의 항거로 보이는데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더 없이 궁금하다. 이단전은 항상 주머니를 가지고 다니면서 좋은 시상이 떠오르면 얼른 적어서 넣었다고 한다. 시에 대한 집념과 사랑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병에 걸려서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노숭에 따르면 그가 자신을 만나러 왔다가 다른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과음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며 안타까운 최후에 대해서 짤막하게 남겨 놨다. 중인들이 주축이 된 여항문인들이 시회를 조직하고 활발하게 시를 짓고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통청운동을 펼친 것은 자신들도 양반과 버금가는 대우를 해달라는 의미였다. 특정 계층이 부유해지면 신분 상승을 꿈꾸며 집단행동에 나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이단전은 그런 흐름과는 정 반대로 스스로 미천하다고 낮췄다. 이것은 양반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에 대한 개인적인 도전으로 보인다.
    10 min
  • ★스마트 미디어 N 2016년 신년인사★
    새로운 미디어 언론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한 2015년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올 한 해 스마트 미디어 N에 보내주신 관심과 배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6년에도 공감, 소통, 공유, 창조를 위해 쉼없이 발전하는 스마트 미디어 N이 되겠습니다.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더 많이 웃으시고, 더 큰 성공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1 min
  • 32. 이름 모를 차력사
    임창정 주연의 영화 색즉시공에서는 차력 공연이 나온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철근 구부리기나 못을 휘는 걸 보면 누구나 눈길을 떼지 못할 것이다. 추재기이에서 파석인(破石人)에 관한 기사를 보기 전까지는 조선시대에도 차력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짧은 기사였지만 몹시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이름 모를 차력사에 대해서 쓰기로 결심했다. 그는 어떤 외모를 가졌을지 부터가 궁금했다. 대머리에 강인하고 험상궂은 인상일까? 아니면 작지만 차돌처럼 단단하게 생겼을까? 추재기이에 나온 차력사의 공연은 차돌깨기였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 한 구석에 자리를 잡은 차력사가 짊어지고 온 검은 빛깔의 차돌을 하나씩 꺼내놓으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멈췄다. 사람들이 충분히 모였다 싶으면 차력사는 공연을 시작했다. 왼손의 둘째와 넷째 손가락 위에 차돌을 올려놓고 엄지손가락으로 위를 감쌌다. 그리고 오른손 주먹으로 내리치면 차돌 한 가운데가 쩍 갈라져버렸다. 수십, 수백 번을 하도 실패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탄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간혹 의심을 한 구경꾼들이 차력사의 차돌을 가져다가 끌이나 도끼로 내리쳐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그렇게 한바탕 실력을 보여주고 난 후에 부서진 차돌들을 챙겼는데 어떤 것들을 가져가고 어떤 것들은 남겨 놨다. 그러면 사람들은 차력사가 돌을 끓여먹기 위해 가져간 것이라고 수근 거렸다. 도교의 신선 술 가운데 돌을 끓이는 법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 한 것 같다. 이 사람이 30년 전까지 길거리나 시장 통에 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 한바탕 차력 쇼를 하고 정체불명의 약을 팔던 이들의 조상임이 분명하다.
    18세기의 조선, 특히 한양에서는 우리 생각보다 더 많은 길거리 스타들이 존재했다. 재담꾼과 구기꾼, 전기수를 비롯해서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들까지 제각각 실력을 뽐내면서 삶에 지친 백성들에게 자그마한 즐거움을 안겨줬다. 차력사의 공연은 앞서 얘기한 이들과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을 안겨줬을 것이다. 기록으로만 보면 차력사가 길거리에서 차돌만 부수고 간 것으로 보이지만 아마 여러 명이 팀을 이룬 채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생계유지를 위해서 약이나 다른 물건들을 팔았을 것이다. 오늘날은 차력사들의 공연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이들이 파는 약이 가짜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이들의 신기한 능력에 감탄한 나머지 신선 술을 쓰는 신기한 능력자로 봤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조선 후기의 문집들을 많이 읽어봤지만 차력사를 다루는 것은 현재로서는 추재기이가 유일하다. 그것은 다른 공연보다 더 거칠고 험악했기 때문에 점잖은 양반들로서는 다루기 어려웠을 수 도 있고, 차력사 자체가 다른 공연을 하는 이들보다 희귀했을 수 도 있다. 어쨌든 조선의 다양한 길거리 공연들 중에서 차력사가 한 자리를 차지했으며 구경꾼들로 하여금 신선이라는 얘기까지 들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8 min
  • 31. 물맛을 감별하다. 수선
    과천에 살던 평범한 백성이 물의 신선이 된 과정과 이유는 다소 서글프다. 어릴 때 부모와 일가친척을 모두 잃은 그는 품팔이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신분제도가 크게 흔들렸다. 특히 노비들의 이탈이 두드러졌는데 이런 현상은 1801년 공노비를 혁파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결국 노비들을 대체할 고공(雇工)이라는 일종의 임금 노동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머슴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노비가 아니라 고공이었다. 과천의 백성도 머슴이나 고공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순조 14년인 1814년, 대기근이 들었다. 안동 김씨의 세도가 이어지던 시기 유독 큰 가뭄과 흉년이 자주 들었는데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이는 역시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이때도 흉년에 쌀값이 크게 뛰고 일거리가 없어지자 가난했던 그는 당장 먹고 살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보통은 이판사판으로 칼을 들고 도적이 됐지만 그는 심성이 착했는지 그냥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더 이상 사는 걸 포기하고 죽기로 결심한 것이다. 조용히 죽기로 결심한 그는 관악산으로 들어갔다. 그가 간 곳에는 맛이 좋기로 유명한 샘물이 두 개 있었다.
    계곡으로 들어간 그는 두 개의 샘물로 굶주린 배를 채우고 산 아래로 내려와서 바람과 햇빛을 쬐었다. 그리고 빈 집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는데 그를 불쌍하게 여긴 사람들이 밥을 주면 손사래를 치면서 거절했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흉년이 들어서 굶어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에 밥을 구걸하는 이들도 한 둘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손사래를 치면서 거절한 것이다. 그리고 배가 고프면 샘물로 달려가는 일을 반복했다. 번갈아가면서 물을 마셨는데 신기하게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들을 물만 먹고도 멀쩡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그를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그가 물로 배를 채우면서 세월을 보내는 동안 크게 풍년이 들면서 곡식 값이 떨어지고 일거리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여유가 생기면서 그에게 일거리를 제공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전에는 먹는 일로 크게 고생을 했다가 각곡방(却穀方)을 배워서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어찌 다시 품을 팔아서 고생을 하겠습니까?”
    여기서 그가 말한 각곡방은 벽곡법이라고도 불리는 도교의 수련법으로 곡식 대신 솔잎 같은 것을 먹는 수련법을 말한다. 그가 산 속에서 도인을 만나서 깨우침을 얻은 것인지 아니면 죽을 각오를 하고 물을 마시다가 그리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물로 배를 채우고 굶주림을 느끼지 않았는데 언뜻 보면 얼토당토않지만 최근에도 술이나 특정 음식만 먹는 기인들이 있는걸 보면 무작정 거짓말로 치부하기는 애매하다. 어쨌든 이렇게 물로 배를 채우는 동안 본의 아니게 능력이 하나 더 생겼는데 바로 물맛을 감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블라인드 테스트처럼 물을 마시면 이게 우물에서 퍼온 것인지 샘에서 떠온 건 지, 아니면 강물을 가져온 것인지 귀신 같이 맞춘 것이다. 고기나 김치도 아니고 물에 맛이 있다는 얘기가 상당히 낯설게 들리겠지만 물들도 토질에 따라서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의 신기한 능력을 본 사람들은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바로 물의 신선이라는 뜻의 수선(水仙)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능력자에 대한 소문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가 마침내 한양의 어느 판서 귀에까지 들어갔다. 판서는 그를 불러다가 한양의 물맛을 감별하게 했다. 수선은 물을 전부다 맛 보고는 삼청동의 성천을 으뜸으로 치고 훈련원의 통정과 안현의 옥폭을 나란히 다음으로 꼽았는데 2등이 아니라 3등으로 정했다. 2등이 되기에는 조금 모자랐던 것일까? 이렇게 명성을 크게 떨친 수선은 명산을 유람하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10 min
  • 30. 나무꾼 시인. 정봉
    18세기 접어들면서 학문은 더 이상 양반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중인들이 글을 읽고 노비들이 시를 짓는 일이 일상사가 된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여항문인(閭巷文人)이라고 일컬었는데 여항은 일반 여염집을 가리키는 말이다. 각자 사연을 가진 수많은 여항문인들이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다. 아마도 양반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는 모습에 하층민들은 많은 박수갈채를 보냈을 것이다. 그들의 성공이 아름다운 또 다른 이유는 원래부터 글공부를 해야 하고 그럴만한 여유가 있었던 양반들과는 달리 대부분 생업에 종사하거나 혹은 글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들이었다. 정봉 역시 그러했다. 그는 나무꾼이었기 때문에 초부라고 불렸고, 당대 사람들 역시 정 초부라고 불렀을 것이다. 정봉의 원래 신분은 양근, 오늘날의 경기도 양평에 있는 어느 양반집의 노비였다고 전해진다. 노비의 신분이 세습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부모 모두나 어머니가 노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대로라면 평생 노비로 살아야 했지만 총명한 머리 덕분에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아마 오다 가다 주인마님이나 도령이 책을 읽는 것을 귀담아 듣다가 바로 외워버린 모양이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이런 일이 계속되자 주인은 그의 영특함을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자기 자식들과 같이 공부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로부터 그의 글 솜씨가 나날이 늘어났다.
    특히 시를 잘 지으면서 명성을 떨쳤는데 세상 사람들에게는 양근 땅에 사는 나무꾼 시인이라고 알려졌다. 마치 무림 고수들 사이에서 은거하고 있는 진짜 고수에 관한 소문이 떠도는 식이었다. 조수삼을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들이 다투어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남겼는데 외모와 이름, 그리고 출신들이 제각각인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아마 주인집에 매어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주인이 글 솜씨가 아까워서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줬는지 아니면 바깥에서 사는 외거노비로 풀어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배 한척을 구해서 양근과 동호(東胡), 그러니까 오늘날 동호대교가 있는 옥수동의 나루터를 오가면서 땔나무를 팔아서 생계를 연명했다. 그렇게 자유롭게 한양을 오가게 되면서 정 초부는 본격적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그가 이 시는 아마 땔감을 팔러 오가던 동강의 풍경을 읊은 것이리라
    東湖春水璧於籃 동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푸르다.
    白鳥分明見兩三 눈에 보이는 건 두세 마리 해오라기
    楡櫓一聲飛去盡 노를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 버리고
    夕陽山色滿空潭 노을 아래 산 빛깔이 강물 아래 가득하다
    이 시는 단원 김홍도가 그린 도강도의 그림 위에 쓰는 시문인 화제(畫題)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도화서 화원이자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김홍도가 자신의 그림에 시를 남길 정도였으니 얼마나 큰 명성을 떨쳤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가 지은 시들은 서정적이면서도 자연의 풍광을 거침없이 노래했다. 그래서 그가 지은 시들은 한양의 내놓으라 하는 양반들은 물론이고 거리의 여항문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의 시가 계층을 떠나 큰 사랑을 받았다는 점은 노론 양반들로 구성된 시회인 동원아집에 초청을 받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휴대폰 판매원에서 일약 슈퍼스타가 된 폴 포츠처럼 당대의 명사로 대접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민중들은 나무를 하는 노비라는 신분에도 굴하지 않고 시로서 명성을 떨친 그의 성공담을 두고 두고 얘기했다.
    9 min
  • 29. 길거리 협객2. 장오복
    우리는 종종 TV나 뉴스에서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거나 모두 외면하는 일에 나서는 영웅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저런 사람들 때문에 그나마 세상이 살만하다고 흐뭇하게 생각한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던 조선시대에도 이런 영웅들의 존재는 누구에게나 환영을 받았다. 장오복 역시 앞서 소개한 김오흥 같이 길거리 협객이었다. 김오흥이 배를 모는 강대사람이었다면 그는 한양의 관청에서 일하는 경아전이었다. 나름 공무원이긴 하지만 항상 양반인 상관에게 무시와 구박을 당하는 계층인데 그것 때문에 협객을 자처했는지도 모르겠다. 경아전에 나름 힘깨나 썼다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힘센 권력가의 비서실장격인 청지기 노릇을 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길을 가다가 싸움판이 벌어지면 걸음을 멈추고 옆에서 구경했다. 그러다가 강한 쪽이 힘을 믿고 약한 쪽을 윽박지르거나 혹은 말도 안 되는 것을 억지로 우기면 중간에 끼어들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유리한쪽이 눈을 부라리기 마련이지만 장오복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목조목 이치를 따져가면서 결국 사과를 받아내도록 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싸움이 나서 길어지면 주변 사람들이 장오복이 온다고 소리쳐서 뜯어말렸다고 한다. 당시 그의 존재감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마 힘이 없어서 이리저리 시달리던 백성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자 큰 인기를 끌지 않았나 싶다.
    그는 한양에 살면서 이런 저런 일화들을 남겨 놨다. 하루는 그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광통교를 지나가는데 때마침 건너편에서 건너오는 보교(步轎)와 마주쳤다. 우리가 사극에서 흔히보는 가마인데 여주인공이나 그녀의 어머니가 타고 다니는 뚜껑이 달리고 사방이 막혀있는 형태다. 가마에는 가마꾼 뿐 만 아니라 시종하는 인원들이 제법 많았다. 좁은 다리 위라서 장오복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깨를 마주치고 말았다. 그러자 가마꾼이 그를 밀쳐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냥 지나갔겠지만 장오복은 발끈 성을 내고는 차고 다니던 칼을 뽑아들고는 소리쳤다.
    “천한 가마꾼 놈들이 이리 기세를 떠는걸 보면 분명 가마 안에 탄 계집 때문이렸다.”
    그리고는 칼을 휘둘러서 가마의 밑바닥을 찔렀다. 보교의 밑바닥은 보통 소가죽을 깔아놨기 때문에 진짜 죽일 생각은 없었고 아마도 위협을 가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보교 안에 있던 요강에 맞아서 큰 소리가 나고 말았다. 보통 여인들이 타는 보교 안에는 급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종이를 깐 작은 요강을 넣었는데 여기에 맞은 모양이다. 요강에 맞은 게 문제가 아니라 그 가마의 주인공이 문제였다. 그녀는 검계를 토벌한 장붕익의 손자인 장지항의 애첩이었다. 할아버지인 장붕익처럼 무관이었던 그는 경상우도수군절도사를 비롯해서 어영대장등을 지낸 고관이었다. 협객이라고 자처하고 백성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고는 하지만 일개 아전에 불과한 그가 건드릴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아니나 따를까 보고를 받은 장지항은 당장 그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의 앞으로 끌려온 장오복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대신 배포 좋게 대꾸했다.
    “당신이 위에 있어서 나라가 평안하고 제가 거리에 있어서 다툼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사내대장부는 오직 장군과 저 밖에는 없다고 얘기하곤 합니다. 그런데 천한 계집 때문에 저를 죽이려 하시니 어찌 장군을 사내대장부로 생각하겠습니까?”
    그 얘기를 들은 장지항은 껄껄 웃으면서 그를 풀어줬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굽혀서 남을 도와주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에게 자주 신발을 선물하던 장인이 연모하던 기생이 있음을 알고는 도우미를 자청했다. 그래서 기생이 있는 기방에 앉아 있다가 장인이 나타나자 허둥지둥 뒷문으로 도망쳐버렸다. 그러자 장인이 연모하던 기생은 장오복이 두려워서 몸을 피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하고는 대접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렇게 협객에 로맨티스트였으니 길거리에서 인기가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했다. 양반들은 협객들을 무뢰배나 다름없다고 비난하면서도 정작 그들이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오늘날에도 남을 돕기 위해 나서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시민의식이 사라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어쩌면 불의를 참지 못하는 협객의 존재는 그 사회의 건강함을 재는 바로미터가 아닐까?
    11 min
  • 28. 이야기를 들려주는 남자, 이업복
    조선시대에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여러 가지 직업 중 가장 흥미로운 직업은 아마 책을 읽어주는 전기수(傳奇叟)일 것이다. 문맹률이 거의 제로인 오늘날에는 타인의 입에 의지해서 책을 읽을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한문이 주로 쓰였던 조선시대에는 아마 백 명 중에 한두 명 정도만 글씨를 읽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 접어들면서 한글로 된 소설책들이 등장하면서 아녀자들과 일반 백성도 이야기를 접할 기회가 늘어났다. 이야기에 대한 대중들의 호기심과 갈증은 나날이 높아져 갔지만, 여전히 책은 고가의 물건이었고, 귀한 존재였다.
    그 틈을 메워준 것은 다름 아닌 책의 내용을 들려주는 전기수였다. 시간과 돈이라는 장벽을 입을 통해서 뛰어넘게 해준 것이다. 그렇다고 전기수가 단순히 글을 못 읽는 사람에게 책을 낭독해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같은 내용을 강의하더라도 더 재미있고 흥미롭게 해주는 강사가 있는 것처럼 이들도 이야기를 재미있게 포장해주는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비슷한 장르로 창이 있긴 했지만, 일반 백성이나 부녀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종이에 활자로 인쇄된 책과 전기수가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하지만, 후자는 전기수의 몸짓이나 표정, 혹은 몸짓 덕분에 이야기가 지루해지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전기수의 낭랑한 목소리는 눕거나 혹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들을 수 있다. 따라서 실력이 좋은 전기수들은 슈퍼스타 대접을 받았다.
    이업복은 전기수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조선시대 생활사를 보여주는 책에서도 이미 소개가 되었고, 별순검이라는 인기 드라마의 일화에도 등장했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서얼인 그의 본래 직업은 겸인(傔人), 즉 청지기였다. 서얼 중에서도 풍족한 삶을 사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지 아니면 집이 가난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지기는 노비는 아니었지만 결국 주인의 수발을 드는 미천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귀에 쏙쏙 들어오는 낭랑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풍부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언제부터 본격적인 전기수로 나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반집 부녀자들을 비롯한 한양의 부호들이 다투어 그를 초청해서 얘기를 들었다는 것을 보면 전기수로 나선 직후부터 큰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감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토해내면 듣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거나 미친 듯이 웃었다고 하니, 아마 그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지 않았나 싶다.
    사실 전기수의 등장은 소설의 탄압과도 연관이 있다. 정조는 소설을 인간의 본성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탄압했고, 문체를 규정지으려고 했다. 정조는 전기수의 얘기를 듣던 구경꾼이 주인공이 좌절하는 부분을 듣자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담배 써는 칼로 무참히 살해하는 사건을 직접 언급하면서 소설의 위험성을 설파하기도 했다. 이업복이 활약하던 시대 역시 이렇게 소설이 불온한 취급을 받던 때였다. 이업복을 소개한 청구야담에는 그가 옆집에 사는 아전의 딸을 겁탈하는 장면이 나온다. 전기수와 양반집 부녀자 간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소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전기수를 찾았고, 그들의 이야기에 울고 웃었다. 한 말로 접어들면서도 전기수들은 여전히 맹활약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극장의 변사로 탈바꿈했다가 우리 곁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11 min
  • 27. 시대를 풍자한 재담꾼2. 김중진
    딱히 오락거리가 없던 조선시대에는 돈이 좀 있으면 기방에 가서 기생들과 어울리거나 술을 마시면서 놀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대다수의 백성들에게는 그런 유흥은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백성들에게 길거리에서 펼쳐지는 공연들은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들도 있었고, 소설의 내용을 들려주는 전기수들도 있었지만 가장 사랑을 받은 건 역시 익살과 풍자를 곁들인 재담꾼들이었다. 뇌물을 받고 잘못된 판결을 거리낌 없이 내리는 관리들을 비꼬는 황새결송을 메인 레퍼토리로 하는 김 옹이 큰 인기를 끌었다면 정조 때 활약한 재담꾼인 김중진은 오이무름이라는 뜻의 과농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오이무름은 오이를 푹 삶은 다음 초간장으로 간을 하고 생강과 후추를 넣어서 만든 요리로 치아가 없는 노인들이 먹기 좋은 음식이다. 김중진이 과농이라고 불린 이유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치아가 모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보기만 해도 웃음보가 터질만한 외모였기 때문에 단번에 백성들의 눈길을 잡아끌었지만 재담꾼으로도 진가를 발휘했다. 풍자와 해학에 달인이라는 평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세 선비의 소원이라는 다소 교훈적인 이야기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어느 날, 저승사자의 잘못으로 예정보다 일찍 하늘나라로 간 세 선비가 옥황상제 앞에 서게 되었다. 옥황상제는 그들을 다시 현생으로 돌려보내주기에 앞서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첫 번째 선비가 나서서 말했다.
    “저는 다시 태어난다면 이름난 가문에서 마음껏 책을 읽고 좋은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장원으로 뽑혀서 높은 관직에 올라 임금님을 모시고 역사에 이름이 남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옥황상제는 그 선비가 살아생전에 음덕이 있었으니 마땅히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이어서 두 번째 선비가 자신의 소원을 말한다.
    “살아생전에 가난이 너무 지긋지긋했습니다. 새로 태어나면 부자 집에 태어나서 많은 돈을 가지고 부모와 처자식을 배불리 먹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넉넉하게 베풀고 싶습니다. 부디 제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얘기를 들은 옥황상제는 두 번째 선비가 생전에 가난하게 지낸 것은 전생에 부자로 살면서 타인은 업신여기고 오만방자하게 굴었던 것에 대한 벌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조상이 공덕을 쌓았으니 조상을 봐서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대답한다. 두 선비가 물러나고 옥황상제는 마지막 남은 선비를 바라봤다.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마지막 선비가 입을 열었다.
    “저는 앞의 두 사람처럼 출세나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홍수와 가뭄이 들지 않고 부역과 세금이 없는 산과 물이 있는 좋은 땅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약간의 논밭을 가지고 싶습니다. 논밭을 일궈서 나온 곡식으로 가족들을 부양하고 자식들은 말썽을 부리지 않고 노비들도 말을 잘 들으며,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백 세까지 편안하게 살다가 병 없이 죽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마지막 선비의 소원을 들은 옥황상제는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지금 네가 말한 것은 바로 청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지만 아무에게나 줄 수 없는 것이지. 그런 복을 누릴 수 있다면 내가 어찌 이 자리에 아쉬움을 남기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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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 조선의 신동엽. 의영
    최근 들어서 걸 그룹들의 과다한 노출이 심심찮게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성의 상품화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겠다는 어른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보면서 문득 남녀칠세부동석의 나라 조선에는 어른들이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추재기이에서 의영에 관한 이야기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길거리에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는 재담꾼이었다. 비록 실력은 김 옹이나 김중진 같은 이들에게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으니 바로 ‘음담패설’이었다. 그것도 슬쩍 비춰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노골적으로 선 보였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을 때 내는 신음소리와 자세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고 한다. 거기에 곁들여서 동물들의 흉내를 냈다고 하니까 아이들도 왔다 갔다 하는 훤한 대낮의 길거리에 노골적인 19금 공연이 라이브로 펼쳐진 것이다. 사실 조선후기에는 성인문화가 꽃을 활짝 피웠다. 기방에서는 신입 기생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손님들 앞에서 옷을 다 벗기는 신고식을 했다. 노골적인 춘화도도 널리 퍼졌고, 금병매 같이 중국에서 들어온 성애소설들도 안 읽는 이가 없었다. 재담꾼 김 옹도 음담패설집인 어면순에 담긴 이야기들을 자주 얘기했다고 하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에 관한 호기심과 열정은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유학을 숭상하던 사대부들의 나라 조선 역시 아랫도리는 무장해제를 한 셈이다.
    그렇다면 의영이 이런 쪽으로 관심이 많았던 것일까? 아니면 실력으로는 재담꾼을 넘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자기만의 분야를 개척한 것일까? 하지만 그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천하에 즐기고 구경할만한 것으로 이것만한 것이 없다. 가볍게만 생각하지 말고 도안(道眼), 즉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로 바라본다면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큼 터득할 수 있고, 과하지 않게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얘기는 의영이 길거리에서 음담패설을 하고 음란공연을 한 것이 경쟁력을 강화하거나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비록 난잡하고 음란하다는 비난을 받았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의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활동을 한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케이블에서 맹활약을 하는 신동엽과 비슷한 포지션으로 보인다. 다른 재담꾼에게서는 보기 힘든 노골적인 음담패설과 음란함 덕분에 그는 거리의 명물이자 스타로 대접받으면서 조수삼이 쓴 추재기이의 한 켠에 실리는 영광을 누렸다. 조수삼은 효녀와 효자, 명망 높은 학자들과 위대한 시인들 사이에 이렇게 음란함으로 먹고 사는 사람을 올렸다. 그것은 의영의 존재, 나아가서는 음담패설과 외설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크게 사랑을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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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 존재감 그 자체. 홍 봉상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실력뿐만 아니라 행운을 비롯한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그 중에는 끈기도 필요하다. TV속 기인열전에 등장하는 기인들 대부분은 뭔가를 굉장히 오랫동안 한 사람들이다. 일반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존경과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이번에 소개할 조선의 길거리 스타는 뭔가 대단한 것을 이루거나 쌈박한 재주를 가졌던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얘기를 듣고 나면 ‘이런 지지리 궁상...’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법한 인물이다. 그는 다른 스타들과는 달리 한 게 거의 없었다. 단지 봄과 가을, 화창한 날 잔치가 열리고 풍악이 울려 퍼지면 어느 샌가 나타나서 맞은편 산꼭대기 위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잔치에 껴서 실력을 뽐내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산꼭대기에 앉아있는 게 전부였다. 잔치 구경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망원경이 없던 시절이니 산꼭대기 위에 올라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수 십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잔치판에도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항상 모습을 드러내자 이제는 그가 보이지 않으면 잔치를 연 사람들이 섭섭해 하거나 걱정을 할 지경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누구였을까? 조수삼은 그가 몰락한 양반 홍생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생은 생원을 뜻하는 말이지만 실제 생원시에 합격 했다기보다는 그냥 관례적인 높임말로 보인다. 그의 진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산꼭대기에 앉아있다고 해서 홍봉상(洪峯上)이라고 불렀다. 홍씨 성을 가진 이 양반은 왜 집에서 글을 읽지 않고 남의 잔치판이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앉아있었을까?
    조선 후기 들어서면서 몰락한 양반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잇단 전쟁과 당파싸움의 여파 때문인데 조선의 양반은 확고부동한 신분계층이 아니었다. 물론 경화세족(京華世族)이라고 불리는 귀족화된 양반집단도 등장하지만 외척 집안인 안동김씨를 포함한 극소수에 불과했다. 별다른 기반이 없고, 2~3대에 걸쳐서 과거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하면 양반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되면 길거리를 전전하면서 구걸을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홍봉상 역시 그런 부류로 보인다. 잔치판에 기웃거리면 그나마 먹을 것을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양반의 자존심상 직접 구걸을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가 선택한 차선책은 잔치판이 훤히 보이는 산꼭대기에 앉는 것이었다. 그런 기구한 사연이 있었지만 어쨌든 산꼭대기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그의 존재는 잔치에 빠져서는 안 될 이벤트가 되어버렸다. 그가 나타나면 잔치판의 기생이나 악공, 손님들은 다 같이 외쳤다.
    “저기 봐! 홍봉상 어르신이 나타났다!”
    그리고 사람들을 시켜서 술과 음식을 보냈다. 그러면 홍봉상은 굶주린 배를 채우고 조용히 사라졌다. 홍봉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대 조선의 아픔이나 어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존심과 배고픔 사이에서 그는 산꼭대기에 앉은 것을 선택했고, 사람들은 그의 등장에 환호를 보냈다. 존재감 그 자체로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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