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경상도 출신이라고 짐작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확실한 것은 성이 장 씨고, 송죽, 즉 소나무와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려서 장 송죽이라고 불렸다. 송죽 그림은 물론이고 물고기와 새를 잘 그렸으며 각종 서체까지 잘 썼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그림을 그릴 때 붓을 쓰지 않았다. 오직 손가락으로만 그렸다. 워낙 섬세하게 잘 그렸기 때문에 그의 그림이나 붓글씨를 본 사람들은 손가락을 붓 대신 썼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붓 대신 손가락이나 손톱, 혹은 발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라는 이 방식은 그림을 그릴 때는 반드시 붓으로 해야 한다는 통념을 산산조각 냈다. 17세기 중국에서 시작된 이 방식은 곧 조선으로 건너왔는데 미친 화가라는 별명으로 소개한 최북의 풍설야귀인도가 가장 유명하다. 최북만큼은 아니지만 장송죽 역시 지두화에는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술에 취하면 먹물을 한 사발 들이키고 종이 위에 뿜은 다음에 손가락으로 척척 그려냈다. 취한 그의 손끝에서 소나무와 대나무가 그려지고 잔잔한 호수에서 노니는 물고기와 나무에 앉은 새와 그 모든 것들을 내려다는 달이 탄생했다. 양반들은 지두화를 천시했다. 붓으로 그리지 않은 그림이 아니라는 사고방식을 고수한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의 지두화에 열광했다. 풍설야귀인도를 보면 양반들이 왜 지두화를 싫어했으며 백성들은 열광했는지 알 수 있다.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와 붓으로 그린 다른 그림과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들이 존재한다. 공간을 채우는 이미지라는 측면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방식, 그리고 무엇을 채우는지에 대해서는 갈라진다. 붓이라는 매개체를 거친 그림은 법칙과 규격에 몸을 굽힐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것 대신 상징과 관심에 젖은 그림들은 양반들의 감상품으로는 적합했지만 공자와 맹자 대신 자연을 벗 삼고 거리를 활보하는 백성들에게는 외면당했다. 붓을 거치지 않는 지두화는 필연적으로 불온할 수밖에 없다. 붓이 가는 대로가 아닌 머리가 이끄는 대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붓으로 그린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지만 지두화는 손가락이 가지고 있는 광폭함이 그대로 옮겨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흐릿하고 위태로운 백성들의 삶과 강렬한 연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양반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지두화의 새로움이 백성들의 눈에는 보였던 셈이다. 새로운 것은 늘 불온한 것이라고 외면했던 양반들에게 지두화가 환영받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존의 관습과 규칙에 억압당했고, 변혁과 개혁을 꿈꾸던 백성들에게는 지두화는 꿈이자 암시였다. 장송죽은 당대에는 꽤 유명했던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자세한 행적이나 그림이 남아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지두화를 그릴 때는 늘 취해있었다는 점은 세상을 향해 미쳤다고 외치면서 술에 취해 살아가던 최북과 닮아있다. 그들에게 조선은 맨 정신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세상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