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19일에 벌어진 ‘난리법석’을 잊을 수 없다. ‘미륵사, 선화공주와 무관하다’ ‘백제 무왕의 왕후 사택씨가 창건’ ‘서동요 설화 재검토 필요’ 등이 신문 제목으로 쏟아진 날이니 말이다. 그럴 만도 했다. 그 날 ‘미륵사지 서석탑(국보 제11호)의 해체 보수과정에서 석탑의 조성 이력을 밝히는 명문 금제사리봉안기가 확인됐다’는 제목으로 전해진 전북 익산 미륵사발 발굴자료는 두 눈을 의심케했다.
“백제 왕후인…좌평 사택적덕의 딸이…깨끗한 재물을 희사해서 가람을 세우시고…기해년(639년)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
“무왕의 부인(선화공주)이 용화산 큰 못에 나타난 미륵삼존을 보고 무왕에게 ‘이곳에 절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여 미륵사를 지었다”는 <삼국유사> 내용은 새빨간 거짓이었다는 말인가. 미륵사를 창건한 이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좌평(16관등 중 1품)의 딸인 사택씨가 무왕의 부인이라면 ‘무왕(서동)이 퍼뜨린 동요 때문에 혼인했다’는 ‘서동요’의 내용 또한 허구였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