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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6:12–33은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이 이 죄로 물든, 그래서 망가진 세상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삭은 씨를 뿌려 백 배의 수확을 거둡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해서 우리 삶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삭의 삶은 늘 갈등이 따릅니다. 본문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여 아브라함의 우물들을 막아버립니다. 이삭이 다시 우물을 파면 또다시 다툼이 일어나고, 자리를 옮겨도 갈등은 계속 따라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이라 부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22절).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평안함 정도로 생각하지만, 이삭의 삶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이 세상과의 갈등을 없애기보다 오히려 드러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도, 어쩌면 우리 주변에는 "블레셋" 사람들처럼 우리의 "우물"을 막으려 하고 우리를 시기하며 어렵게 하는 사람들은 계속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이삭은 자신의 "우물"을 지키려 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내려놓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런 모습이 아마도 겉으로는 약해 보이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는 것은 땅을 파서 만든 우물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수,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영생의 생수를 가진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우물"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판 우물에 고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땅끝까지 나누는 생수에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이자 믿음의 삶입니다. 축복을 누리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아 따르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주변에는 시기와 질투를 하는 종교인들이 블레셋 사람들처럼, 바리새인처럼 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를 잘 믿어서 갈등이 없는 삶이 아니라 죄로 망가진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다양한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말씀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다시 나타나십니다. 문제 해결 이후가 아니라, 여전히 긴장 속에 있는 그 자리에서입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24절)
이삭은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 자리에 장막을 칩니다. 이 말씀은 그가 무엇보다 먼저 예배자로 서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동행을 하는 모습입니다. 수많은 갈등이 빚어낸 이삭의 정체성은 우물이 아니라 생수이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삶의 “우물들”—안정, 성공, 인정—을 붙들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삭은 언약의 축복이 이 세상의 소유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입니다. 그가 예배자로 설 때, 아비멜렉이 찾아와 평화를 제안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삭에게는 우물과 평화가 깃듭니다. 그러나 우물과 평화를 고집해 예배를 망치게 되면 하나님도 생수도 놓칠 것입니다.
묵상 질문:
지금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복”이 오히려 갈등처럼 느껴지는 영역은 어디입니까?
내가 너무 붙들고 놓지 못하고 있는 “우물”은 무엇입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예배자로 서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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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bilee Christian Life CoachSend us Fan Mail
창세기 26:12–33은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이 이 죄로 물든, 그래서 망가진 세상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삭은 씨를 뿌려 백 배의 수확을 거둡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해서 우리 삶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삭의 삶은 늘 갈등이 따릅니다. 본문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여 아브라함의 우물들을 막아버립니다. 이삭이 다시 우물을 파면 또다시 다툼이 일어나고, 자리를 옮겨도 갈등은 계속 따라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이라 부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22절).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평안함 정도로 생각하지만, 이삭의 삶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이 세상과의 갈등을 없애기보다 오히려 드러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도, 어쩌면 우리 주변에는 "블레셋" 사람들처럼 우리의 "우물"을 막으려 하고 우리를 시기하며 어렵게 하는 사람들은 계속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이삭은 자신의 "우물"을 지키려 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내려놓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런 모습이 아마도 겉으로는 약해 보이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는 것은 땅을 파서 만든 우물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수,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영생의 생수를 가진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우물"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판 우물에 고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땅끝까지 나누는 생수에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이자 믿음의 삶입니다. 축복을 누리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아 따르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주변에는 시기와 질투를 하는 종교인들이 블레셋 사람들처럼, 바리새인처럼 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를 잘 믿어서 갈등이 없는 삶이 아니라 죄로 망가진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다양한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말씀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다시 나타나십니다. 문제 해결 이후가 아니라, 여전히 긴장 속에 있는 그 자리에서입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24절)
이삭은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 자리에 장막을 칩니다. 이 말씀은 그가 무엇보다 먼저 예배자로 서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동행을 하는 모습입니다. 수많은 갈등이 빚어낸 이삭의 정체성은 우물이 아니라 생수이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삶의 “우물들”—안정, 성공, 인정—을 붙들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삭은 언약의 축복이 이 세상의 소유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입니다. 그가 예배자로 설 때, 아비멜렉이 찾아와 평화를 제안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삭에게는 우물과 평화가 깃듭니다. 그러나 우물과 평화를 고집해 예배를 망치게 되면 하나님도 생수도 놓칠 것입니다.
묵상 질문:
지금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복”이 오히려 갈등처럼 느껴지는 영역은 어디입니까?
내가 너무 붙들고 놓지 못하고 있는 “우물”은 무엇입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예배자로 서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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