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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저 사람은 저렇게 은사가 넘치는데,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혹은 반대로, "왜 저 사람은 자기 은사를 저렇게밖에 쓰지 못할까?" 라고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은사가 많은 교회였지만, 그 은사가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과 비교의 도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고린도전서 12:1 — 개역개정
바울이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한 정보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지식이 넘쳐흘렀습니다. 문제는 그 지식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과거를 상기시킵니다. 너희가 이방인이었을 때, 말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다니지 않았느냐고(2절). 진정한 신령함과 거짓 신령함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하나입니다. "예수가 주시라"(3절). 성령으로 말미암은 은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냅니다.
첫째 — 같은 성령 · Point One — The Same Spirit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린도전서 12:4–6 — 개역개정
이 세 절에는 성부, 성자, 성령 —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등장합니다. 은사의 다양성을 말하면서 바울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하나이면서도 각각의 위격과 역할 안에서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시듯이, 그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사들도 다양하면서도 같은 원천을 가집니다. 다양성은 불일치가 아닙니다. 다양성은 하나님의 풍성하심의 표현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은사에는 서열이 없습니다. 경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서로 경쟁한다는 것은 그 선물을 주신 분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칼빈은 은사를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 각자를 통해 나타나는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Calvin, *Commentary on 1 Corinthians*, 12:4). 즉, 은사는 내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내가 통로가 된 것입니다. 통로가 통로를 비교하거나 질투하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7 — 개역개정
7절의 "유익"은 개인의 영적 만족감을 말하지 않습니다. 원어에서 이 단어는 공동체 전체의 덕을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분별, 방언, 통역(8-10절) — 이 은사들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내 안에서 멈추는 은사는 은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축적입니다.
둘째 — 성령의 주권 · Point Two — The Spirit's Sovereignty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2:11 — 개역개정
"그의 뜻대로." 이 네 글자가 핵심입니다. 어떤 은사를 얼마나 받을지는 받는 사람이 결정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결정하십니다. 이것은 얼핏 제한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깊은 자유입니다. 나는 없는 은사를 억지로 만들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은사를 부러워하며 자신을 초라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의 지혜가 지금 이 공동체에 꼭 필요한 것을 나를 통해 공급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은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고, 그 필요에 맞춰 은사를 분배하신다고(Ferguson, The Holy Spirit, 1996, IVP).
은사를 시기하는 것은 그 은사를 나눠주신 성령님의 지혜를 불신하는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공동체에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십니다.
셋째 — 하나의 몸 · Point Three — One Body
12절부터 바울은 은사 목록에서 몸의 비유로 자연스럽게 전환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적 장치가 아닙니다. 은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은사가 놓이는 맥락 — 즉 교회라는 몸 — 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몸"은 추상적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몸이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12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2:12–13 — 개역개정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당시 고린도 사회에서 이 구분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모든 구분이 한 성령 안에서 녹아든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세상이 나누어 놓은 선을 그대로 가져오는 곳이 아닙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공동체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서열과 경계가 복음 안에서 재구성되는 곳입니다. 팀 켈러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 공동체는 세상에서 가장 급진적인 포용의 공간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Keller, Center Church, 2012, Zondervan).
바울은 이어서 아주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합니다.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고(15절).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않겠다"고 한다면(16절). 몸 전체가 눈이라면 소리는 어디서 들을 것이냐고(17절). 이 비유를 읽으면 미소가 지어집니다. 하지만 그 안에 아주 진지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부정함으로 몸에서 이탈하려는 지체는, 사실 자신도 공동체도 모두 해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리를 거부하면, 그 자리는 비어버립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12:18, 21 — 개역개정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던 일입니다. 화려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조용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무시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방언이나 예언처럼 눈에 보이는 은사가 지식이나 가르침의 은사보다 더 가치 있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오히려 더 약해 보이는 지체가 꼭 필요합니다(22절). 덜 존귀해 보이는 지체에 더 큰 존귀함을 입힙니다(23절).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더 약해 보이는 지체가 오히려 꼭 필요합니다. 덜 존귀해 보이는 지체에 하나님은 더 큰 존귀함을 입히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방식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린도전서 12:26 — 개역개정
26절은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급진적인 구절 중 하나입니다. 함께 고통받는다. 함께 기뻐한다. 이것은 공감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몸의 현실입니다. 내 손이 아프면 내 온 몸이 그것을 느낍니다. 공동체 안에 고통받는 형제자매가 있다면,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 고통은 내 고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공동체 안의 고통에 스스로를 절연시킨 채 살아갑니까? 가장 행복한 공동체는 고통이 없는 곳이 아닙니다. 가장 건강한 공동체는 고통을 함께 지는 곳입니다.
복음의 기초 · Gospel Foundation
그렇다면 왜 은사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의 임재를 공동체 안에 나타내십니까? 그 이유는 은사가 궁극적으로 은사 수여자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치유의 은사는 모든 병자를 치유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가르침의 은사는 권위 있는 교사이셨던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언의 은사는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섬김의 은사는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몸의 각 지체를 통해 세상에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뿌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자기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쏟아부으신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은사는 타인을 위해 쏟아붓는 것입니다. R.C. 스프라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모든 참된 은사는 십자가형을 닮아 있다.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를 높이고, 섬기기 위해 주어진다"(Sproul, The Mystery of the Holy Spirit, 1990, Tyndale).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자유로워졌습니다. 그 자유는 우리를 안으로 향하게 하지 않습니다. 밖으로, 타인을 향해 쏟아지게 합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 살기 위해서.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삽니다 — 다른 이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는 그 사명의 도구입니다.
We are freed to live. And so we now live — to free others. The gifts of the Spirit are the instruments of that cal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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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bilee Christian Life Coach댓글 창
교회 안에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저 사람은 저렇게 은사가 넘치는데,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혹은 반대로, "왜 저 사람은 자기 은사를 저렇게밖에 쓰지 못할까?" 라고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은사가 많은 교회였지만, 그 은사가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과 비교의 도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고린도전서 12:1 — 개역개정
바울이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한 정보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지식이 넘쳐흘렀습니다. 문제는 그 지식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과거를 상기시킵니다. 너희가 이방인이었을 때, 말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다니지 않았느냐고(2절). 진정한 신령함과 거짓 신령함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하나입니다. "예수가 주시라"(3절). 성령으로 말미암은 은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냅니다.
첫째 — 같은 성령 · Point One — The Same Spirit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린도전서 12:4–6 — 개역개정
이 세 절에는 성부, 성자, 성령 —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등장합니다. 은사의 다양성을 말하면서 바울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하나이면서도 각각의 위격과 역할 안에서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시듯이, 그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사들도 다양하면서도 같은 원천을 가집니다. 다양성은 불일치가 아닙니다. 다양성은 하나님의 풍성하심의 표현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은사에는 서열이 없습니다. 경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서로 경쟁한다는 것은 그 선물을 주신 분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칼빈은 은사를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 각자를 통해 나타나는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Calvin, *Commentary on 1 Corinthians*, 12:4). 즉, 은사는 내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내가 통로가 된 것입니다. 통로가 통로를 비교하거나 질투하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7 — 개역개정
7절의 "유익"은 개인의 영적 만족감을 말하지 않습니다. 원어에서 이 단어는 공동체 전체의 덕을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분별, 방언, 통역(8-10절) — 이 은사들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내 안에서 멈추는 은사는 은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축적입니다.
둘째 — 성령의 주권 · Point Two — The Spirit's Sovereignty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2:11 — 개역개정
"그의 뜻대로." 이 네 글자가 핵심입니다. 어떤 은사를 얼마나 받을지는 받는 사람이 결정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결정하십니다. 이것은 얼핏 제한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깊은 자유입니다. 나는 없는 은사를 억지로 만들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은사를 부러워하며 자신을 초라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의 지혜가 지금 이 공동체에 꼭 필요한 것을 나를 통해 공급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은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고, 그 필요에 맞춰 은사를 분배하신다고(Ferguson, The Holy Spirit, 1996, IVP).
은사를 시기하는 것은 그 은사를 나눠주신 성령님의 지혜를 불신하는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공동체에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십니다.
셋째 — 하나의 몸 · Point Three — One Body
12절부터 바울은 은사 목록에서 몸의 비유로 자연스럽게 전환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적 장치가 아닙니다. 은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은사가 놓이는 맥락 — 즉 교회라는 몸 — 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몸"은 추상적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몸이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12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2:12–13 — 개역개정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당시 고린도 사회에서 이 구분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모든 구분이 한 성령 안에서 녹아든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세상이 나누어 놓은 선을 그대로 가져오는 곳이 아닙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공동체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서열과 경계가 복음 안에서 재구성되는 곳입니다. 팀 켈러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 공동체는 세상에서 가장 급진적인 포용의 공간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Keller, Center Church, 2012, Zondervan).
바울은 이어서 아주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합니다.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고(15절).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않겠다"고 한다면(16절). 몸 전체가 눈이라면 소리는 어디서 들을 것이냐고(17절). 이 비유를 읽으면 미소가 지어집니다. 하지만 그 안에 아주 진지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부정함으로 몸에서 이탈하려는 지체는, 사실 자신도 공동체도 모두 해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리를 거부하면, 그 자리는 비어버립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12:18, 21 — 개역개정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던 일입니다. 화려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조용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무시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방언이나 예언처럼 눈에 보이는 은사가 지식이나 가르침의 은사보다 더 가치 있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오히려 더 약해 보이는 지체가 꼭 필요합니다(22절). 덜 존귀해 보이는 지체에 더 큰 존귀함을 입힙니다(23절).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더 약해 보이는 지체가 오히려 꼭 필요합니다. 덜 존귀해 보이는 지체에 하나님은 더 큰 존귀함을 입히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방식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린도전서 12:26 — 개역개정
26절은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급진적인 구절 중 하나입니다. 함께 고통받는다. 함께 기뻐한다. 이것은 공감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몸의 현실입니다. 내 손이 아프면 내 온 몸이 그것을 느낍니다. 공동체 안에 고통받는 형제자매가 있다면,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 고통은 내 고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공동체 안의 고통에 스스로를 절연시킨 채 살아갑니까? 가장 행복한 공동체는 고통이 없는 곳이 아닙니다. 가장 건강한 공동체는 고통을 함께 지는 곳입니다.
복음의 기초 · Gospel Foundation
그렇다면 왜 은사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의 임재를 공동체 안에 나타내십니까? 그 이유는 은사가 궁극적으로 은사 수여자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치유의 은사는 모든 병자를 치유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가르침의 은사는 권위 있는 교사이셨던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언의 은사는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섬김의 은사는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몸의 각 지체를 통해 세상에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뿌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자기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쏟아부으신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은사는 타인을 위해 쏟아붓는 것입니다. R.C. 스프라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모든 참된 은사는 십자가형을 닮아 있다.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를 높이고, 섬기기 위해 주어진다"(Sproul, The Mystery of the Holy Spirit, 1990, Tyndale).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자유로워졌습니다. 그 자유는 우리를 안으로 향하게 하지 않습니다. 밖으로, 타인을 향해 쏟아지게 합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 살기 위해서.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삽니다 — 다른 이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는 그 사명의 도구입니다.
We are freed to live. And so we now live — to free others. The gifts of the Spirit are the instruments of that cal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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