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률의 낭독 한국사 12회 '영조가 꿈꾼 나라, 민국(民國)' 2부
토목사업이자 빈민구제사업이며 일자리까지 창출한 영조의 ‘준천(濬川)사업’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한 하나의 정책이 국가와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볼 수 있는 조선 영조 시대 시시콜콜한 뒷담화!
낭독 1 / <만기요람> ‘재용편’, 준천사(濬川司)
세종조(世宗朝)에 개천(開川)을 쳐내고 여러 물을 이끌어 수문(水門)으로 흘러들게 하였다.
세월이 오래되매 산이 벗겨지고 언덕이 무너지며 모래가 덮이면서 개천이 막히는 현상이 해마다 심해졌다.
경진년(1760년)에 영조 임금께서 특별히 신하들에게 명하여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면서
개천 바닥을 파내고 물길을 바로잡게 하였다. 또 좌우 돌둑과 여러 돌다리를 개축하고 무너진 데가 있으면 수선하도록 했다.
임금께서 두 번이나 친히 임하시어 인부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셨다.
57일 간 방민(坊民) 15만 명과 고정(雇丁) 5만여 명을 쓰고 돈 3만5천 민(緡)과 쌀 2천3백 곡(斛)을 들이고서야 준공하였다.
쓰고 남은 돈 3만 냥은 진휼청에 붙였는데 그 돈으로 해서(海西)와 관서(關西)의 곡물을 무역하게 하고
2천4백 냥을 더 불려서 빈민구제 사업에 썼다.
낭독 2 / 영조실록 1760년 2월 27일, 유골을 묻어주다
임금이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하며 하교하기를,
“준천(濬川)할 때 오래 된 유골이 흙에 섞여 나오거든 베로 싸서 지대가 높고 깨끗한 곳에 묻어 주어라.
또 준천을 마친 뒤에 수문(水門) 밖에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굶주림 끝에 구렁텅이에 쓰러져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측은해진다.
아! 각도의 관찰사들은 빈민구제 사업을 펼 때 군주가 친림한 것이나 다름없이 착실히 거행하라.” 하였다.
영조실록 1749년 8월 15일
임금이 세자와 함께 홍화문에 나아가 빈민구제를 행하며 이르기를, “백성을 위해 임금이 있는 것이지,
임금을 위해 백성이 있는 게 아니다. 백성을 구제하지 못한다면 임금도 ‘독부’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