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이라고 쓰고 ‘정치적 파트너’라고 읽는다!
고려태조 왕건의 29명의 부인들과 그 자녀들이 벌이는 왕위를 둘러싼 암투부터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왕비들의 고군분투까지~
그 드라마틱한 역사의 순간으로 ‘낭독한국사’가 안내합니다!
<고려사 열전> ‘태조 후비 – 신정왕태후’
신정왕태후 황보씨는 황주(黃州) 사람이며 태위 황보제공의 딸로 대종(戴宗)과 대목왕후를 낳았다. 애초 ‘명복궁대부인’으로 책봉되었다가 성종 2년(983년) 7월에 죽었다. 성종은 어려서 친모인 선의태후를 여의고 왕후 슬하에서 자랐으므로 크게 애통해 하며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嬪殿)에 나아가 ‘신정왕태후’라는 시호를 올렸다. 그 책문은 다음과 같다.
“태조께서 붕어하신 이후 근 오십년을 홀몸으로 계시면서 손자들을 돌보아 기르셨으니, 그 이름과 사적은 후비의 전기에 빛나나이다. 돌이켜 보건대 보잘 것 없는 이 몸은 일찍이 불행을 만났으니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어 조모님 품안에서 양육되었지만 마치 부모의 슬하에 있는 것처럼 편안했습니다. 맛난 음식은 남겨 두었다가 저를 먹여 주셨으며, 부드럽고 따뜻한 옷을 이 외로운 몸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그 정성스런 양육 덕분에 이 몸이 잘 자라 다행히 가문의 위업을 이어받고 외람되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고려사 열전> ‘태조 후비 – 신혜왕후 유씨’
신혜왕후 유씨는 정주(貞州) 사람이며 삼중대광 유천궁의 딸이다. 유천궁은 집이 크게 부유하여 고장 사람들이 ‘장자(長者)’라고 칭하였다. 태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를 지나다가 버드나무 밑에서 말을 휴식시키는데 마침 왕후가 길가 냇가에 서 있었다.
태조가 그 집에서 묵자 유 장자는 군사들을 풍족하게 대접하고 왕후로 하여금 잠자리에 들도록 하였다. 그 뒤 서로 소식이 끊어졌는데 왕후는 지조를 지키기 위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뒤에 태조가 이 말을 듣고 불러서 부인으로 삼았다.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궁예를 폐하고자 태조의 집에 찾아와 의논할 때 왕후는 장막에 숨어 엿들었다. 태조가 대업을 거절하자 왕후가 장막에서 나와 말하였다.
“의로서 학정을 바꾸는 것은 예로부터 있어온 일입니다. 지금 장수들의 의논을 듣고 첩도 분발이 되거늘 하물며 대장부이리요.”
그리고는 왕후가 손수 갑옷을 갖춰 입히니 장수들이 부축하고 나와 드디어 즉위하였다.
<고려사 열전> ‘태조 후비 – 장화왕후 오씨’
장화왕후 오씨는 다련군의 딸이며 대대로 나주(羅州) 목포(木浦)에 살았다. 수군 장수로 나주에 출진한 태조가 어느 날 목포 쪽을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머무르는지라 가보니 왕후가 빨래하고 있었다. 태조가 불러 잠자리에 들었으나 신분이 미천하므로 임신을 원치 않아 침석에 사정하였다. 왕후가 이를 흡입하고 드디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고려 제2대 왕 혜종(惠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