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 이후 민생안정이 중요한 이때! 신혼희망타운이 10만호로 확대된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때!
기혼남성 3명이 이야기하는 ‘국가가 지원하는 결혼’.
조선시대, 중매에서 혼수까지 국가가 챙긴 ‘특별한 결혼’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이덕무, <아정유고>, ‘김신부부전’
금상(今上) 15년 봄 2월에 주상이, 사서(士庶)가 빈궁하여 남녀의 혼인이 혹 제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고 한성(漢城) 오부(五部)에 칙명하게 하였다. 혼기가 먼 자는 앞당기게 하여 관가에서 자장(資裝)으로 돈 5백과 포목 두 끗을 도와 주게 하고 달마다 아뢰게 하였다.
김희집(金禧集)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니 현감(縣監) 사중(思重)의 서손(庶孫)이요, 신씨(申氏)는 본관이 평산(平山)이니 사인(士人) 덕빈(德彬)의 서녀(庶女)이다. 희집은 나이 28세이고 신씨는 나이 21세인데, 모두 재주 있고 어질지만 심히 가난하므로 사람들이 혼인하지 않았다.
이때에 희집은 심씨(沈氏)와 약혼하고 신씨는 이씨(李氏)와 약혼하여 관자(官資)는 받았으나 아직 혼인은 하지 않았다. 5월 그믐날 한성판윤(漢城判尹) 구익(具㢞)이 아뢰었다.
“5부 사람이 가난하여 혼기를 어긴 자를 지금 모두 권하여 성혼하였습니다. 오직 서부(西部) 신덕빈은 비록 관자가 있었으나 또한 혼구를 판비하기 어렵고 또 택일에 6월을 꺼리어 시기가 맹추(孟秋)에 있으며, 김희집은 처음에 약혼한 자가 ‘문지(門地)가 상등하지 않다.’고 핑계하여 부끄럽게 여기어 딸을 주지 않으려 합니다.”
6월 초2일에 주상이 하유(下諭)하였다.
“내가 오부에 혼자 사는 사람이 많은 것을 염려하여 혼인하게 권한 자가 무려 백 수십 인이 되는데 오직 서부(西部)의 두 사람이 예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천화(天和)를 인도하고 물성(物性)에 화합하게 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일은 시초를 정제하는 것이 귀하고 정사는 끝을 잘 맺는 것을 기약하는 것이다. 덕빈을 권하여 다시 길기(吉期)를 정하고 희집은 급히 아름다운 짝을 구하게 하며, 호조와 혜청(惠廳)은 모름지기 각각 보조하여 주는 것을 전보다 풍성하고 넉넉하게 하여 좋은 일을 완성하게 하라.”
이덕무, <아정유고>, ‘김신부부전’
서부령(西部令) 이승훈(李承薰)이 한성부(漢城府)에 달려가니 주부(主簿) 윤형(尹瑩)이 말하였다.
“이씨가 신씨를 배반하고 이미 다른 사람과 혼인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이승훈은 깜짝 놀랐다.
“지금 주상의 유지를 받들었는데 신씨의 혼기를 재촉할 곳이 없게 되었다. 전일에 아뢴 것이 이렇게 어긋났으니 누군가에게 책임이 돌아갈 것이다. 장차 어찌할 것인가?”
판윤(判尹) 이하가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이때 이승훈이 의견을 냈다.
“하관(下官)이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희집은 경림 상공(慶林相公)의 후손이요, 신씨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의 후예이니 모두 훌륭한 문벌이고 또 그 나이가 상적하며 가난한 것도 같고 만난 처지도 마침 서로 비슷하다. 하물며 또 같은 날에 이름과 성을 임금께서 보시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이 정한 것이다. 어찌 서로 더불어 통혼하여 배필을 이루지 않겠는가?”
한성판윤 구익(㢞)이 드디어 부령(部令)과 주부(主簿)를 권하여 두 집의 중매가 되게 하였다. 이에 이승훈은 반석방(盤石坊) 희집의 집으로 가고 윤형(瑩)은 반송리(蟠松里) 덕빈의 집으로 가니, 두 집이 모두 문에 사립이 없고 처마가 축 늘어지고 서까래는 비에 젖어 공중을 가리키고 해가 한나절이 지났는데도 부엌 연기는 쓸쓸하였다. 이승훈이 신씨와 약혼하는 것이 편의함을 말하니, 희집이 머리를 구부리고 한참동안 멈칫멈칫하였다.
“희집이 장가를 들지 못한 것은 아버지가 없고 가난한 때문이었는데, 다행히 심씨가 허혼을 하기에 삼가 관자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버림을 당했으므로, 스스로 늙어서 흰머리가 되도록 짝이 없는가 여겼고, 또 노모를 봉양할 수 없음을 슬퍼하였습니다. 지금 가르쳐 주심을 받으니 위로되고 감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저쪽에서 혹 따르지 않는다면 곧 희집의 팔자가 기박한 것이오.”
윤형도 덕빈에게 권하니 그가 슬픈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남의 부모가 되어서 딸자식으로 하여금 혼사가 늦어지게 하여 지금에 이르렀고, 또 내가 남과 약혼하였다가 남이 먼저 나를 배반하였으니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성스러운 유지를 내리시어 자장을 넉넉히 주시고 여러 공들이 몸소 매작을 행하시니, 감격하기 지극하여 실로 부끄러워 죽을 지경입니다. 김군은 명문의 자손이니 감히 허락하여 사위를 삼지 않겠습니까?”
이에 이승훈과 윤형이 크게 기뻐하여 서로 통보하였다. 이승훈은 곧 부사(部史)를 시켜 경첩(庚帖)을 덕빈에게 전하고, 윤형은 덕빈을 권하여 택일을 하여 보니 12일이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