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여성 노동자의 임금 차별 철폐’,’산전 산후 임금 지불’ 요즘 많이 듣는 구호 인 것 같지만 사실! 미스터 선샤인의 시대에도 외쳤던 구호였다? 조선 시대 ‘여왕’으로 군림한 어머니부터 조국의 독립과 여성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딸들까지! 역사에 묻힌 우리의 여성들을 낭독한국사에서 파헤쳐보겠습니다!
<명종실록 1565년 4월 6일, 대비가 승하하다>
사신은 논한다. 중종의 후비 윤씨는 천성이 굳세고 사나우며 문자(文字)를 알았다. 중종이 승하하자 장경왕후 소생인 인종은 효도를 극진히 하여 계모 윤씨를 섬겼다. 그러나 윤씨는 빈번히 인종을 원망하고 심지어 ‘우리 가문을 살려 달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인종이 곧 승하하고 친혈육인 주상이 즉위하매 윤씨는 문득 큰 옥사를 일으켜 선왕을 비호한 사람들을 모두 역적으로 지목하였다. 그 화가 길게 뻗치어 10여 년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고 마침내 사림(士林)을 짓밟고 으깨어 거의 다 쳐 죽이기에 이르렀다.
그 뒤에 불사(佛事)를 끝없이 일으켜서 내외의 창고가 다 고갈되었다. 뇌물을 공공연히 주고받고 백성의 땅을 마구 빼앗으며 내수사의 노비가 팔도에 나가 방자히 굴었다. 그의 아우 윤원형과 함께 권력을 전횡하니 20년 사이에 국정이 혼탁해지고 민생이 곤궁해져 나라가 망할 뻔하였다.
또 임금을 즉위시킨 공이 있다며 때로 주상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였다.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꾸짖고 호통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하였다. 효성스러운 주상은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렸고 목 놓아 울기까지 하였다. 결국 주상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비(尹妃)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이 다함’이라고 하였으니, 윤씨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박차정, ‘남경조선부녀회 선언문’>
우리 조선의 여성은 오랫동안 전통적 속박으로 인권이 유린되어 왔고 다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생존권을 박탈당함으로써 전통적 속박에 의한 가정의 노예일 뿐만 아니라 일본제국주의 약탈시장의 상품으로 임금노동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 아래 선각적 여성들에 의한 활동이 있었지만 일본경찰의 탄압과 지도부의 불통일에 의해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지 못하였다. 또한 부녀 대중과 유리된 몇몇 간부들의 운동이어서 전 민족 혁명운동과 연결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 운동이 대단한 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우리 조선부녀를 현재 봉건적 노예제도 하에 속박하고 있는 것도 일본제국주의이고, 또 우리를 민족적으로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제국주의이다. 우리들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부녀는 봉건제도의 속박, 식민지적 박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또 일본제국주의가 타도된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혁명이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방면에서 진정한 자유 평등의 혁명이 아니라면 우리 부녀는 철저한 해방을 얻지 못한다.
<근우회 강령>
첫째, 조선여자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키 위하여 공고한 단결과 의식적 훈련을 기하며, 둘째, 조선여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전적 이익의 옹호를 기한다.
<근우회 행동방침>
여성에 대한 사회적 법률적 일체 차별 철폐, 일체 봉건적 인습과 미신타파, 인신매매 및 공창의 폐지, 농민부인의 경제적 옹호, 부인노동자의 임금차별 철폐 및 산전 산후 임금 지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