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내어달라는 왜나라와
제후국의 안위따위는 관심없는 명나라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조선이 한 선택은?
동북아시아의 판세를 바꾼 임진왜란의 시작에서
난세의 영웅 이순신의 등장까지 시시콜콜한 임진왜란 뒷담화!
[낭독 1 / 유성룡, <징비록(懲毖錄)>, 서문과 도입부]
“임진의 화(禍)는 참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세 도읍이 함락되었고, 온 나라가 모두 무너졌다.
그러고도 오늘날이 있다는 것은 진정 하늘이 도운 게 아니라고 누가 말하겠는가.
<시경(詩經)>에 이런 말이 있다.
‘내 지나간 일을 징계하고,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노라.’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징비록>을 쓰는 연유라 하겠다.
지난날 내 귀로 듣고, 내 눈으로 본 것들 중에서
임진년부터 무술년에 이르기까지의 몇 가지 일들을 기록한다.
만력(萬曆) 병술년에 일본 사신 귤강광(橘康廣)이 평수길의 서신을 갖고 우리나라에 왔다.
원래 일본 국왕 원씨(源氏)는 우리나라와 이웃하여 사이좋게 지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도 사신을 보내 경조(慶弔)하는 예를 잊지 않았다.
그 증거로 신숙주도 임금의 친서를 가지고 왕래한 사실이 있다.
그는 뒷날 세상을 떠날 때 성종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아무쪼록 일본과의 화친을 잃지 마시옵소서.”
하지만 그 뒤 우리나라의 사신은 끊어졌다.
간혹 일본에서 사신이 왔을 때도 예의로 대접해 돌려보낼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평수길이 원씨를 대신해서 왕이 되었고,
사신 귤강광을 우리나라에 보낸 것이다.
[낭독 2 / 조경남, <난중잡록(亂中雜錄)> 임진년 상]
“임금은 신립이 패전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선 명나라에 긴급한 사정을 고하기로 했다.
이원익과 최흥원을 보내어 평안도와 황해도를 순찰하게 하고,
광해군을 세자로 책립하여 군사 등 중대한 나랏일을 감독하도록 했다.
이때 대신 유홍이 울며 간하기를, “종묘와 사직과 신민이 여기 있는데,
전하께서 어디로 가십니까. 가벼이 움직여서 민심을 흔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곤룡포로 눈물을 닦으며 긴 한숨을 내쉬고 나서, “내가 어디로 가겠소.” 하고는,
애통한 교서를 내렸다. 판서 김명원을 도원수로 삼아 남은 경기 장정들을 거느리고
한강 가에 진 치게 하고, 병조와 비변사에게는 성을 지키는 기구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도성 사람들은 남녀귀천 할 것 없이 다 달아났으며,
불량한 무리들은 작당하여 닥치는 대로 재물을 약탈하였다.
피해자들이 길에 가득했고, 부모자식이 서로 잃어버린 채 도망쳐갔다.
임금은 인심이 이 지경이라는 소식을 듣고 적을 피하기로 결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