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 한국사 17회 '이순신, 죽어야 사는 남자' 1부
한반도 국방의 위기가 이순신에게는 기회였다!?
ㅇㅇ때문에 파직크리당한 이순신의 ㅇㅇ은!?
위인전만 읽고는 알 수 없는 ‘인간’ 이순신을 알아보는 시간!
그리고 선조실록VS선조수정실록의 팽팽한 맞대결!
[낭독 1]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통제사 이순신을 하옥시키라 명하고, 원균으로 대신하였다.
이보다 앞서 적장 소서행장과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서로 통하여,
요시라(要時羅)가 그 사이를 왕래하였는데, 그가 말한 바가 마치
가등청정과 사이가 좋지 않은 듯해서 우리나라는 그걸 믿었었다.
이때에 왜적이 재침을 모의하면서 우리나라의 수군을 꺼려했고,
그중에서도 더욱더 이순신을 꺼렸다. 이에 요시라를 보내서 말하기를
‘강화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실로 가등청정이 주장하고 있어서이다.
만약 그를 제거하면 나의 한이 풀리게 되고 귀국의 근심도 제거될 것이다.
모월 모일에 가등청정이 어느 섬에서 잘 것이니, 귀국에서 만약 수군을 시켜
몰래 잠복해 있다가 엄습하면 결박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응서가 이로써 보고하니, 임금이 황신을 보내 이순신에게 비밀리에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다.
전함을 많이 출동하면 적이 알게 될 것이고,
적게 출동하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거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가등청정이 과연 다대포 앞바다에 왔다가 그대로 서생포로 향했는데,
이는 실로 소서행장과 함께 작은 군사로 우리를 유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오히려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며 이순신을 하옥시켜 고문하고,
마침내 전남병사 원균을 통제사로 삼았다.
<난중일기> 1593년 9월 14일
“연구를 거듭하여 조총을 만들어냈는데 왜총보다 성능이 뛰어나므로
명나라 사람들이 와서 쏘아보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같은 모양으로 많이 제작하고자 순찰사 등에게 견본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