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문지기도 마다하지 않았던
백범 김구 선생...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진정한 독립을 이루기를 바랐던
김구 선생의 인생을 시시콜콜 알아보는 시간!
<백범일지>, 윤봉길 의사, 1932년 4월
홍구의 채소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윤봉길 군이 어느 날 조용히 찾아왔다.
“제가 채소를 등에 지고 매일 홍구 방면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로 왔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디에 목숨을 바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동경 사건과 같은 경륜을 지니고 계실 것으로 믿사오니 부디 지도해 주십시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나눠 보니 살신성인의 큰 뜻을 품은 의기의 남자가 아닌가. 나는 감복했다.
“뜻이 있는 자는 언젠가 반드시 일을 이루는 법이오. 내가 요즘 생각하던 것이 있으나 적임자를 못 구해 번민하던 차였습니다. 왜놈들이 전승의 위세를 드높인다며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천황의 천장절 경축전례식을 성대하게 거행한다는군요. 군은 일생의 큰 목적을 이 날 달성하는 게 어떻겠소?”
윤 군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듣고 보니 가슴 속 번민이 없어지고 아주 평안해집니다. 준비해주십시오.”
<백범일지>, 국모보수, 1898년 8월 26일
저녁 여섯 시쯤 되자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 이어 옥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옳지 지금이 그때구나 하고 앉았는데 같이 있던 죄수들은 내 얼굴을 보며 마치 자기네들이라도 죽일 것처럼 벌벌 떨었다.
“아이쿠 창수 이제는 살았소. 지금 대군주 폐하께옵서 대청에서 감리 영감을 부르시어 김창수의 사형을 정지하라고 친칙(親勅)을 내리셨소.”
흘러나온 경위는 이랬다. 사형은 임금의 재가를 받아 집행하도록 되어 있는데 승지 가운데 누군가가 각 사형수의 내력을 뒤적이다가 ‘국모보수(國母報讐)’ 네 글자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미 재가를 마친 안건을 다시 빼내 임금에게 보이니, 대군주가 어전회의를 열고 목숨이나 살려 보자 하여 전화로 칙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경성 이외에 장거리전화가 개통된 것은 인천이 처음인데, 사형 집행일인 8월 26일이 바로 인천까지의 전화 가설공사가 완료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