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국민을 좀비화 시키려는 악의 무리들!
그에 맞서 목숨을 걸고 저항한 ‘진짜 보통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가장 큰 지지자는 올림픽!?
너무나도 당연한 ‘민주주의’와 ‘자유’의 소중함을 느껴보는 시간~
역사칼럼니스트 권경률, 한학자 정정기와 함께 ‘역사해요~!’
권경률.. ‘1987, 역사를 바꾸는 공감의 힘’
“종철아 와 못 가노? 아부지는 할 말이 없데이.”
1월 16일 화장한 아들의 육신을 임진강에 흩뿌리며 박종철의 아버지는 울부짖었다. 할 말이 없다고 해서 진짜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아무리 입에 재갈을 물려도 슬픔과 분노의 말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울려 퍼지는 법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대학가에서는 억눌린 말들이 기지개를 켰다. 1980년 광주항쟁의 진실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학생들은 해외에서 제작한 광주 비디오를 몰래 봤다. 비디오 상영회에 참석하기 위해 두터운 영어원서와 문란한 선데이서울을 끼고 다니기도 했다. 의식 없는 대학생처럼 보여야 경찰 검문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독재정권은 ‘의식화’를 근절하려고 애썼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의식이 깨어있어야 하건만 그들은 오히려 빨갱이로 몰아 배척했다. 독재의 치부를 들킬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독재자가 원하는 것은 ‘의식화’가 아니라 ‘애국심’이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벌써 북한에게 먹혔다. 그러니 너희들은 그저 받들겠습니다, 하고 따라라. 이것이 반공이데올로기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진실은 가둘 수 없다. 천주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까지 들고 일어나면서 진실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항쟁 7주기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이 터져 나왔다.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한 하수인들이 구속되고 문책 인사가 단행되었지만 성난 민심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권경률.. ‘1987, 역사를 바꾸는 공감의 힘’
6월 9일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의 직격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뿌연 최루가스 속에서 한 학생이 피 흘리며 부축 받는 장면은 외신 카메라에 포착되어 온 나라를 들끓게 만들었다. 대학생들은 그 사진을 담은 스카프와 손수건을 동여매고 거리로 나섰다. 군사독재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국민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6월 항쟁의 함성은 울림이 컸다. 고문살인 규탄, 최루탄 추방, 직선제 쟁취 등 독재 치하에서 억눌린 말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넥타이 부대까지 가세하면서 집회 참가자 수는 50만, 100만, 200만으로 늘어났다. 거리로 나서지 않은 시민들도 자동차 경적을 누르고 성금을 걷어 전달하며 동참했다. 대한민국은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정당한 분노를 마음껏 표출했다.
군대까지 동원하려 했던 독재정권도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미국 등 서방국가에서 압력이 들어온 데다 쿠데타 위험성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인다는 취지의 선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이한열은 7월 5일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한국인은 민주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갔다. ‘1987’이라는 숫자는 그렇게 역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