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초기에 희대의 스캔들을 일으킨 양녕대군과 어리! 이 간통사건은 양녕대군에겐 임금 자리와 맞바꾼 ‘상사병’이, 어리에겐 흐느끼도록 서러운 ‘불상사’가 되고 말았는데… 복잡한 정치상황에서 세자의 간통사건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는지 샅샅히 파헤쳐보는 권경률, 정정기의 낭독한국사! 많은 청취바랍니다~
[태종실록 1418년 5월 30일, 세자의 손편지]
세자가 내관 박지생을 보내어 친히 지은 손편지를 올렸는데 사연은 이러하였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입니까? 어리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그가 살아가기가 어려울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사람들과 서로 통하게 하면 명예가 아름답지 못할 것이므로, 이 때문에 내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도록 신의 여러 첩을 내보내어 곡성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 차니, 어찌 스스로에게서 반성하여 구하지 않으십니까?
이 첩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이 적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손들의 첩을 모두 금할 수 있습니까? 지금 숙빈이 아이를 가졌는데 일체 죽도 마시지 아니하니, 하루아침에 변고라도 생긴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스스로 새 사람이 되어, 털끝만치도 전하께 걱정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이 이 편지를 변계량 등에게 내어 보이고,
“이 말은 모두 나를 욕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긍익, <연려실기술> ‘세종조고사본말’]
태종 18년 6월에 책봉하여 세자가 되었다.
8월에 태종이 지신사 이명덕을 불러서 이르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지, 이제 벌써 19년이나 되었다. 아침에나 밤에나 삼가며 두려워하였으나 위로 하늘의 뜻을 보답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 재변이 내리고 또 묵은 병이 있으니, 이제 세자에게 이 자리를 전해 주려 한다.” 하였다.
세자가 경복궁에서 즉위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상왕전(上王殿)에 사은하며 군국(軍國)에 관한 대사는 모두 상왕에게 여쭙기로 하였다.
세종이 상왕에게 상수(上壽)할 때 뭇 신하들이 모시고 잔치를 벌였다. 상왕이 술에 취하여 뭇 신하와 더불어 춤추며 이르기를, “왕위를 맡기는데 만일 적임자를 얻지 못했다면 비록 걱정을 잊으려 한들 되었겠는가. 새 임금은 참으로 개국한 뜻을 계승하여 문치(文治)로 태평을 이룩할 임금이로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