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혼녀, 재혼녀에 대한 이미지는 여전히 부정적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여성이 남편과 헤어지고 재혼하는 일이 너무나 당연한 시기가 있었다는 것! 여러분 알고 계셨습니까? 지금과는 많이 다른 윤리관의 세상으로 함께 떠나보시죠!
<고려사 열전> ‘후비 1 – 헌애왕태후’
헌애왕태후 황보씨는 대종(戴宗)의 딸로 목종(穆宗)을 낳았다. 목종이 즉위하자 태후에게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라는 존호를 올려 책봉했다. 목종의 나이가 18세가 되었으나 태후가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하며 섭정했으므로 세상에서는 그를 천추태후(千秋太后)라 불렀다.
<고려사절요> ‘목종대왕 1003년’
동주 사람 김치양(金致陽)은 태후의 외족(外族)으로 성품이 간교하였다. 일찍이 머리를 깎고 중이라 하면서 남들을 속이고 천추태후의 궁에 드나들어 자못 추잡한 소문이 있었으므로 성종이 장형(杖刑)을 내리고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고려사 열전> ‘후비 숙창원비 김씨’ 전
숙창원비 김씨는 김양감의 딸로 자태가 아름다웠다. 일찍이 진사 최문에게 시집갔다가 젊어 과부가 되었다.
세자 충선왕은 1297년 어머니인 원나라 제국공주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 충렬왕이 궁녀 무비를 끼고 돌자 그녀를 미워하여 베었다. 그리고는 충렬왕을 위로한다며 과부 김씨를 들여 숙창원비로 봉하였다.
1308년 충렬왕이 승하하자 충선왕은 빈전에서 제를 드린 후 숙창원비의 오빠 김문연의 집에 행차하였다. 비와 함께하는 시간이 오래되므로 사람들이 의심하였더니 10여 일 뒤 아예 그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얼마 후 숙비로 봉하였는데 비가 밤낮으로 아양을 부렸다. 왕이 혹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팔관회마저 정지하였다.
<고려사 열전> ‘왕규’ 전
왕규는 시중 강렬공 왕충의 아들이었다. 1170년 정중부의 난이 터졌을 때 왕규는 휴가를 받아 모친 곁에 있어서 화를 면하였다. 얼마 후 명종의 부름을 받고 남경 유수가 된 그는 오로지 업무에 전념하면서 정중부, 이의방 등 무신 권력자들과 거리를 뒀다.
왕규는 평장사 이지무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처남 이세연이 김보당의 난에 연루돼 목숨을 잃었다. 아내의 집안 때문에 이의방의 살생부에 오른 왕규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중부의 집에 몸을 숨겼다.
이때 정중부의 딸이 과부가 되어 친정에 와있었는데 왕규를 보고 기뻐하여 그와 간통하였다. 왕규는 살기 위해 조강지처를 버리고 정중부의 사위가 되었다. 덕분에 그는 이의방이 죽자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