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된지 1년남짓만에 약관의 나이로 요절한 임금, 예종
지금까지도 밝혀지지않은 예종의 사인! 병사인가!? 독살인가!?
그리고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계승서열 3위의 자을산군이 왕으로 추대된 이유는?
예종의 죽음과 성종의 즉위 뒤에 감춰진 정치적 내막을
시시콜콜 파헤치는 본격 역사 뒷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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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 1 / 예종실록 1469년 11월 28일
진시(辰時)에 임금이 자미당(紫薇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환관이 소리 내어 울며 안에서 나와 고하니, 새벽부터 모여든 대신들도 소리 없이 흐느꼈다.
이때 겸예조판서 신숙주가 도승지 권감에게 일렀다.
“나라에 큰일이 났으니 주상(主喪)은 불가불 일찍 결정하여야 한다.”
권감이 부마 정현조를 통해 세조비 정희왕후에게 아뢰었다.
“청컨대, 주상을 정하여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소서.
이것은 큰일이므로 누구를 시켜 전달할 수 없으니, 친히 여쭙게 하소서.”
정현조가 왕복하면서 드나들기를 서너 번 하자, 이윽고 정희왕후가
강녕전(康寧殿) 동북쪽 뒷방에 나와서 원상(院相)들과 도승지를 불러들였다.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최항, 홍윤성, 조석문, 윤자운, 김국광, 한계희, 임원준, 권감 등이 들어오니,
태비가 슬피 울었다. 조금 후에 신숙주가 아뢰었다.
“신 등은 밖에서 다만 옥체가 편치 않다고 들었을 뿐인데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태비도 소회를 밝혔다.
“주상이 앓을 때도 매일 나를 알현하였으므로, 병이 중하면 이렇게 하겠는가 싶어 심히 염려하지 않았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찌 할꼬?”
여러 원상들이 아뢰었다.
“원컨대 주상으로 누가 적합한지 전교를 듣고자 합니다.”
이에 정희왕후가 정현조에게 명하여 전교하였다.
“원자(元子)가 바야흐로 어리고, 또 월산군은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다.
자을산군이 비록 어리기는 하나 세조께서 일찍이 그 도량을 칭찬하여 태조에 비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을 삼는 것이 어떠하냐?”
모두 말하기를,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였다.
예종실록 1469년 11월 4일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본부에서 서리(書吏)와 하인들을 보내 정인지의 집에 분경(奔競)을 금하도록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알현하려고 하므로 붙잡으니,
정인지의 종들이 우리 하인들을 억류하고 서리의 옷고름을 끊었습니다.
정인지가 사헌부를 사칭했을지도 모른다며 이들의 호패를 검사하고 꾸짖었습니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