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위에 있던 자, 이자겸
인주 이씨 집안은 이자겸의 할아버지인 이자연 때부터 왕실과 혼사를 맺고 거대 문벌귀족으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자연의 딸과 이자겸의 누이, 사촌누이들을 비롯하여 딸까지 11대 문종부터 17대 인종에 이르기까지(15대 숙종을 제외하고) 무려 10명의 여인들이 왕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왕실 외척 가문의 막강한 권력을 가장 잘 누린 인물이 바로 이자겸입니다. 자신의 외손자인 인종을 왕위에 올리는 데 성공한 이자겸은 왕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무방한 존재가 되었고 최고 권력자로서 거침없이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왕 이상의 권력자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이자겸이 더욱 기세등등해지자 인종은 더 이상 용납하기 어려웠던 인종은 이자겸을 축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권력을 가진 이자겸을 단번에 제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인종 자신이 이자겸의 집에 감금되어 독살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이자겸의 사돈인 척준경을 끌어들여 결국 이자겸을 몰아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왕의 권위가 바로 회복되기에도 어려울 정도로 이자겸의 권력은 막강했습니다.
고려 제 2 국도 서경의 마지막, 서경천도운동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의 궁궐이 불에 타자 인종은 도읍지 개경이 아닌 다른 곳에 머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대개 지금의 서울인 남경이나 평양인 서경에 자주 머물렀는데 특히 서경에서 인종은 새로운 세력들과 만나게 됩니다. 서경은 원래 고려 북진정책의 기지였지만 동북 9성을 반환한 이후 중앙 권력과 멀어진 상태였습니다. 이에 서경 세력들은 인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승려 묘청은 땅의 기운이 많이 약해진 개경 대신 아직 지력이 왕성한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인종도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궁궐을 새로 지으며 천도 준비를 했습니다. 인종은 기존의 개경 세력이 아닌 서경 세력을 통해서 정국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이미 문벌귀족 가문끼리 서로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는 개경 세력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 인종은 서경천도를 머뭇거리게 되고 이에 서경천도운동은 좌절되었습니다. 묘청은 군사를 일으켰지만 개경세력의 대표주자인 김부식의 토벌군의 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서경천도운동은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의 대결이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서경은 더욱 더 중앙 권력과 멀어지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