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 라이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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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라이크역사 episodes

  • 31.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에 담긴 속 뜻은?
    당시 어렵게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 첫날 윤음을 발표했습니다. 그 윤음에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 말을 두고 많은 분들이 정조가 신하들에게 선전포고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뒷부분을 살펴보면 '선대왕께서 종통의 중요함을 위해 내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선대왕께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나의 뜻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대왕 영조가 말했던 정통의 문제는 절대 건드리지 않겠다. 즉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효장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을 건드리면 선왕의 뜻을 건드리는 것과 동시에 나의 존재도 없는 것이라고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조는 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말한 것일까요? 사도세자의 죽음과 정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영조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왕위에 오른 정조가 만일 영조의 정책에 명백하게 반대한다면 노론세력이 정조를 공격할 것이고 또한 정국을 파탄으로 몰아가면서 정조에게 그 책임을 지울 가능성이 높았다. 신하들은 서로 상반되는 내용을 모두 받아들일 수도, 또 받아들이지도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죠. 이는 정조의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55 min
  • 조선에 '북학'의 바람이 불다
    ‘북학’은 이제까지 조선 양반 사회의 숙원 가운데 하나인 ‘북벌’의 반대말이기도 하다. 곧 청을 정벌하자는 북벌이 박제가에 이르러 청을 배우자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국가정책에 반영되지는 못했지만 박지원과 같은 백탑시파 동인들에게는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변화하고 있던 청의 모습을 보고 조선의 변화가 미진하다는 것을 느꼈다. 박지원과 박제가는 사농공상의 차별에서 벗어나 상업을 발달시키기 위해 수레, 화폐를 활용하자고 주장했다. 박제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소비를 진작시켜야 경제가 발전한다는 주장을 했다. 박제가의 논리 속에는 한동안 조선 사회에서 논의되지 않았던 ‘부국’이 들어있었다. 북벌론에서 ‘강병’은 중요한 화두였지만 그 배경이 되는 ‘부국’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없었던 것에 비하면 오히려 더 현실적이었던 셈이다.
    48 min
  • 29. 아들이 죽어야 했지만 죽일 수는 없었던(?) 영조의 선택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른 이유는 아직도 뚜렷하지 않다. 이미 의대증과 같은 정신병이 있었으니 영조가 왕위를 넘겨주기에는 부족하다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병을 얻게 된 배경, 더 나아가 영조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영조는 세자의 능력과 자질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영조의 질책이 커질수록 두려움도 커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56 min
  • 28. 영조의 민생정치
    완벽하지는 않지만 정치의 안정을 이룬 영조는 느슨해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펼쳤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인권에 대한 관심이다. 압슬이나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것과 같은 악형을 없앴다. 사형수에 대한 삼복법(三覆法)을 엄격히 시행하는 명을 내리기도 했고 억울한 일을 호소할 수 있는 신문고 제도도 부활시켰다.
    36 min
  • 27. 연잉군이 올린 간장게장을 먹고 죽은 경종?
    1688년(숙종 14)에 태어난 경종은 세 살이 되던 해에 이미 세자가 되었다. 자질이 총명하여 신하들의 기대가 컸다. 그렇지만 계속된 환국에 어머니 희빈 장씨마저 죽으면서 세자 자리도 위태롭게 되었다. 그나마 대리청정을 할 때 세자 교체의 빌미를 주지 않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여 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제 경종과 소론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 여겼지만 경종은 힘이 없었고 정국의 중심에는 노론이 있었다. 노론은 빠르고 과감하게 움직였다. 경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여기에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까지 가세하여 결국 연잉군을 세제로 만들었다. 경종이 아직 34세임을 생각하면 상당히 무리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경종 자신도 후사를 두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긴 했던 것 같다. 여기에 숙종의 의도도 더해졌다. 세자를 교체하려던 숙종의 계획은 영조 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고 그 자리에 세손을 앉힌 것이다. 경종에겐 우울하기만 한 평행이론이다.정종이나 사도세자처럼 불행한 위치에 있던 경종이지만 본질에서 다른 점이 있었다. 아직 연잉군이 태종과 같은 권력을 가진 상황도 아니었고 자신은 사도세자와 달리 이미 왕위에 올라 있었다. 위험하게 세제 지위를 유지하던 연잉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영조다. 하지만 세간에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고 왕이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경종이 죽은 원인이 세제가 올린 게장과 곶감 속에 든 독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소문에 몇몇 소론 강경파는 영조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여겼고 남인 일부도 이에 동조했다. 이는 결국 반란으로 이어졌다.이 해가 갑자로는 무신년이라 ‘무신란(戊申亂)’으로 부르기도 하고 난의 주모자가 이인좌여서 ‘이인좌의 난’이라 하기도 한다
    40 min
  • 26. 세자의 대리청정 속에 숨긴 숙종의 뜻
    숙종은 1717년 세자의 대리청정을 선언했다. 명목으로는 자신의 건강 문제였지만 본뜻은 세자를 폐위하고 대신 연잉군, 혹은 연령군을 세자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자를 지지하는 소론의 힘을 약하게 해야 했고 또 세자를 폐위할 계기를 만들어야 했다. 이미 숙종은 희빈 장씨의 죽음과 함께 세자에 대한 믿음도 약해졌다. 그래서 세자 책봉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노론 세력을 다시 중용했다. 그리고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하고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동안 실수를 찾아내어 그를 빌미로 세자를 바꾸려했다.
    46 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