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신하의 기 싸움
1494년, 성종이 3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자 당시 19세이던 세자 융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가 낳은 진성대군은 일곱 살의 어린나이였다. 연산군의 즉위는 당연하면서도 자연스러웠지만 신하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신하들이 볼 때 연산군은 여러 가지 위험요소를 안고 있었다. 일단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가 있었다. 성종이 100년 동안 거론하지 말라고 했지만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연산군이 어느 정도까지 성종의 정치를 계승할지 알수 없어 걱정이었다. 성리학의 이념에 따르려는 성종은 때로는 왕권을 제약하는 대간의 건의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세자로서 연산군이 보여준 모습은 조금 달랐다.
이렇듯 부담스러운 연산군의 즉위에 대간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대간들이 한 발 양보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연산군을 강하게 논박해 자신들의 의도에 맞도록 이끌어 가는 것이다. 대간들은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어떠한 의도가 있어서 한 선택이라기보다 성종 때부터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것이다. 문제는 연산군이 아버지 성종과 달랐다는 데 있다. 연산군은 대간들이 왕이라도 자신들을 어찌할 수 없으리라 생각해서 대신들을 쉽게 공격하는 것이라 여겼다. 연산군의 이러한 생각은 대간들의 간언을 그저 왕을 능멸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상당히 위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간들이 갑작스럽게 대의 명분을 버리고 비리와 타협할 수는 없었다. 자신들의 뒤에는 대의명분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림들의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피바람 갑자사화
갑자사화의 시작은 이세좌가 연산군이 따라주던 술을 흘린 일, 그리고 대신인 홍귀달이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명을 어긴 데서 시작되었다. 이들을 유배시킨 연산군은 며칠 뒤 궁궐 안에서 폐비 윤씨 문제를 끌어올려 사건을 확대하였다. 대개 폐비 윤씨 문제를 갑자사화의 중요한 이유로 꼽지만 실제 사화가 확대되는 모습을 보면 본래 그것이 유일한 이유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먼저 재위 10년 만에 갑작스럽게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일을 안 것은 아니다.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고 1년이 채 되기 전에 폐비 윤씨의 존재, 기일을 알아내고 추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연산군 2년에는 사람을 보내 폐비 윤씨의 묘를 살펴 고치도록 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죽음이 성종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으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갑자사화 직전, 연산군이 임사홍의 아들인 임숭재를 통해 폐비가 소용 정씨와 숙의 엄씨의 참소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전해 듣고 또 그 내용을 폐비의 친정어머니 신씨를 통해 확인하는 과정에서 충격을 받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폐비 윤씨 문제는 내명부 사이에서 벌어진 투기와 참소의 문제로 왕실 안에서 끝낼 것이기도 하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를 참소해 죽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엄귀인과 정귀인을 때려죽이고 그 일족도 모두 죽였다. 그리고 계모인 정현왕후와 할머니 인수대비를 협박하고 정귀인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은 귀양을 보낸 뒤 죽였다. 만일 폐비 윤씨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였다면 여기에서 그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나흘 뒤 연산군은 전교를 내려 윤씨를 폐비할 때 관여한 재상들에 대한 내용을 승정원일기를 통해 조사해오라 했다. 폐비 윤씨 사건을 평소에 간쟁하기 좋아하던 대간들이나 그 일을 말리지 않은 대신이 왕을 능멸해 일으킨 사건으로 확대 해석한 것이다. 이는 ‘능상의 죄’를 다시 한 번 묻겠다는 뜻이며 여기서는 대간과 대신, 곧 사림과 훈구를 가리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시작한 갑자사화는 참혹했다. 239명이 연루되어 잡혀 들어갔는데 그중 122명이 부관참시를 당하거나 처형당하거나 혹은 고문 중에 죽었다. 죽은 사람의 규모나 비율이 무오사화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 가운데 대신이 20명, 대간이 92명이다. 숫자로만 보면 선비, 곧 사림이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때 처형된 대신들의 면면을 보면 가볍게 볼 수 없다. 이극균, 이세좌, 윤필상, 성준, 한치형, 어세겸이 처형되었고 한명회, 정창손 등이 부관참시되었다. 이때 연산군이 내린 형벌의 방법은 참혹하여 낙신(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지기), 촌참(마디마디 잘라서 죽이기), 부관참시, 쇄골표풍(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파가저택(집을 부수고 그 자리에 연못을 만들기) 등이 행해졌다. 이때 이루어진 쇄골표풍은 연산군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형벌로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또 추쇄도감을 설치해 처형당한 사람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처럼 갑자사화는 기본적으로 연산군의 의도에 따라 진행되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 어떠한 일관된 논리가 아니라 연산군의 자의적 해석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