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 라이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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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라이크역사 episodes

  • 16. 두 얼굴의 왕, 광해
    선조가 인정하지 않는 세자, 광해군
    선조가 40세가 넘도록 정비인 의인왕후에게 소생을 얻지 못하자 신하들은 열세 명의 서자 가운데 한 명을 세자로 책봉하라고 건의합니다. 하지만 선조는 인빈 김씨 소생의 어린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어 세자 책봉 계속해서 미루었는데요. 그러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왜군의 침략 속도가 예상 밖으로 빨라 왕이 평양까지 파천을 하자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에 대한 의견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분조는 혹시라도 선조에게 이상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종묘사직을 이어갈 세자가 또 하나의 정부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분조를 책임지는 세자는 피란을 떠난 왕을 대신해 민심을 수습하고 전쟁을 격려하는 역할도 해야 합니다. 그러니 분조를 어린 신성군이 맡는 것은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선조는 장성한 아들 가운데 평판이 가장 좋은 둘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광해군의 분조 활동은 눈부셨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돌아선 민심을 돌리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여러 신하들의 지지도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선조에게 다른 방도가 생각난 것일까요? 1602년, 선조는 인목왕후를 계비로 맞아들이게 됩니다. 당시 인목왕후는 19세, 광해군은 28세였죠. 그리고 4년 뒤 선조는 고대하던 적자를 얻게 됩니다. 그게 바로 영창대군입니다.
    하지만 1608년 선조가 죽으면서 상황이 다시 바뀌었습니다.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된 인목왕후는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 광해군이 왕위에 즉위하게 됩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온전한 왕이 아니었는데요.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대한 간섭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명은 광해군이 적자, 큰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성군인가, 폐주인가
    왕위에 가장 어렵게 올라간 이유 때문일까요? 광해군은 왕권에 대한 도전에 민감했습니다. 자신보다 왕위계승 순위가 높은 임해군이나 영창대군의 존재 자체에 위협을 느꼈습니다. 광해군이 이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곳곳에서 출세나 보상을 노리고 역모를 알리는 고변이 이어졌고 고변은 옥사로 연결되었죠. 조선에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의 자신에 입맛에 맞춰 권모술수를 부리는 이들로 영창대군도 희생되었습니다.
    당시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은 인목대비의 묵인 아래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는 거짓 모함을 받게 됩니다. 그 때문에 영창대군은 아홉 살 나이로 어머니와 떨어져 강화도로 귀양을 갔고,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이 영창대군을 죽였는데요. 정항은 영창대군은 방에 가두고 아궁이에 불을 계속 땝니다. 영창대군은 펄펄 끓는 방바닥을 피해 며칠 동안이나 어머니를 찾다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창대군의 죽음은 단순히 이이첨의 사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광해군도 알고 묵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제 광해군의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은 인목대비뿐입니다. 그러나 가족관계로 볼 때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어머니다. ‘효’를 중요시 여기는 조선에서 임해군이나 영창대군의 문제와 인목대비의 문제는 완전히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에게 인목대비는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광해군은 1615년 창덕궁이 완성되자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두고 혼자 옮겨갔다. 그리고 1617년, 여러 신하들을 불러 폐비문제를 논의하도록 했다. 결국 다음 해 인목대비는 서궁(경운궁)에 유폐되었고 암살의 위협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광해군은 세자가 되어 분조를 이끌며 지혜롭고 과단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어렵게 왕위에 오른 뒤 현실적인 왕권 위협 세력에 맞닥뜨리자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습니다.
    55 min
  • 15. 임진왜란, 승리한 전쟁의 공로는 누구에게로?
    7년의 전쟁을 끝으로 조선은 승리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건재한다고 해서 조선이 전쟁의 피해를 덜 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조선 정부의 연명은 말 그대로 상처뿐인 영광일 따름이다. 이 국면을 전쟁으로까지 몰고 간 책임의 주체는 누구이며, 승리한 전쟁의 공로는 누구에게로 돌아갔을까? 엉뚱하게도 조선은 이 전쟁의 승리를 명의 원군에 돌렸다. 이 전쟁은 불가항력이어서 조선 정부의 책임은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자신들의 무능함을 가렸다. 대신 명은 이른바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것과 같은 은혜, 곧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나라가 되었다.
    49 min
  • 14. 임진왜란을 앞둔 3국의 온도 차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
    일본: 명나라를 공격할테니 길을 내주시오?
    일본의 목표가 명나라였다는건 분명한 사실. 그들의 목표는 조선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조선을 대적의 대상이라고 취급하지도 않았던 것. 문제는 이런 도요토미의 생각이 후대까지 남아있었다는 거고, 그 생각은 2차세계대전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된다.
    조선: 명나라는 세상의 중심
    우스운 일인지 안타까운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조선에게 일본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성리학이 들어서게 되면서 조선은 명을 세상의 중심. 태초부터 존재한 나라라고 여긴다. 이 개념은 조선이 택한 성리학이 국정운영에 심화되면서 생기게 된 것. 우리나라 역사 전통만 보더라도 고구려나 고려 더 나아가 조선 초만 하더라도 중국은 정치를 위해 형식적으로 사대를 해주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선조 시대에 들어서는 명나라는 정말로 '큰 나라'. 우리가 섬겨야할 나라가 된 것이다.
    명:
    조선의 외 길 사랑일까. 명나라는 조선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이 일본하고 손을 잡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명나라.
    47 min
  • 13. 성리학에 빠진 조선의 정치가들
    훌륭한 철학이 늘 훌륭한 정치를 이끌어내는 것은 아니다. 관념 속에 존재하는 이론과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을 공유하는 유능하고 도덕적인 정치가가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학자가 곧 정치가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실물을 다루고 각종 변수가 이어지는 정치 현장에서 이기나 심성과 같은 형이상학에 관심을 두는 원칙주의자가 정치를 한다면 말이다. 상상이 어렵지 않다.
    42 min
  • 11. 중종에게 선택받은 ‘조광조’, 다시 버림받기까지.
    조선 역사에서 왕을 끌어내리고 새로운 왕이 등극한 사례가 처음 등장했다. 바로 중종반정이다. 그리하여 조선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연산군이 세자수업을 충실히 받았던 것과 비교하면 중종은 왕위에 오를 준비가 전혀 없었던 셈이다. 또한 적법한 절차나 자신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니 주변을 살펴야 했다.박원종, 성희안,유순정 등 반정 3대신이 모든 권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중종은 왕이라고 하기엔 힘이 없었다. 그래서 부인 신씨의 폐위도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형식적이라도 연산군과 반대로 행동해야 했기 때문에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모습을 갖춰야 했다. 연산군이 쫓겨난 이유가 바로 왕을 능멸한다는 이유로 신하들을 무시하고 폭력으로 대했기 때문이 아닌가. 중종은 쉽사리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자 대간이 정국의 주요 공간을 차지했다. 도덕정치를 지향하는 성리학의 이념이 다시 정치의 주요 이념으로 등장한 것이다.
    대간의 발언이 강해질수록 정치 상황은 꼬여갔다. 대신들은 대간들의 눈치를 보았고 중종은 자신의 뜻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부분의 현안이 해결되지 않고 지지부진해지는 상황이었다. 무언가 해결점이 필요할 때 중종은 조광조를 발탁했다.
    이미 젊은 학자들 사이에서 명망을 얻고 있던 조광조의 발탁은 중종이 정치 개혁을 통해 자신의 정치를 하겠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라할 수 있다. 중종이 조광조에게 눈을 돌린 이유는 무엇보다 대간을 압도할 수 있는 논리를 펼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50 min
  • 10. 연산군, 피바람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왕과 신하의 기 싸움
    1494년, 성종이 3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자 당시 19세이던 세자 융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가 낳은 진성대군은 일곱 살의 어린나이였다. 연산군의 즉위는 당연하면서도 자연스러웠지만 신하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신하들이 볼 때 연산군은 여러 가지 위험요소를 안고 있었다. 일단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가 있었다. 성종이 100년 동안 거론하지 말라고 했지만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연산군이 어느 정도까지 성종의 정치를 계승할지 알수 없어 걱정이었다. 성리학의 이념에 따르려는 성종은 때로는 왕권을 제약하는 대간의 건의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세자로서 연산군이 보여준 모습은 조금 달랐다.
    이렇듯 부담스러운 연산군의 즉위에 대간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대간들이 한 발 양보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연산군을 강하게 논박해 자신들의 의도에 맞도록 이끌어 가는 것이다. 대간들은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어떠한 의도가 있어서 한 선택이라기보다 성종 때부터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것이다. 문제는 연산군이 아버지 성종과 달랐다는 데 있다. 연산군은 대간들이 왕이라도 자신들을 어찌할 수 없으리라 생각해서 대신들을 쉽게 공격하는 것이라 여겼다. 연산군의 이러한 생각은 대간들의 간언을 그저 왕을 능멸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상당히 위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간들이 갑작스럽게 대의 명분을 버리고 비리와 타협할 수는 없었다. 자신들의 뒤에는 대의명분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림들의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피바람 갑자사화
    갑자사화의 시작은 이세좌가 연산군이 따라주던 술을 흘린 일, 그리고 대신인 홍귀달이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명을 어긴 데서 시작되었다. 이들을 유배시킨 연산군은 며칠 뒤 궁궐 안에서 폐비 윤씨 문제를 끌어올려 사건을 확대하였다. 대개 폐비 윤씨 문제를 갑자사화의 중요한 이유로 꼽지만 실제 사화가 확대되는 모습을 보면 본래 그것이 유일한 이유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먼저 재위 10년 만에 갑작스럽게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일을 안 것은 아니다.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고 1년이 채 되기 전에 폐비 윤씨의 존재, 기일을 알아내고 추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연산군 2년에는 사람을 보내 폐비 윤씨의 묘를 살펴 고치도록 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죽음이 성종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으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갑자사화 직전, 연산군이 임사홍의 아들인 임숭재를 통해 폐비가 소용 정씨와 숙의 엄씨의 참소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전해 듣고 또 그 내용을 폐비의 친정어머니 신씨를 통해 확인하는 과정에서 충격을 받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폐비 윤씨 문제는 내명부 사이에서 벌어진 투기와 참소의 문제로 왕실 안에서 끝낼 것이기도 하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를 참소해 죽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엄귀인과 정귀인을 때려죽이고 그 일족도 모두 죽였다. 그리고 계모인 정현왕후와 할머니 인수대비를 협박하고 정귀인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은 귀양을 보낸 뒤 죽였다. 만일 폐비 윤씨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였다면 여기에서 그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나흘 뒤 연산군은 전교를 내려 윤씨를 폐비할 때 관여한 재상들에 대한 내용을 승정원일기를 통해 조사해오라 했다. 폐비 윤씨 사건을 평소에 간쟁하기 좋아하던 대간들이나 그 일을 말리지 않은 대신이 왕을 능멸해 일으킨 사건으로 확대 해석한 것이다. 이는 ‘능상의 죄’를 다시 한 번 묻겠다는 뜻이며 여기서는 대간과 대신, 곧 사림과 훈구를 가리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시작한 갑자사화는 참혹했다. 239명이 연루되어 잡혀 들어갔는데 그중 122명이 부관참시를 당하거나 처형당하거나 혹은 고문 중에 죽었다. 죽은 사람의 규모나 비율이 무오사화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 가운데 대신이 20명, 대간이 92명이다. 숫자로만 보면 선비, 곧 사림이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때 처형된 대신들의 면면을 보면 가볍게 볼 수 없다. 이극균, 이세좌, 윤필상, 성준, 한치형, 어세겸이 처형되었고 한명회, 정창손 등이 부관참시되었다. 이때 연산군이 내린 형벌의 방법은 참혹하여 낙신(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지기), 촌참(마디마디 잘라서 죽이기), 부관참시, 쇄골표풍(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파가저택(집을 부수고 그 자리에 연못을 만들기) 등이 행해졌다. 이때 이루어진 쇄골표풍은 연산군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형벌로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또 추쇄도감을 설치해 처형당한 사람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처럼 갑자사화는 기본적으로 연산군의 의도에 따라 진행되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 어떠한 일관된 논리가 아니라 연산군의 자의적 해석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47 min
  • 9. 조선의 마지막 옹주, 덕혜 (영화 덕혜옹주 픽션과 팩트사이)
    지난 3일 손예진, 박해일 주연의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했다. 영화는 권비영의 소설 『덕혜옹주』를 각색한 것으로 비극적인 조선의 마지막 옹주라는 팩트와 픽션을 적절히 가미해 그려냈다는 점에서 당시 큰 호응을 얻었다. 항간에는 영화 개봉을 앞두고 “역사 왜곡이다, 미화다.” 말도 많았다. 이유는 영화의 주 내용이 덕혜옹주가 독립운동의 구심점의 역할을 담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 때문. 덩달아 “덕혜옹주를 우리 역사의 비극적인 조선의 마지막 옹주, 여인의 삶으로 그려냈다면 어땠을까”하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어쨌거나 픽션을 가미한 영화고 소설이다. 중요한 건 우리 역사의 묻힌 인물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영화는 영화대로, 역사는 역사대로 훑어보는 게 아닐까.
    49 min
  • 8. 성종,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정치 구조를 만들다
    성종은 훈구파를 통제할 무언가를 원했습니다. 훈구파는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운 자들인데요. 이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성종은 당시 예문관에 속해 있던 학술기관인 홍문관을 크게 떼어내 사헌부와 사간과 함께 묶어 버립니다. 해서 사간원이나 사헌부의 대간이 임금에게 간언을 해도 듣지 않으면 홍문관까지 합쳐 3사가 합동으로 간언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언로의 확대는 유교 정치의 기본이기 때문에 훈구파도 반대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리학의 왕도정치는 성종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성리학의 왕도정치에는 왕 자신도 포함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성종은 언로를 확대해 공론을 바탕으로 정치를 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밝힘과 동시에 훈구파의 권력을 제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대간(언관)은 이전보다 활발하게 움직였고 왕을 중심으로 대신과 대간이 긴장관계에 놓이면서 서로 견제하는 정치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한 시스템은 재상들에 대한 독재권, 독주를 중하위 관료들(언관)을 통해 막아내는 구조였습니다. 왕과 대신, 언관. 기본적인 삼각구조를 이루면서 어느 한쪽으로 권력이 쏠리는 것을 막아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리학적인 왕도정치라는 시스템을 조선이 갖추게 됨으로 이제는 누구 하나 잘나고 못난 것 상관없이 조선 왕조는 굴러가게 되는 기가 막힌 시스템이 완성되었습니다.
    53 min
  • 7. '세조', 후대의 평가가 엇갈리는 왕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후대에 그가 받은 묘호는 바로 ‘세조’입니다. 실은 세조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상당히 엇갈리는데, 하나는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인간적인 모습과, 왕에 오르고 나서의 정치적 평가때문입니다. 특히 세조가 편찬한 경국대전은 조선이 한 나라로 굳건히 자리잡을 수 있도록 기여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46 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