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질문을 던지면 대개는 한글 창제를 비롯해 해시계, 자격루, 측우기 등 과학 발명품을 선뜻 답한다. 물론 근대 이전 한국사를 통틀어 가장 뚜렷한 과학 발전의 성과를 이룬 시기는 단연 세종 재위 기간일 것이다. 중요한 건 수많은 과학기구와 발명품들의 등장 배경에 무엇이 깔려있냐는 것이다. 세종 때의 평가가 세종 개인에게 너무 집중하다 보니 세종이 다스린 조선의 모습이 가려진 면이 있다. 세종의 가장 큰 목적은 민생의 안정이었다. 그래서 관심을 둔 것이 바로 ‘토지 제도’다. 세종은 조선의 생산 기반을 농업이라 생각했고, 농업이 안정되기 위해선 농민이 안정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농업국가인 조선의 세금은 당연히 토지의 생산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세종은 공법의 기본 얼개는 정부가 만들되 관리와 백성의 의견을 널리 골고루 물어서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전국의 토지를 6단계로 나누고 풍년과 흉년의 격차를 9단계로 두는 공법, 즉 전분6등법, 연분9등법의 공법이 만들어졌다. 또한 세종은 전국에 사람을 보내 노인들의 의견을 채록했다. 농사에 대해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노농(老農), 곧 농사 경험이 많은 노인들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수집한 여러 현장 경험을 반영하여 농법 을 정리한 책을 만들었는데 이 책이 바로 <농사직설>이다. 비옥한 땅과 그렇지 않은 땅의 차이, 지역마다 다른 강수량에 따라 생산되는 양이 달라졌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거둬들이는 세금의 차이가 필요했고, 이를 측정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 바로 측우기다. 측우기는 <농사직설>을 간행하며 관심을 기울인 농법과 세금제도인 공법의 기초가 된다는 점, 그리고 백성을 위하는 정치라는 세종의 목표를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세종은 정책과 제도 하나하나를 만들 때 심혈을 기울였다. 제도를 만들 때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사례까지 검토한 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살펴보고 시행 후 나타날 문제점까지 면밀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시행하도록 했다. 각 지역으로 집현전 학자들을 보내 자료를 수집하고, 면밀히 검토했다. 현재의 문제만을 보면 나중에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고 또 조직과 제도의 일관성을 망가뜨릴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한 세종의 치적은 자연스럽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부분을 아울렀다. 그리고 500년 조선을 움직일 수 있는 제도와 문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