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 인조와 대신들이 지향한 정론의 실체
동생 능창군과 아버지 정권군의 죽음에 원한을 품은 능양군은 광해군을 몰아내기 위한 거사를 준비했다. 1620년 무렵부터 능양군은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마침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후금을 염려한 정책을 취한 것을 계기로 대신들이 대체로 광해군에게 등을 돌린 터라 세력 규합이 어렵지 않았다. 광해군은 벼랑 끝에 서 있었고, ‘서인이 원망하고, 남인이 이를 갈며 소북이 비웃는 형세’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능양군은 1,4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들어왔다. 광해군은 거사 소식을 듣고 도망쳤는데 금방 잡혀와 상황이
싱겁게 끝났다. 인조반정이다.
인조정권의 분열, 이괄의 난
반정에는 성공했지만 민심은 아직 흔들리고 있었다. 반정세력은 호위청을 만들어 사람들을 감시했으며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인물은 역모로 몰아 제거했다.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고 여기저기서 무고가 이어졌다.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사건이 이괄의 난이다. 반정세력의 중요한 무신이었던 이괄은 인조 정권을 지키는 핵심 인물이었다. 그래서 서북지역의 정세가 위험해지자 부원수로 임명되어 평안도로 갔다. 문제는 얼마 뒤 발표된 ‘정사공신(靖社功臣) 53명의 명단이었다. 이괄이 1등 열 명 안 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이괄은 크게 실망하며 분통을 터뜨렸는데 이러한 때에 이괄이 역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정부에서는 이괄을 체포하기 위해 금부도사를 보냈다. 이괄은 금부도사와 같이 온 선전관을 무참하게 죽인 뒤 반란의 길로 들어섰다. 군대를 이끌고 도원수 장만을 피해 한양으로 남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괄이 이끄는 1만 군대는 정부가 보낸 진압군들을 물리치며 승승장구했다.
1624년 2월 8일, 인조는 이괄의 반란군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로 파천했다. 왕이 떠난 한양은 바로 반란군에 점령당했다.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인조와 반정세력이 공주에서 우왕좌왕하는 사이 도원수 장만은 한양 공격 계획을 세웠다. 이괄이 승리에 취해 있는 사이 장만이 이끄는 관군은 안현(지금의 안산, 무악)을 점령했다. 다급해진 이괄이 공격해왔지만 관군이 먼저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던지라 상황은 관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결국 이괄 세력이 밀리는 것을 본 한양 백성들은 돈의문을 닫아버렸다. 퇴로가 막힌 이괄은 이천으로 달아나던 중 부하 장수 중 하나에게 죽임을 당했다. 도원수 장만의 군사작전으로 이괄의 난은 끝이 났지만 그 후유증은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양의 민심이 이괄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인조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양뿐 아니라 인조가 파천을 떠났던 충청도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인조 정부는 이괄에게 협력했던 백성들에게 죄를 물을 것인지를 논의했다. 격론 끝에 불문에 붙이기로 했지만 이는 공식적인 입장일 뿐이었다. 한양 안에서는 끊임없이 고소와 폭력이 이어졌다. 난은 끝났지만 한양에는 여전히 불신과 어수선함, 공포가 이어졌다.
개혁보다 앞선 정권 지키기
이괄의 난 이후 인조의 신변보호는 더욱 강화되었다. 역모 세력을 탐지하기 위한 군관의 수도 늘어났고 그들의 권한은 막강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했지만 반정세력은 그와 같은 정책을 철회하거나 완화할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역모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괄의 난 때 한 번 한양을 버린 인조는 유사시를 대비한 피신처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혹시 한양을 벗어나야 할 경우 왕은 훈련도감과 어영군을 데리고 강화도로, 세자는 총융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는 계획을 세우고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