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는 사실상 정묘호란 이후 광해군처럼 균형외교로 명과 후금 모두를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두 나라 사이의 조심스러운 국면은 인조의 변화를 계기로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인조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면 명의 인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명이 세자 책봉과 함께
자신의 생부인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는 것을 인정하자 명 쪽으로 기울었다.
명을 존숭해야한다 생각하는 대부분의 유생과 관료는 인조의 변화를 반겼다.
문제는인조, 그리고 조선의 태도 변화가 후금을 자극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