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왜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을까요?
칭기즈칸.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밑바탕의 주인공. 그의 부족 몽골이 고려를 치러 왔습니다. 인구 100만에 이른 거대 유목국가 앞에 선 작은 나라 고려. 과연 칭기즈칸의 이름을 떨치며 거대 제국으로 자란 몽골 앞에 고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본격적으로 몽골의 압박이 시작되자 최씨 무신정권은 강화 천도를 결정했습니다. 개경에 위치했던 고려 정부를 강화도로 이사를 한 것인데요. 이는 몽골이 너른 초원을 달리는 유목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몽골의 군대는 기마병 위주로 구성되어 있어 수군 또는 해군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개경과 멀지 않으면서 바다로 막혀 있고 또한 물살도 평탄하지 않은 강화도 천도를 결정한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의 서해안은 해안선이 지금보다 훨씬 복잡하고 물살도 거세 몽골군은 고려 조정에 끊임없이 ‘출륙환도(육지로 나와 도읍을 되돌린다)’를 요구할 뿐 직접 강화도로 군사를 보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강화도로 들어가 안전을 유지한 것은 조정의 일일 뿐 일반 백성들은 거의 나라가 없는 상태와 마찬가지의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또 하나의 정부, 삼별초
무신정권의 힘이 약해지고 고려 고종이 몽골과 강화를 결정해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자 이 결정에 반기를 든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무신정권의 군대이자 어느샌가 고려의 정규군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던 삼별초였습니다. 사실 무신정권의 힘이 약해지면서 삼별초 역시 위기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돌아가기로 하자 몽골과 강화를 한 것에 대해 반대하면서 세력을 이끌고 진도로 내려간 것입니다.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군은 궁궐을 짓고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삼아 새로운 고려 조정을 만들었습니다. 몽골과 기존 고려 조정에 강력하게 반발한 셈입니다. 이들은 남해안을 제압하고 세금을 거두어 들여 고려 조정을 곤란하게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여몽연합군에게 진압되어 항쟁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삼별초라는 강력한 조직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항쟁은 그 자체로 깊은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