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온다. 한미 FTA 관련해 두 나라의 협조 방안을 논의하고 휴전선 부근 미군부대도 방문하겠다 한다.
미국 대통령에 얽힌 동북아시아의 옛날 이야기를 들춰 보자.
친절한 척 뒤통수 친 루스벨트 대통령.
미국이 필리핀을 삼키고 일본이 조선을 삼키는 걸로 미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의 판을 짰던 대통령. 여기서 일본은 자신을 얻어 영국으로부터도 한반도 침략과 지배를 인정받고 강력한 경쟁자인 러시아로부터도 한반도 지배를 인정 받는다.(포츠머스 조약). 이 때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친일성향이 강했다. 그래서 일본의 로비를 받아 미국에서 러시아.일본이 만나도록 주선했던 것. 이미 이 때 조선과 미국 사이에는 조미수호조약이 맺어져 있었으니 결국 미국은 조선을 배신한 셈이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과 포츠머스 회담이 미국에 의해 준비되고 있을 때 미국 교민 대표로 위촉된 이승만, 윤병구 두 사람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해 만났다.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돼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을 모아 대통령 접견을 추진했는데 나이 30살의 이승만이 마침 기독교인에 젊고 똑똑하고 영어도 잘하니 일을 맡긴 것.
사저에서 만난 루스벨트는 ‘어 그래 조선 독립보장 탄원서? 접수시키세요!’라고 친절하게 답한다. 이승만은 당시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정치적 업적이라고 내세웠지만 사실은 루스벨트의 정치적 언변에 농락당한 것. 이미 친일파들로 가득 들어찬 조선 왕실과 워싱턴 정가 분위기로 인해 그 탄원서는 접수조차 안 됐다. 그러나 이때부터 이승만의 정치적 지위가 엄청나게 격상되면서 미국 교민사회를 장악하고 훗날 대통령에 오르게 된다.
일본에 뒤통수 맞은 미국
미국이 애초에 노린 것은 만주였다. 미국은 러시아가 만주로 남진해 만주를 집어 삼키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러일 전쟁 때 일본을 도왔다. 그런데 러시아를 물리친 일본이 만주를 독차지하려는 낌새가 보이자 미국은 만주를 나누어 통치하자고 밀어 붙였다.
그러자 일본은 전쟁 상대였던 러시아를 설득해 협상을 맺고 미국을 견제한다. 러시아에게 북만주와 외몽고를 떼어주는 대신 활용도가 높은 알짜 남만주를 일본이 챙기기로 한 것이다.
이 때 미국 대통령이 친일 루스벨트에서 반일 태프트로 바뀌었다. 태프트는 일본의 만주 독차지를 강력히 규탄하며 일본을 압박하는 한편 러시아를 설득했다. 일본은 미국과 러시아가 한편이 되는 것을 걱정해 러시아를 설득하러 특사를 보내는데 이토 히로부미,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해 사망한 그 인물이다.
이런 소동 속에 미국.러시아가 한 편이 되는 것은 불발에 그친다. 그러자 미국은 아예 영.미.일.러.불.독 6 나라가 만주를 갈라 먹자고 ‘만주철도 중립화 방안’이라는 걸 내놓는다. 그러나 러시아.일본은 왜 6 조각으로 나누나, 러시아와 반반 차지하겠다고 2차 러일협약을 맺으며 버틴다. 이것이 1910년 7월의 일이다. 이후 일본은 영국.프랑스에게 독일을 포위해 저지하는 걸 도와주겠다며 한 편으로 끌어들여 미국을 뿌리친다. 그렇게 주변 상황을 정리한 일본은 자신 있게 대한제국 강제합병 작업에 나서 다음 달인 8월 22일 우리는 경술국치를 당하게 된다.
봄은 봄이되 봄 같지 않아라
그보다 앞서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시작할 무렵 일본을 직접 방문한 미국 대통령도 있었다. 율리시즈 그랜트가 주인공. 그는 일본 왕을 만나 서양 제국주의의 돈을 절대로 빌려 쓰지 마라. (특히 영국). 보호주의 정책으로 버티면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뒤 자유무역으로 나가라고 충고한다. (그랜트 대통령은 앞으로 200년 간 미국은 보호주의 정책으로 나아갈 테니 자유무역은 그 후에나 이야기하자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미국은 아직도 남에게 개방을 강요할 뿐 스스로는 보호무역체제이다)
그래서였을까?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보호주의 정책을 강하게 쓰는 대신 조선.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에 나선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과 맺은 강화도 조약. 지금으로 치면 FTA와 흡사하다. 이 강화도 조약이 빌미가 돼 청나라도 조선과 협약을 맺고(청나라는 조선이 자기네 속국이나 마찬가지라며 조약으로 하지 않고 장정으로 격하시켜 체결), 영국.미국 등이 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하며 조선을 침탈하기 시작한다.
근대화에 눈 뜨지 못한 채 개방과 쇄국의 이념 대결로 혼란스럽던 조선은 이렇게 강대국의 먹이가 되어갔다.
일본도 강대국에 침탈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양 제국함대들이 일본 항구에 밀려들어 오자 힘에 밀린 일본도 치욕적인 불평등조약들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근대화 작업에 나섰다.
그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 대학이었다. 근대적인 사상과 철학을 정리해 일본에 맞추어 내고, 야심에 찬 인재들을 키워냈다. 대표적인 인물이 후쿠자와 유키치. (일본 1만엔 권에 그의 초상이 들어갈 정도로 일본의 우상이다). 그는 일본이 아시아를 넘어서야 하며 그러자면 길목에 있는 조선과 중국을 접수해야 한다고 부르짖은 인물이다. 그리고 세계 모든 나라가 일본의 적이 되더라도 모든 간섭에 대항해 우리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주창했다. 이런 사상들을 기반으로 일본은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을 파기하고 침략전쟁도 벌이고 전쟁 벌였던 적을 끌어들여 한편이 되기도 하며 제국주의로 나아갔다.
100년이 훌쩍 지난 옛날 이야기이이다. 하지만 100년 후인 오늘 미국 대통령을 맞아 한미 FTA, 중국.일본.러시아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정세를 하소연해야 하는 우리의 상황은 그 때와 비교해 다르되 또한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