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관문인 인천공항은 국내,국제선이 함께 있고 김포공항 역시 국내,국제선이 함께 오르내리며 보조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일본은 하네다는 국내, 나리타는 국제를 전담해 맡는 내제분리 원칙으로 수도권 공항을 운영하다보니 너무 불편해 인천공항에 형편없이 뒤지게 됐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내선 담당인 하네다 공항을 확장시켜 국제선을 유치하려고 공사 중이다. 기왕이면 국제선 담당인 나리타에 국내선을 가져다 붙이는 것이 훨씬 간편할 텐데 왜 국내선에 국제선을 가져다 붙일까? 이야기는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 ‘산리즈카 투쟁’에서 시작된다.
산리즈카 투쟁의 막이 오르다!
일본이 도쿄에 하네다 공항 하나만을 갖고 있던 1960년대 초반, 하네다 공항만으로는 넘쳐나는 항공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공항을 넓히기로 했다. 도쿄항 쪽은 항만시설을 뜯어내야 하니 산 쪽으로 방향을 잡고 치바현 치바시 쪽에 공항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지역주민들이 강력히 반발하자 치바시를 포기하고 동쪽으로 더 나가서 나리타 시 산리즈카 마을로 계획을 바꿨다.
(우리 해군이 제주 해군기지를 화순항이 가장 적지라고 보고 화순에 만들려다 주민 반대로 물러서고 다시 위미 포구로 바꿨다 역시 실패하고 슬그머니 강정으로 옮겨간 것과 흡사하다)
산리즈카 마을은 역사적으로 일본 왕실 소유의 목장과 농장지역이었다. 주민들은 전쟁이 끝난 뒤 만주와 오키나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많았다. 정부는 주민들의 고향의식이 희박해 동의를 얻어내기 쉬울 거라 예상했으나 결과는 전혀 달랐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일본 왕실로부터 농지해방을 통해 얻은 은혜로운 땅을 깔아뭉개려는데 그냥 두고 떠날 수 없다며 땅과 농사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버텼다.
중년세대는 일본 정부가 만주와 오키나와도 이제 일본 땅이 되었으니 거기 가 농사짓고 살라고 해 그리로 이주했다가 전쟁에 져 일본인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쫓겨나 일본으로 돌아 온 사람들이다. 산리즈카 황무지를 개간해 이제 겨우 갈아먹을만한 땅으로 만들었는데 땅을 내놓고 떠나라는 건 말이 안 된다며 반발했다.
무지렁이 농촌 주민들이라 대충 보상금 주며 설득하고 겁주면 해결될 거로 생각한 정부와 공항공단은 당황했다. 군국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전쟁에 동원되고 숟가락까지 전쟁터로 징발해 보냈다가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되어 좌파를 중심으로 반정부 분위기가 강하던 일본이었다. 정부의 강압적인 사업추진은 대대적인 정부 규탄으로 이어졌다.
(제주 강정마을도 강정만의 문제가 아닌 이명박 정부의 퇴행적인 국정운영에 대한 반발이 저항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 알았더라면...
정부는 사전협의 없이 ‘근대화 국제화를 위해 협력해 주기 바란다’며 주민들을 몰아 세웠다. 그리고는 보상금을 들고 와 회유작업을 벌였고 주민 일부가 떠나기 시작하자 곧바로 측량작업, 철거작업을 벌였다. 마을 사람들은 경운기와 깃발로 막아섰고, 경찰력이 투입돼 행정대집행이라며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그러자 전국 곳곳에서 대학생들과 시민단체 사람들이 산리즈카로 몰려왔고 사람이 다치다 못해 죽어 나가는 엄청난 투쟁의 막이 올랐다.
황무지이지만 땅 한 조각을 얻을 수 있어 나라의 은혜라 여겼던 할아버지 할머니, 전쟁에 동원됐다 돌아와 손톱이 빠지도록 황무지를 개간한 아버지 어머니, 도쿄의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밤을 세워 몽당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공부하던 아이들의 꿈은 모두 무너진다.
어쨌거나 정부는 돈을 주며 설득하고 막는 주민을 밀어내며 1차 공사를 완공하고 10년 싸움 끝에 반쪽짜리 공항을 열었지만 투쟁은 계속됐고 다시 10여년이 지난 1991년 정부, 공항공단, 공항반대운동시민동맹 삼자가 모여 심포지움을 열었다. 주제는 “도대체 무엇이 잘못돼 이 지경이 된 걸까”
이 심포지엄을 통해 일본 정부는 주민들이 입은 피해와 상처에 대해 사죄했고, 이후 국가개발사업에서 주민 동의를 무시한 강제적인 방법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공항공사는 1차 공사를 끝으로 더 이상 진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나리타 공항이 반쪽으로 남고 새로운 21세기 거점 공항도 나리타 아닌 하네다에 지어지고 있는 사연이다.
(제주강정마을을 두고 훗날 이런 심포지움이 열릴 수 있을까?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의 품격과 성숙도를 이걸로 재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966년에 시작된 산리즈카 투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으니 50년이 다 되어간다. 산리즈카 마을의 일부만 겨우 수용한 뒤 공항을 지었고 산리즈카 마을 주민들은 공항을 감시견제하고 공항은 주민을 경계하며 지내고 있다. 나리타 공항이 지금도 외곽을 경비원들로 에워싸고 지키는 이유이다. 활주로 3개를 만들려고 했지만 제대로 된 활주로는 1개 뿐. 급한 대로 짧게 만든 것까지 치면 2개. 원래 목표는 3개 였다. 국제선 전담인 나리타가 활주로 1과 2분의1, 국내선 전담인 하네다도 지금 활주로가 4개이다.
그러니 뭐하러 외국 나갈 때 자기 마을에서 비행기 타고 하네다 공항으로 날아간 뒤 짐 찾아 버스로 옮겨 타 나리타 공항으로 옮겨 가 다시 공항 수속하며 짐 싣고 떠나겠는가. 마을 공항에 들어와 있는 대한항공 아시아나를 이용하면 인천공항을 거쳐 편하게 앉아 가는데 .......
민주주의, 인간에 대한 예의
졸지에 살던 곳에서 쫓겨나 낯선 곳으로 가 다시 삶을 꾸려야 하는 어려움에 대해 ‘돈 주면 됐지’라는 무례함은 민주주의가 아님을 산리즈카 투쟁이 보여준다. 그러니 주민들이 생계를 꾸려가던 그 모습 그대로 가능한 그 부근 지역에서 살아 갈 수 있도록 최선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우리도 과거 숱한 비극의 현장이 있었다. 최근 용산 재개발 지역에서도 벌어졌고 지금도 제주 강정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다. 정부와 군이 원하는 민주주의가 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국민이 원하는 민주주의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다. 국가적으로 필요한 새로운 사회 인프라를 건설하려 한다면 그 곳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는 인간과 생명들에게 예의를 갖춰 허락을 구하는 그런 민주주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