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저축은행의 김찬경 회장, 지난 3일 회사 공금 200억 원을 인출해 그날 밤 경기 화성 궁평항을 통해 중국으로 밀항하려다 해양경찰에 붙잡혔다. 저축은행 대주주의 횡령이 있긴 했지만 직접 공금을 주머니에 넣고 도망치려 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빼 돌린 돈이 270 억 원 더 있는 걸로 보고 수사 중이라는 소식이다. 김찬경 회장을 따로 부르는 별칭이 ‘막장회장’.
가련다, 떠나련다 .... 돈만 챙겨서
최근 밀항 사례들을 보면 일본으로 일자리를 구하러 가는 사람들은 주로 부산항을 이용한다. 죄 짓고 도망치는 사람들은 서해를 통해 중국으로 간다. 일본보다는 중국이 치안이 허술해 몸을 피신하기 좋고 여차하면 동남아시아 다른 나라로 튈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밀항을 돕는 범죄조직들은 이름 있는 항구보다는 작은 포구들을 이용해 밀항자들을 빼돌리는데 이번 사건의 현장인 궁평항도 그래서 선택된 듯.
2009년 4조원대의 다단계 사기를 치고 중국으로 도망친 사기꾼 조희팔도 서해 태안 앞바다를 통해 빠져 나갔다. 단군 이래 최대 사기범이라 칭해지는 조희팔은 서민들을 상대로 전국에 5만 여 명의 피해자를 남기고 튀었다. 자살과 화병으로 숨진 피해자만 10명에 이른다. 조희팔이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었던 과정에 비리 경찰의 비호가 있었다고 진정이 제기되었지만 진상이 다 밝혀지진 못했다. 중국 공민권을 갖고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진다. 현재 인터폴 적색지명 수배자 신분이다.
토착비리 혐의로 구속기소된 민 모 전 당진군수도 중국 밀항을 시도하려다 포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일본인들이 대지진과 원전 폭발로 일본을 빠져 나올 때 일본으로 밀항하다 붙잡힌 사람들도 있었다. 3,40대 청년과 여성들로 후쿠오카 등지의 공장이나 유흥업소에 일자리를 찾으로 가려던 사람들이었다. 지진과 원전 사태로 일본의 해상 치안이 느슨해진 틈을 노렸던 것이다.
한반도 밀항의 역사는 1,500년 전으로 ....?
밀항의 역사는 1,500년 전 신라 진평왕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가 지리산을 넘어 신라를 침범하고 신라가 백성들을 병사로 징발해 겨우 버틸 때 신라 사람들이 병역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기록이 ‘일본 서기’에 남아 있다. 이처럼 한반도 역사에서 1945년 이전의 밀항은 주로 일본을 목적지로 하고 있다. 그 유형은 다음과 같다.
1. 일자리와 생계 해결
2. 밀항해 자리 잡은 가족과의 합류
3. 유학
4. 뚜렷한 목적 없는 낭만적 방황
일본으로의 밀항이 늘어나자 일본은 1919년부터 여행증명서 제도 등을 도입해 도일과 밀항을 통제하고 막았다. 그래서 부산 등지에는 고향을 떠나 온 가난한 농민.노동자들이 일본 가는 배를 구하기 위해 떼를 지어 헤매기 일쑤였다고 당시 신문들이 전하고 있다. 농사지을 땅을 빼앗기고, 천재지변으로 수확은 어렵고, 고리채는 커지면서 고향을 도망치듯 떠난 사람들이었고, 밀항브로커들이 기승을 부렸다. 그래서 밀항은 당시 부산을 상징하는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일제 강점기의 밀항은 불법이 아니라 부정 밀항이었다. 식민지이니 자기네 영토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밀항이 불법이 된 것은 1945년 연합군 사령부가 일본인의 조선 입국을 강력히 통제하고 일본으로 가려는 한국인도 강력 통제하면서부터이다. 일본도 해안에 감시초소를 두고 한국인 수용소도 만들었다. 대표적인 수용소가 오무라 수용소. 이곳은 한국인 밀항자를 전담해 수용했다. 이곳에 수용된 한국인은 밀항자, 일본서 형기를 마친 한국인 범법자, 강제송환 대상자 등이었다. 이때부터 밀항은 국가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해방 이후 6.25 전쟁 때까지는 가난, 좌우 이데올로기 충돌에 의한 폭력, 전쟁에 대한 공포, 병역기피, 공산당 체포 회피 등이 밀항의 요인이었다. 6.25 전쟁 때는 밀항을 ‘위험에 처한 국가를 배신하는 비겁한 행동’으로 간주해 부산으로 피난 내려간 국회가 ‘밀항으로 국내를 탈출.도피하는 자는 총살할 것’이라고 선포하기도 했다.
1950년 12월부터 1970년 9월까지 오무라 수용소에서 남한으로 송환된 숫자는 1만6천4백 명. 6.25 한국 전쟁과 60년대 들어 국가 체제가 자리를 잡으며 밀항 규모는 크게 줄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0 ~ 1970 년대에는 일자리와 가족 찾기, 학업, 뚜렷한 동기 없는 방황 등이 밀항의 이유가 됐고 밀수와 간첩도 등장했다.
슬픔과 상처뿐인 조국을 두고 .....
현해탄 넘어 일본은 가치와 이념으로는 물론 가까운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도 “원수의 왜놈 땅이 그리워 현해탄을 넘는단 말이냐”는 비난도 있었지만 불안한 시국과 가난, 이산가족, 생존의 절박함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는 사회 분위기였다.
요즘의 밀항은 구직과 도피가 대부분이지만 과거의 밀항은 앞에서 보면 조국에 대한 배신이고 뒤에서 보면 슬픔과 상처뿐인 국가 체제를 벗어나려는 절박하고 위험한 선택인 경우도 많았다. 조국의 현실에 대해 좌절하고 분노할 때 인내하며 참다가 혁명의 때를 맞아 공감하고 연대해 분출하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밀항처럼 개별적으로 사라져 버리는 소극적 저항도 있다는 해석인 듯싶다.
요즘도 이민 가버리고 싶다는 말들을 하는데 그건 왜 그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