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폭력으로 고민하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이어지고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는 등 학교가 신음하고 있다. 자살은 개인의 정신적 문제이고 폭력은 개인의 윤리적 결함 때문이다.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우리 모두는 그것만은 아니라고 여길 것이다. 비슷한 형태의 사건이 반복되며 전염병처럼 번진다면 그것은 사회구조적 원인이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감기 야 언제고 존재하지만 유행성 독감이 번지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과 같다. 그러니 사회적.환경적 원인이나 위험요인을 찾아 차단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1등만 챙기는 세상이 수치심을 부른다
학교에서의 폭력과 자살은 교육제도와 사회 환경, 가족 등이 얽혀 있는 구조적 문제이다. 심성이 나쁜 아이들이 일탈행동으로 폭력을 행하고 약한 아이들이 숨지는 구조는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학교생활과 학교교육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어린 나이부터 과도한 경쟁에 내몰리고, 교실에서 승자와 낙오자로 나뉘고, 학습을 즐기는 게 아니라 학습결과에 의해 서열이 정해진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아이들이 가장 오래 공부하고 가장 공부를 싫어하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이런 교육현장은 폭력을 유발할 수 밖에 없다.
자살과 폭력의 여러 요인 중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수치심을 주목하기도 한다. 모욕이나 굴욕으로 인해 생기는 수치심은 누구나 겪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의외로 수치심을 간파하지 못하고 놓친다. 그 이유는 수치심을 느낀 사람은 자신이 수치스럽다는 걸 어떻게든 숨기려 하기 때문이다. 수치를 느낀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우니 그렇다.
그리고 수치심 때문에 고통스러우면 그 수치심을 남에게 떠넘기고 대신 자신은 빠져나가고 싶어 한다. 나보다 더 약하고 못난 존재가 있다는 걸 보여서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변칙적인 일탈행위이다. 일본에서는 에타와 히닌이라는 신분이 있었다 한다. 에타는 더럽다는 뜻이고 히닌은 사람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농민 사회에서 번졌던 풍습이다. 농민보다 아래인 천민집단이 에타와 히닌이 된다. 무사 계급에게 착취와 핍박을 받던 농민들이 자기들보다 더 아래 계급인 에타와 히닌이란 천민계급을 두고 그들을 괴롭히면서 대리만족했던 것이다.
자살 중에는 죄의식으로 자기가 자기를 꾸짖고 수치심을 못 이겨 저지르는 자살이 있다. 수치심을 남에게 떠넘기고 싶지만 자신의 죄의식은 그런 공격을 강하게 차단하고 끝내 자신에게 터뜨리는 것이다. 더 헝클어지면 남을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는 경우도 발생한다. 폭력해결의 방법 중 수치심을 증폭시키는 방법은 그래서 하수 중 하수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벌을 줄 때 수치심을 가하는 방법도 그래서 초기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교사는 교무실로 데려가 훈육하려 하고 학생은 교무실만큼은 가지 않으려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하지만 수치심이 과하게 가해지면 폭력을 유발하니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
자살과 폭력, 문제는 해결하려는 정치적 의지
원인과 이유가 파악이 되는데 해결이 진척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구조적으로 너무 복잡하게 얽혀 풀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한편으로는 폭력을 막을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폭력을 발생시키는 제도와 문화를 바꿔야 겠다는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술은 폐해가 대단하지만 합법이고 많이들 사 마시라고 텔레비전 광고도 한다. 약물 중에서도 가장 중독성이 높은 것 중 하나여서 끊기 어렵고 몸에 해로운 것이 담배지만 합법이다. 미국은 총으로 학교에서조차 사람을 마구 죽이고 자살도 하지만 총을 만들어 팔도록 허가한다. 약한 사람이 강도나 폭력배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이다. 뒤로는 미국총기협회가 정치권을 후원하고 정치권이 총기협회를 옹호한다는 정치적 이유가 있는 건 물론이다.
우리사회도 최근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자는 데 대해 학생이 교사를 팰 것이다로 시작해 좌파교육감 우파교육감 논란이 일었다. 심지어 학생 동성애까지 거론되며 어른들이 정치적으로 법석을 피우지 않았던가.
미국의 제임스 길리건 이라는 정신의학자는 하버드 의대 법정신의학연구소장으로 교도소 정신건강 서비스를 감독하며 연구한 결과를 내놓았다. 교도소 수감자들이 자살하거나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출소해 사회에 100% 적응하는 엄청난 효과를 보인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교도소에서 공부해 학위를 따는 것이었다. 지역의 대학 교수들이 25년~30년간 교도소에 자원봉사로 수감자들을 가르치고 학사.석사 과정을 이수하도록 했더니 메사추세츠 주 교도소에서 25년간 300여명이 학위를 따고 나가 재범율 0를 기록했다고 한다. 30년으로 늘려 잡았더니 2명이 다시 잡혀 들어왔다. 재범율이 30년에 0.75%이다. 미국 재소자들의 재범율은 3년에 65%이니 30년에 0.75%면 1000분의 일에 육박하는 성공적인 수치이다. 물론 교도소 안에서 공부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면 이미 교육수준이나 정신적으로 다른 수감자와 다른 수준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감안하고 따져야 하지만 대단한 효과였던 것은 분명하다. 인디애나주, 캘리포니아주 등 곳곳에서 비슷한 효과가 나타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사실 보스턴 대학 교수들이 25~30년 간 교도소를 드나들며 자원봉사로 재소자를 가르친다는 사회 시스템만으로도 경이롭다. 우리나라 서울의 명문대학이나 지역 국립대학들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미국은 교도소에 교수들을 보내는데 우리나라는 중고등학교에 경찰을 보내 해결하겠다고....? 이 나라는 도대체 뭐냐?)
그러나 다음에 벌어진 일도 흥미롭다. 연구 결과를 받아 든 정치권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대학 가기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죄 지은 사람은 교도소에서 공짜밥 먹으며 일류대학 교수들에게 편히 배워 학사.석사 따는 게 말이 되느냐, 다들 교도소로 몰리면 어찌 되겠냐 논란이 일더니 확대는커녕 하던 것도 없어졌다고 한다. 어느 것이 옳을까?
미국의 통계분석을 보면 1900년부터 2007년까지 살인율과 자살율은 함께 늘거나 함께 줄었다고 한다. 정신적.심리적 문제로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는것과 범죄적 동기로 남을 죽게 만드는 것이 어떻게 함께 진행이 될까?
그것은 사회정책과 사회풍토가 자살과 폭력의 원인임을 보여주는 통계분석이다. 사람들을 강한 수치심과 모욕감에 노출시키는 제도와 정책들은 열패감과 열등감을 조장하며 타인을 무시하고 경멸하도록 부추긴다. 어떤 제도가 필요하고 어떤 제도가 고쳐져야 하는지는 누구나 생각해 보면 알 일이다. 문제는 그래서 정치적 의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