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벌어진 한일관계에 얽힌 두 개의 사건.
신라호텔이 귀빈 객실에 일본 전통 유카타를 비치해 놓았다는 주장이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면서 한복 홀대, 기모노 우대 논란이 다시 일었다. 호텔 측은 일본인 투숙객이어서 비치해 놓았다고 해명하고 이후로 일본인 투숙객이 필요로 할 때만 비치할 것이라 한다. 신라호텔이 자리한 곳은 이토 히로부미 사당인 박문사가 있던 자리이다. 박문사를 만들기 위해 장충단 숲 4만평을 파헤쳤다. 그리고 광화문 석재를 뜯어내고, 경복궁 선원전 등을 헐고, 경희궁 정문을 뜯어다 건축자재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만큼 아직은 호텔 측이 국민감정을 잘 살펴 일본 관련 사업이나 서비스를 실시해야할 듯.
일본 기모노에 대한 몇 가지 오해.
신라호텔 유카타가 지적되자 인터넷에는 엉뚱한 이야기도 나돈다. 일본이 전국시대 오랜 전쟁을 치르며 인구가 줄어들자 통치 차원에서 인구를 늘리려고 여성을 공유재산으로 인정했다는 근거 모를 내용이다. 남성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어떤 여성과도 잠자리를 같이할 권리를 주어 아기를 많이 낳도록 정책을 썼고 그래서 속옷을 입지 않고 등허리에 담요를 말아 붙인 기모노란 옷이 나왔다는 억지스런 이야기이다.
기모노, 한자어로는 着物이니 그냥 ‘입을 것’이란 뜻이다. 기모노는 (Kimono)는 중국의 파오 식 옷에서 비롯됐다고 알려져 있다. 발목까지 길게 내려오고 소매도 길고 넓다. 목 부분이 V자로 패여 있고 단추나 끈이 없이 왼쪽 옷자락으로 오른쪽 옷자락을 덮어 허리에 오비(帶)를 둘러 묶는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장식과 무늬가 화려한 여성복 기모노는 17세기 18세기의 일본의 장인들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아주 오래 전에는 천에다 목 부분에 구멍을 뚫어 뒤집어쓰던 데서 점점 옷 모양을 갖추고 옆을 갈라 입기 편하게 만든 뒤 끈으로 동여맨 것이 기모노의 옛날 모습. 당나라의 불교와 함께 전해진 옷과 염직 기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엔 네덜란드나 포르투갈 사람들에 의해 여러 가지 옷감이 전달되고 나염 기술이 전해지면서 더욱 화려해졌다.
일본 사람들이 입는 옷을 통털어 기모노라 하기 때문에 기모노의 종류는 무척 다양하다. 우리가 한복을 이야기할 때 치마저고리를 흔히 떠올리지만 사실 마고자, 배자, 두루마기, 활옷, 원삼 등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카타는 여름철에 가볍게 입을 수 있는 기모노이다. 기모노의 여름옷이자 일종의 잠옷이기도 하다. 또 목욕 후 물기를 말리기 위해 입기도 하는 간편한 목욕가운이기도 하다. 그래서 속옷을 안 입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기모노 입을 때는 속옷을 안 입는다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기모노 속에 아무 것도 입지 않는다고 하지만 겉으로 자국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속옷을 받쳐 입는다. 오래 전에도 헐렁한 속바지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섹시함 어쩌구 하는데 서양처럼 몸매의 굴곡이 글래머러스하게 드러나는 건 촌스러운 것이고 굴곡 없이 완만하게 내려가는 밋밋한 선이 더 멋진 옷맵시이다. 기모노의 매력은 슬쩍 젖혀진 어깨와 목 뒤로 드러나는 목선에서 느껴지는 에로틱함인 듯하다.
허리에 두르는 띠 오비도 그전에는 끈 수준이었지만 에도 중기에 가부키가 유행하면서 여자 역을 맡은 남자배우가 여성다움을 강조하기위해 폭이 넓은 띠를 등에 묶다가 여성들의 폭발적 인기를 얻어 무늬 매듭 등이 화려해졌다 한다. 기모노는 그렇게 가부키 배우에서 멋지게 변하기 시작해 부유층으로 번져나간 것이지 남성이 자유롭게 소유하고자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은 남의 문화를 일방적으로 폄훼하는 것이다.
남의 눈 티끌보다 내 안의 전봇대
한편으로는 그런 오해가 빚어질만한 일본의 성풍속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성문화는 개방적이다 못해 우리와는 몹시 달라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많다.
요타카 - 옛날 먹고 살기가 어려울 때 깊은 밤에 가난한 여성들이 밤거리로 나가 성매매를 해 목숨을 부지하던 풍습이다. 아주 어린 소녀부터 노인까지 성매매에 나섰다고 하는데 따로 방이 마련된 것이 아니니 바깥 어디서나 성매매가 이뤄졌고 손님을 끄는데 입을 옷을 빌려주는 전문대여업이 생겨났다 한다. 이 의상대여업은 결국 포주 격인 ‘요타카야’ 라는 집단으로 발전했다. 이 때 성매매에 나선 여성들(요타카)이 거적 같은 것을 같고 다녔다한다. 거적이라도 갖고 다니면 그나마 형편이 좀 나은 편이었다고. ‘아소비메’라는 유곽이라는 정해진 장소에서 성매매를 하던 여성과 구분해 부른다. 여기에서 유래되어 전쟁 중인 일본군에게 끌려 다닌 종군 성노예 여성들도 거적이나 모포를 소지했다고도 하고 우리 사회에도 해방 이후 상당 기간 흔히 ‘모포부대’라고 불린 성매매 여성들이 존재했었다.
와카모노렌주 - 청년들이 단합해 일하고 공동체를 이끌던 마을 모임인데 마을 여성을 공동재산으로 삼으면서 다른 마을 청년들에게는 배타적이었다는 풍습이다.
이밖에도 마을에서 소년이 성년이 될 때 성매매 여성에게 데려가 성을 가르치는 풍습 등도 있었다 한다. 우리 사회도 일제강점기에 이것을 그대로 배웠는지 ‘딱지 떼준다’는 명목으로 성매매를 하던 풍습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좋지도 않은 일제의 잔재를 꽤나 끈질기게 보존하고 있는 셈이다. 근거도 없이 기모노를 흉보기보다는 우리 안에 잔존하는 흉한 일제잔재부터 털어버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