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라는 단어와 오륜마크, 금메달 ..... 이런 단어들을 마케팅에 사용하면 국제올림픽위원회로부터 제소당할 수 있다고 지난 시간에 소개했다. 실제로 영국에서 정육점 주인이 소시지로 오륜 마크를 만들어 가게 앞에 내걸었다가 올림픽 조직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열받은 소시지 아저씨는 동그라미를 네모로 만들어 다시 내걸었다고 ...... 이렇게 올림픽이 돈으로 치장한 자본의 스포츠 잔치가 되어가지만 안 그런 구석도 남아 있다. 참가 선수들의 가슴 뭉클한 이야기는 개막 이후 전하고 우선 언론을 통해 전해진 성화 봉송 주자들의 사연을 살펴보자.
런던 올림픽을 빛낸 성화봉송 주자들
마틴 콤슨, 전투 중 전신화상을 입어 혼수상태에서 3개월 만에 깨어나 새 삶을 찾아 성화 봉송에 나섰다. 벤 파킨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하다 낙하산 사고로 두 다리를 잃고 뇌를 다친 참전병사.
골수 종양을 극복하고 걷기 뛰기를 연습해 마라톤맨이 된 폴 캐번 할아버지, 올해 나이 70세, “계속 뛸 거요. 늙고 병든 채 인생을 낭비할 순 없잖아.”
여자 장대높이뛰기 선수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꿈꾸다 심장 이상으로 심장이식수술을 받아야했던 라나 포일 역시 성화봉송 주자로 뛰었다.
런던올림픽 성화봉송의 모토는 “당신이 빛날 순간(Your moment to shine)”이다.
씁쓸한 플라스틱 대표선수들
Plastic Brits 라는 단어도 이번 런던 올림픽을 뜨겁게 달궜다. 후다닥 찍어낸 인조 영국인간.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이 말을 전파시켰다. 금메달을 따내 기 위해 영국으로 귀화했고 금메달을 위해 영국이 받아들인 선수들.
미국 미시간주 출신인 포터는 여자 100m 허들 선수. 미국 주니어대표로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나서려다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한 뒤 국적을 영국으로 바꿨다. 아프리카 출신 미국인 아버지와 영국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이중 국적을 갖고 있었으니 국적 변경이라기 보다는 편한 대로 골라 쓴다고 해야 하나?
쿠바 하바나 출신인 알다마. 세단뛰기 선수로 지난해 대구 세계육상대회 때도 영국 대표로 뛰어 화제가 됐다. 세계적인 선수인데 2001년 스코틀랜드 출신 남성과 결혼해 영국으로 갔으나 남편이 마약 범죄로 감옥에 가 오갈 데 없이 되었다. 영국은 알다마를 쫓아냈고 아다마는 아프리카 수단으로 갔다. 그런데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올림픽 금메달감 선수로 성장하자 영국이 부랴부랴 다시 부른 선수. IOC 규정에 특정 국가의 올림픽 대표가 되려면 귀화해 3년이 지나야 하나 1년이 모자란다. 그러나 영국이 뒷배로 때를 써 IOC가 승인했다. 주최국이 이래서 좋은 거지.
스프린터 사이클의 힌데스. 2010년 세계 주니어선수권대회에 독일 대표로 출전한 걸 마지막으로 영국으로 귀화해 이번에 출전한다. 영국 뿐 아니라 뒤지면 나라마다 별별 선수가 다 있을 것이다.
올림픽을 올림픽답게 만든 메달리스트 열전
과거 올림픽 정신을 빛낸 선수들을 만나보자.
스티븐 레드그레이브, 영국의 조정선수로 1984년 LA올림픽부터 2000년 시드니 올림픽까지 5번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 5개를 땄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더 중요한 건 심각한 당뇨병 환자였다는 사실.
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 에티오피아 장거리달리기 선수. 1만 미터와 마라톤이 주종목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땄고 2005년에는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 5개를 휩쓴 기록의 사나이. 이봉주 선수의 라이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팔을 흔들 때 왼팔은 굽힌 채로 마치 장애가 있는 것처럼 흔든다. 가난한 농촌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학교까지 10킬로미터를 매일 뛰어서 다녔는데 책가방을 왼쪽에 끼고 달리느라 몸이 그렇게 굳어 버렸다고.
1930년대를 휩쓴 미국 육상 선수 제시 오웬스를 빼놓을 수 없다. 흑백차별이 심하던 미국에서 흑인이 육상 대표선수가 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으나 대회마다 우승하고 세계신기록을 3개나 세우는 데야 어쩔 것인가. 미국의 벽을 넘으니 기다리고 있는 것은 히틀러의 나치 독일. 아리안족 우월주의에 흑인을 사람 취급도 않던 히틀러 앞에서 그는 금메달을 4개나 목에 걸었다.
그런데 제시 오언스는 멀리뛰기 예선에서 긴장한 나머지 두 번 실격판정을 받았다. 한번만 더 실격하면 탈락. 한 백인 선수가 다가오더니 “구름판을 넉넉히 10센티 쯤 뒤를 밟아라, 네 실력으로는 그래도 충분하다”. 그 충고 덕분에 예선을 통과해 결선에 나섰다. 그 때 조언을 건넨 선수는 독일의 멀리뛰기 1인자로 제시 오웬스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자 히틀러가 기대를 걸었던 루츠 롱이라는 선수. 결선 결과는 오웬스가 금메달, 루츠 롱이 19센티미터 뒤져 은메달이었다. 금메달이 확정된 오웬스의 검은 손을 먼저 잡고 높이 들어 관중에게 인사를 시킨 것도 루츠 롱이었다.
훗날 제시 오언스는 “내가 가진 모든 금메달을 녹여도 루츠 롱의 우정을 금빛으로 칠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당시의 감격을 회상해기도 했다. 그러나 루츠 롱은 1943년 2차 세계대전 전장에서 숨졌다. 제시 오웬스는 미국으로 돌아가 계속해 흑백차별에 시달렸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금메달을 4개나 따고 세계적인 영웅이 된 오웬스를 백악관에 초청하지도 않았다. 흑인 노예제를 옹호하는 남부지역 유권자들의 표를 잃을까봐 정치적 꼼수를 부린 것.
오웬스는 “히틀러는 나를 모욕한 적이 없다. 오히려 나를 모욕한 건 미국의 루즈벨트였다”라며 담배로 설움을 달래다 폐암으로 사망했다.
흔히 올림픽이 물질문명에 찌들어 올림픽 정신을 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오해이다. 올림픽은 그 시작부터 정치와 상업으로 요란했다. 도시국가들끼리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던 고대 올림픽에서도 남녀차별, 빈부차별이 있었고, 상업의 중심이었으며, 우승자는 자기 도시로 돌아가 개인연습장과 저택을 챙기기도 했다고 한다.
피타고라스는 올림픽을 이렇게 설명한다.
“세상은 올림픽 경기와 흡사하다. 어떤 사람은 가게를 열어 돈을 벌고, 어떤 사람은 목숨을 걸고 겨루고, 어떤 사람은 구경하는 걸로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