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올림픽에서 벌어진 박태환 선수와의 방송 인터뷰가 논란이 됐다. 경기 후 언론의 선수 인터뷰는 공동취재구역 인터뷰든 기자가 찾아가는 플래시 인터뷰든 선수와 코치가 판단해 거부할 수 있다. 다음 경기를 위해서나 선수 보호를 위해서 사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태환 선수는 인터뷰에 일단 응한 것으로 보인다. 실격이유를 물은 첫번 째 인터뷰도 그렇고, 눈물을 보이며 ‘인터뷰 다음에 하면 안 되겠냐’고 양해를 구한 것도 은메달 획득 이후 인터뷰를 정상적으로 진행하다가 후반에 감정이 격해지며 벌어진 상황이다.
그리고 400 미터에서 은메달을 딴 뒤 자유형 예선 경기를 막 끝내고 숨을 헐떡이는 박태환 선수에게 2분간에 걸쳐 질문이 쏟아졌다. 200미터 준결승을 곧바로 치러야 하는 박태환 선수에게 다시 ‘어제는 울었는데 .....’ 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 “선수를 그만 괴롭혀라”라고 비난을 샀다. 힘들어 하는 선수에게 기자가 접근하고 취재해야 하는 윤리적 기준이란 존재하는 걸까? 어느 선까지가 기자에게 허용되는 것일까?
취재하랬더니 취재거리를 없애버려....?
기자가 직업 상 해야 할 작업은 ‘보도할 가치’, ‘보도의 윤리’가 흔히 충돌한다. 남의 사고와 고통에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대 들여다보고 캐물어야 하니 당연히 직무와 윤리가 충돌할 수 밖에 없다.
1982년 미국 ‘게이내슈빌 선’지의 윌리암 오우니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편집장이 오우니 기자에게 취재 지시를 내렸다. 6살 난 꼬마소녀가 친구 소녀의 코를 막대기로 때린 사건이다. 이게 무슨 기사거리가 되겠는가 하겠지만 문제는 피해 소녀의 아버지가 가해 소녀를 고소하면서 시작됐다. 때린 소녀의 아버지도 만만치 않아 변호사를 선임해 배심원 공판으로 가서 옳고 그름을 가려 보자고 버티었다. 6살 난 소녀 피고와 원고가 배심원 앞에서 자기들이 왜 어떻게 싸웠는지를 설명해야 할 판이다. 편집장의 판단은 옳았다. 좀처럼 등장하기 어려운 법정 기사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 취재에 나선 오우니 기자는 사건에 접근할수록 두 아버지를 뜯어 말리는 것에 열중했다. ‘아버지들이 화가 난 건 이해하지만 부인과 딸이 떠들썩한 재판의 당사자가 되어 이제 곧 전국에 유명인물이 될 것이고 평생 이 이야기가 그들을 따라 다닐 것인데 당신들이 아버지라고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가?’라고 따지며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아버지들을 말리고 나섰다. 편집장이 지시한 것은 재판이 열린다는 기사를 멋지게 써오라는 것이었는데 오우니 기자는 재판이 성사되지 않게 뜯어말린 것이다. 그 결과 양측 아버지들은 굽히지 않았고 오우니 기자는 결국 기사를 써야 했다. 그러나 기사에는 자신이 애써 말리고 설득한 과정까지 포함돼 있었다. 이 재판 예고 기사는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고 오우니 기자의 설득한 내용을 검사가 받아들여 법정 밖에서 해결해야지 배심원들 앞에 6살 꼬마들을 세울 수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결국 아버지들 간에 중재협상이 벌어지고 20달러를 치료비로 물어주고 사건은 끝났다. 이때 보여 준 오우니 기자의 행동과 보도는 훌륭했다고 평가받았다.
일본의 한 방송사는 경쟁 조직의 보스를 언제 어디서 공격하겠다는 제보를 받고 출동해 히트맨의 공격 장면을 특종으로 낚아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범죄행위를 사전에 알고도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고 범죄현장을 찍는 데만 골몰한 것이 과연 옳은 행동이었을까? 이 행동은 옳지 못한 직업적 행동으로 지탄 받았다.
비슷한 예로 굶주린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독수리를 찍은 보도사진으로 1994년 퓰리처상을 받았던 케빈 카터 기자는 그해 7월 목숨을 끊었다. 셔터를 누를 게 아니라 독수리를 먼저 쫓았어야 했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사진을 찍은 후 곧장 독수리를 쫓아냈다"고 항변했지만 사람들은 비난을 멈추지 않았고 카터 기자는 번민에 휩쌓였던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 발생한 초대형 산불 현장에 출동한 KFMB-TV 방송 기자인 래리 힘멜은 자신의 가족이 25년 동안 거주한 집이 타고 있는 걸 발견하고 그 앞에 섰다. 누구보다 집 구조를 잘 알고 있어 오히려 생생한 중계방송이 이뤄지긴 했으나 ......
국민과 박태환 .... 그 둘 사이에 놓인 기자
올림픽에서 박태환 선수를 인터뷰한 방송팀도 ‘보도의 권리와 책임’, 그리고 ‘국민정서’라는 두 개의 일치하지 않는 가치 사이에 놓였던 것이다. 위에 예를 든 사건보다 심각하지 않지만 그래서 그만큼 애매하기도 하다.
국민이 전하고 싶은 위로, 궁금한 실격 이유, 박태환 스스로도 모른다는 황당한 오심판정에 대한 문제제기, 남아 있는 비디오 판독과 재심절차, 그리고 번복의 가능성, 혹시 모르는 번복 후 경기와 남은 다른 종목 경기에 대한 격려 ..... 그 상황에서 국민들이 화면을 통해 기자에게 요구하는 것들이고 보고 싶은 것들이었을 것, 여기에 현장 기자는 충분히 부응하지 못했다. 과연 기자가 그것까지 따져야 하는가라는 미묘한 문제이기도 하다.
박태환 선수가 울분을 삼키며 혼란스러운 그 순간, 온 국민이 박태환 선수에게 전하고 싶은 게 있고 박태환 선수가 국민에게 전하고 싶은 것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순간 국민과 박태환 선수, 그 둘을 이어주는 유일한 메신저가 바로 인터뷰에 나선 기자뿐이었다는 것. 이럴 때 기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통상 해온 대로라면 궁금한 걸 자세히 물어보고 알리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이 그것보다 다른 걸 더 절실히 원했다면 그 상황에서 그것이 다일까? 혹시 박태환 선수를 왈칵 안아주며 우선 기운을 차리라고 격려하고 이깟 인터뷰 나중에 하자고 했으면 어찌 됐을까? 아니면 실격의 이유가 뭐냐고 짤막히 묻고 이유를 모르겠다는 답을 들은 뒤 그럼 인터뷰는 나중에 하고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라고 등을 토닥거렸다면?
과거 언론은 전하고 국민은 전해는 것을 듣고 보는 시청자였다. 그 후 시청자는 소비자가 되었다. 방송에 대가를 지불하고 방송을 향유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다. 이제 시청자는 이용자가 되었다. 국민이 SNS, 인터넷으로 거대한 정보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언론은 그 중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방송사가 실격 이유가 뭔지 취재도 못하고 당황하고 있는 순간 트윗 등에서는 이미 잠영 거리나 출발대에서의 사전 움직임 등 분석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는 현장의 기자가 스마트폰으로 실시간으로 SNS에 뜨는 시청자의 제보와 분석.지적을 반영하며 취재하고 중계하는 시대가 되었다. 일방적 전달자가 아닌 쌍방향의 전달 매개자가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 방송인들은 직업으로서의 저널리스트가 아닌 소통과 대화의 메신저라는 새로운 직무를 부여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