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은 일본군이 싱가폴을 점령하고 남양군도 일대를 휩쓸며 승승장구하던 시기이다.
전 국민 동원령과 함께 식민지 탄압을 강화하던 시기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친일 글을 써 준 것으로 보고 있다.
이원수 시인에 대해 대가성과 이후 삶의 행적을 두고 안타깝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친일 작품을 썼다지만 자식들에게 일본말을 못 쓰게 하고 한글을 가르쳤다 한다.
총독부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받은 것 없이 가난하게 생활했고 계속 감시를 받으며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해방 이후 독재정권,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자주독립과 민주화, 민족분단의 극복을 위해 끝끝내 자기 길을 걸어간 문인이 그리 흔치 않은 문단 상황에서 매도만
하기엔 너무 안타깝다는 여론도 있다.
다만 스스로 국민 앞에 나서 직접 사죄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유가족들로서는 뼈아플 것이다. 고인은 1970년대 말에 몸져누워 거동을 못했다. 1970년대 말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일본군 경력이나 한일 굴욕외교 반대 데모와 처벌의 여파로 친일잔재 청산이란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친일청산이 거론된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시절까지 고인이 생존했더라면 당연 사죄의 글을 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동료 작가들은 병석에 누운 채 딸에게 대신 적어 내려가게 한
동시童詩 겨울 물오리가 참회의 글일 거라고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