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현실 정치에 첫발을 들여 놓은 것은 1969년 내 나이 10살 때이다.
1969년 10월 17일 아침, 박정희 대통령 3선을 위한 개헌 국민투표가 전국 투표소에서 진행되던 때,
나는 동사무소 앞 빨간 우체통 뒤에서 머리를 살그머니 내밀고 줄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찬성 찍어야 한데요”
그 이후로는 현실 정치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지만 지금도 그 기억은 생생하다.
10살의 꼬마 입장에서 혹시 아버지가 실수로 반대표를 찍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하게 된 경위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투표소에까지 나가 찬성을 독려해야할 만큼 초등학생의 정치적 사정도 절박했던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선거는 체제순응 - 반체제 or 독재 - 반독재의 구도로 치러졌다.
민주주의라는 말조차 편하게 쓰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김수영 시인의 표현대로 ‘담벼락에 남 몰래 쓰던 민주주의’는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 이후
1980년 “민주화의 봄” 때 우리들의 의식 속에 뚜렷이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정치체제에 대한 선택도 ‘독재와 반독재’에서 '민주 대 반민주'라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 간다.
정치학자들은 그 기점을 1985년에 치러진 2.12 총선이라고 평가 한다. 비록 여당이 이겼지만 12대의 2.12총선 투표율은 60년대 이후 최고인 84.6%였고
높은 투표율은 통합야당인 신민당 돌풍으로 이어졌다. 투표율이 높아지면 여당이 불리해진다는 속설은 이 때 등장한 듯하다. 야당인 신민당은 크게
민추협 세력과 비 민추협 세력으로 나누어진다. 민추협은 김영삼과 김대중 계로, 비민추협은 이철승계, 신도환계, 김재광계 등으로 나뉘어 복잡했지만
민주주의의 회복이냐 반민주 세력이 장기집권 체제를 굳히느냐의 갈림길에서 단결을 이루어 냈다. 여권을 물리치기 위한 최고의 수단으로서 야권통합이
이 때 등장한 것이다. 또 김영삼 김대중 양김 체제가 본격화된 것도 이때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