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과자 값이 줄줄이 올랐다. 과자 한 봉이 밥 한공기에 맞먹는 엄청난 칼로리에 각종 첨가물을 넣었다고 올리는걸까? 과대 포장에 교묘한 원가줄이기 눈속임이 난무한다. 그러나 소비자도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인터넷에는 과자 낱알 수를 세어 비교하고, 제과회사가 과자의 길이를 줄이고 초콜릿 코팅을 얇게 해 원가를 줄이는 술책을 썼다고 항의하는 글들이 올려진다. 최근엔 모 피자 회사에서 자기네 피자 한 조각과 김치부침개 1인분을 비교해 피자의 칼로리가 낮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김치부침개는 1인분인데 왜 피자는 한조각이냐 1인분은 3조각이다, 부침개 1인분의 기준이 뭐냐 등 반박이 이어져 피자회사 측은 광고를 철회하기도 했다. 과거에는 기업이 독점하던 정보와 힘이지만 이제는 고객에게로 옮겨지고 있는 것. 조사하고 전파하며 디지털 스마트 소비자가 힘을 키워가고 있다.
뻥 튀기 과자만도 못한 정치
그런데 정치에서는 소비주체는 물론이요 정치 자체의 주체인 유권자의 정보와 권리가 여전히 묶여 있다. 미국의 양당제를 살펴보자. 미국은 매스미디어와 홍보광고가 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만큼 국민도 텔레비전에 매달려 산다. 그래서 미국의 선거에서는 매스미디어가 선거의 꽃이다. 선거전에서 텔레비전 광고와 토론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선거자금도 쏟아 부어진다. 대선 방송광고로 자기 후보의 이미지 홍보도 하지만 상대 후보를 깎아내리기도 한다. 만약 미국 선거에서 텔레비전 광고할 돈이 없거나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못하면 그 후보는 투명인간으로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바꿔 이야기하면 이런 시스템은 기득권을 가진 양대 정당의 교묘한 카르텔이다. 민주.공화 양당의 조직력과 정치후원금 흡수력이 아니라면 소수 정당의 후보들은 명함을 내밀기가 지극히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치개혁도 불가능하다. 카르텔 속에서 권력을 주고받는 민주.공화 양당은 서로 싸우는 척해도 정치 자체를 바꾸지는 않는다. 마치 그림을 붉은 색, 파랑 색 두 가지로 그리는 것과 같다. 민주.공화 양당이 불편해하는 정책과 정치제도도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가장 불쌍한 건 후원금만 꼬박 꼬박 바치는 유권자들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선택권은 박탈당했는데 여전히 선거 캠페인에 참여하며 후원금을 낸다. 이것이 국민의 눈을 가리는 정치의 뒷모습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선거는 이런 미국과 비교해 어떨까? 국민이 늦게 퇴근해도 투표할 수 있게 시간을 연장해달라는데 돈 드니까 그만 두란다. 후보 간 토론, 후보 별 토론하는 것 보고 싶다는데 그건 특정 후보가 불리하니 안 된단다. 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는데 대선 후보 방송토론도 후보별로 갖는 초청 토론회도 없다. 제도로 민주주의는 갖춰져 있지만 그것을 운용하는 정치권과 정부의 정치의식과 문화는 빈민주적이자 수준 미달이다.
이럴 때 선거에서의 권리를 빼앗긴 국민을 위해 나서줄 세력은 언론이다. 방송에 출연을 못하겠다면 그 행태를 비판하고 우선 토론 방송을 정치 탐사보도로 메워야 한다. 정책과 공약을 비교하고, 후보의 정치여정과 경력을 헤집어 들추면 되고, 문제점을 따져 물으면 된다. 그러나 지상파 방송사와 대부분의 신문들은 침묵한다. 따져 묻는 취재는 방송사에서 쫓겨난 뉴스타파가 맡아 하고 있다. 그런데 뉴스타파는 취재현장에서 쫓겨나고 감금당한다. 유권자의 권리는 생매장에 가깝다. 이런 일이 벌어져도 비판이 없다. 미국의 방송을 통한 선거운동 시스템이 양당 카르텔이었다면 한국의 선거방송은 집권여당의 전횡과 횡포에 동조하고 있다.
이대로 선거가 치러진다면 한국의 지상파 방송은 선거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선거판에 끼어들지 못해 정보 전달에 실패한 텔레비전 방송이 소비자 주권 시대에 과거처럼 살아남을 수 있을까? 방송사가 자신의 존재 의의를 깎아내리며 침묵하는 이유는 목표는 무엇인가? 경영진의 몸보신, 달랑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