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대통령선거 이후 5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돌연사로 숨졌다. 한진중공업 노조 간부인 최강서 씨는 대선 이틀 후인 21일 아침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내 노조 사무실에서 목을 맸다. 휴대전화에 남긴 유서엔 “민주노조 사수하라. 손해배상 158억, 철회하라 ..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이제부터 5년을 또 … 못하겠다.”라고 남겼다. 얼마나 더 숨져갈 지 예측이 두렵기만 하다. 왜냐하면 노동현장 곳곳에서 노동운동 탄압과 노조 파괴 공작들이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 얼마나 ....
금속노조 만도지부는 사측이 2008년 용역회사와 노조해체를 위해 계약을 맺고, 지난해 여름 휴가를 하루 앞두고 1,500명의 용역을 투입해 직장폐쇄를 강행했다고 항의 농성 중이다. 현재 대부분 노조원들은 회사가 주도한 노조에 가입해 있다. 그러나 당국의 방관과 사측의 공작이 없다면 과연 노조원들이 그 쪽에 가 있을까? 만도(주)와 구 만도 계열사인 보쉬전장, 콘티넨탈에서도 비슷한 시기 줄줄이 노조와해 작업이 이뤄졌다. 직장폐쇄 - 용역투입 - 노조와해 - 복수노조 설립 등 진행은 정해진 매뉴얼처럼 모두 비슷하다.
유성기업의 경우, 2011년 사측이 공격적인 직장폐쇄로 노조원들을 몰아냈고 이후 복수노조가 설립됐다. 투쟁에 나섰던 조합원들에 대해 차별적 징계, 잔업 박탈, 제 2노조 가입 종용 등의 부당노동행위가 벌어지고 있어 지난해 9월 국회 청문회에서는 유성기업과 창조컨설팅의 노조 파괴 공작이 폭로되기도 했다. 조합원이 우울증으로 자살했고 노조 지회장은 80여일 째 굴다리 고공농성 중이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90일에 이르는 송전탑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오랫동안 일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달라는 투쟁이 10년을 넘었다. 투쟁하던 노동자는 해고되고, 고소고발 당하고, 교섭은 중단됐고, 사측은 사내하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대신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새로 모집하고 있다. 법원은 분명 현대차비정규직 노동자의 사용자는 사실상 현대차라고 판결을 내렸는데 사측은 비정규직 전원 정규직 전환을 거부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 5일 오후 서울에서 출발한 ‘다시 희망 만들기’ 버스가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송전탑 농성장과 부산 한진 중공업을 찾았다. 부산에서는 고 최강서 씨를 추모하는 촛불문화제도 열렸다. 미망인 이선화씨는 “한진중공업에서 정리해고 당하고 2년 동안 힘들게 지내왔는데 복직 3시간 만에 무기한 강제 휴업을 시키고 남편의 목숨을 앗아갔다.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남편 최강서 씨가 유서를 남겼고 회사 측이 그 내용을 알면서도 신문광고에는 생활고로 인한 비관자살이라고 진실을 왜곡한 사실도 털어놓았다. ‘회사를 증오한다’던 남편의 말을 ‘왜 저렇게까지 ...’ 라고 의아해 했는데 이제야 이해할 수 있다고 울먹였다. 촛불문화제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박근혜 당선자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 “당선자는 눈이 있지만 눈이 있다고 다가 아니라 사람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나는 비참과 불평등의 냄새를 맡는다
이 말을 들으면서 떠올린 인물이 헬렌 켈러이다. 헬렌 켈러는 시각장애로 앞을 보지 못했지만 눈물겨운 노력과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노벨상을 탄 물리학자이다. 그러나 사실 헬렌 켈러의 인생 후반부는 노동운동과 인권운동으로 채워져 있다. 앞을 못 보는 헬렌 켈러가 어떻게 노동운동을 해냈을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공장에도 갔고, 굶주리는 빈민촌도 갔다. 가 봤자 볼 수도 없지 않느냐고? 나는 볼 수 없을지라도 그 가난과 불평등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헬렌 켈러는 미국 사회가 여성에게 평등한 투표권도 주지 않고, 사형집행을 계속하고, 어린 아이들에게 중노동을 시키고, 흑인에 대해 만행과 차별을 일삼는 것을 지적하며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면서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나라라고 으스대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가에 대해 대통령에게 직접 일갈했다. 그 당시 미국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이 35살 정도였고, 이 가운데 30% 정도가 25살이 되기 전에 숨졌다고 한다. 헬렌 켈러는 이 비참함의 냄새, 미국 사회가 썩어가는 냄새를 맡고 앞을 못보고 듣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다. 우리는 주로 헬렌 켈러가 자신의 유년기에 대해 적어 내려간 자서전 [나의 생애]를 통해 그녀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반의 반쪽인 셈. 그녀가 사회당에 입당해 정치.사회투쟁을 시작하자 보수언론들은 좌파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고 공격을 가한다. 이전까지는 그녀의 업적을 칭송하고 천재 물리학자, 기적의 천사라고 추켜세우던 보수언론들이었다. 이 때 헬렌 켈러가 반박한 칼럼에 “나는 불평등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라는 위의 대목이 들어 있다. 그러자 보수언론들은 그녀의 신체적인 장애를 지적하며 앞을 못보고 듣지도 못해 판단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인신공격도 가했다. 이에 맞서 적어 내려간 헬렌 켈러의 칼럼 한 대목.
“내가 사회봉사나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활동에 전념하는 동안 여러 신문들은 나를 두고 '시각장애인들의 성녀'라거나 '기적의 여인'이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우리 주변의 빈곤과 산업 체제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하면서 그 언론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장애인을 도와주는 것은 갸륵하고 성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왜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안락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허황한 꿈이라 하는가.”
박근혜 당선자 .. 눈으로 보는가, 코로 맡는가?
박근혜 당선자가 쌍용자동차 노동자를 만나 손을 잡아주는 건 정치적 금기인가? 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이 먹고 튀는 자본가의 재물이 되고 노동자만 잘려 나가는 현실에 대해 국정조사를 약속하면 안 되는 걸까? 한진중공업 자살 노동자 빈소를 찾고, 노조가 파괴되는 상황을 인수위에서 노동당국을 불러 따지면 문제가 되나? 그러면 보수언론들이 당선자 주변에 좌파들이 숨어들어가 조종한다며 비난하고 나설까?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이데올로기가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 외치는 소리이다.
과연 박근혜 당선자는 수십 년 전 절대 권력자 아버지를 기리며 향수에 젖기는 해도 노동현장과 가난한 이들의 비참한 냄새는 맡지 못하고 말 것인가? 눈과 귀를 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