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회적 비난과 분노를 일으키고 있는 사건이 서울 경찰청에서 벌어진 국정원 수사기록 삭제 사건이다. 국정원이 대선에 불법적으로 개입한 사건을 수사한 경찰 컴퓨터 내의 기록을 경찰청 경감급 간부가 덮어쓰기 방법으로 삭제했다는 의혹이다. 경찰대학을 나와 사이버 수사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온 간부가 검찰 압수수색 직전에 아차 실수로 자료를 지웠다고 한다. 그리고 경찰청은 거기에 수사 기록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국정원은 지워달라고 부탁도 안했는데 경찰청이 오버했다고 한다. 이 나라가 왜 이러나?
권력비리와 기록 삭제의 역사
지난 2010년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이 불거졌을 때도 증거인멸을 위해 하드디스크를 폐기하는 수사 방해가 있었다. 국가 최고 권력기관이 민간인을 사찰하고 압력을 넣어 재산권까지 침해한 사건이다. 그러나 검사 측이 압수수색 하기 전에 이미 관련 하드디스크와 문서가 파기돼 물증 확보에 실패했다. 이 때 등장한 주인공이 스스로 몸통이라 자처한 청와대 이영호 비서관. "제가 자료 삭제를 지시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제가 몸통입니다. 몸통입니다"총리실이 불법사실을 확인하고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 뒤 나흘이 지나 검찰이 압수수색에 들어갔고 그 사이 관련 자료는 모두 날아가 버렸다. 그나마 파기하고 남은 자료와 통화기록 조회를 통해 청와대가 이 사건에 개입했다는 단서를 확보했지만 누가 봐도 깃털 수준에서 수사는 끝났다. 검찰 역사상 최악의 부실 수사로 꼽히는 사건이다.
국가 권력기관에서 벌어진 범죄의 증거기록을 관련자들이 삭제한 사건은 미국에 많다. 대표적인 것은 워터게이트 사건.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궁지에 몰리자 자신의 수석보좌관과 사건은폐를 논의했다. 그런데 그 은폐모의마저 들통 났다. 닉슨은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다고 발뺌한다. 문제는 대통령 집무실의 모든 대화가 자동으로 녹음된다는 것. 이 사실을 닉슨 참모 중 하나가 자백했고 워터게이트 특별검사는 두 사람의 대화가 담긴 녹음테이프를 내놓으라고 닉슨에게 요구했다. 닉슨은 국가기밀이라며 버티고 버티다 대법원까지 가서 항복하고 원본을 내놓았는데 테이프는 중간에 18분30초가 지워져버린 채로였다.
이 때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이 당시 백악관 비서 로즈 마리 우즈,
"제가 대화를 기록할 때 녹음기의 삭제 페달을 실수로 밟아 지워졌어요"
정신없이 일하며 녹음하는데 전화가 걸려 와 이를 받다가 실수로 삭제 페달을 발로 밟은 채 시간이 18분 흘렀다는 황당한 진술이었다. 그러나 사무실 현장을 확인한 결과 전화 받으며 발로 녹음기 삭제 페달을 밟으려면 팔과 다리를 스트레칭 하듯 벌려야 하고 그렇게 18분을 버틴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더구나 비서 스스로도 현장 재연 과정에서 녹음기 페달에서 발을 떼는 실수 아닌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결국 거짓말이 들통 나고 진짜 원본이 제출되면서 닉슨의 변호인마저 “내가 속았다”고 탄식하며 닉슨을 떠나 버린다.
1983년 이란콘트라 스캔들도 기록삭제가 특별검사의 발목을 잡은 사건이다. 미국이 이란에 무기를 팔았다. 이란은 소련하고 친했고 이슬람원리주의 정권이 지배하는 나라지만 무기 거래에는 적군은 없고 바이어만 있는 법. 그런데 이란에 무기를 팔아 번 돈 중 일부가 니카라과 우파 반란군인 콘트라 반군에 지원됐다.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은 마약밀매로 군자금을 마련해 산디니스타 정권에 맞서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특별법으로 콘트라 반군 지원을 불법행위로 규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로는 콘트라 반군에게 무기 살 돈을 대주는 추악한 거래를 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레이건 대통령은 탄핵의 위기에 몰렸으나 이때부터 관련자들의 묵비권 행사와 정보 공개 거부, 관련 문서 파괴 등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며 증거부족으로 빠져 나간다.
1970년대 벌어진 이란 무장군인들의 미 대사관 습격과 외교비밀문서 탈취, 이란 콘트라 스캔들에서의 기밀문서 파괴 등을 거치며 미국에서 발전한 기술이 종이문서 파쇄기술이다. 이란 측이 미 대사관 문서 파쇄기의 쓰레기를 모아 테이프로 붙여 기밀을 밝혀 낸데다 다량의 문서를 신속히 파기할 필요성이 인식되면서 종이 파쇄기는 대형화와 함께 칼국수처럼 세로로 길게 찢는 방식에서 진화해 콩알 크기로 산산조각 내도록 바뀌었다.
세계사 속에는 자기 범죄의 기록을 지우지 않고 끝까지 보존해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다. 마루타로 악명 높은 일본 731 부대 출신의 많은 과학자들 중 소련군에게 체포된 사람들은 하바로프스크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미국에 항복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연구 기록을 제공하고 미국의 생화학 무기 연구를 돕는 대가로 대부분 면죄를 받았다. 그리고 학계에서 산업체에서 대접 받으며 잘 살았다. (미국의 역사학자 셀던 해리스의 저서 "미국의 은폐기록 - 일본의 만행"참조)
원장.청장이 아니라 전현직 대통령의 문제
이 사건에서 짚고 넘어갈 것을 3 가지로 압축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중요한 기밀 자료나 권력비리 관련 자료가 조사 직전에 실수로 파기된 사건은 세계 역사 속에서 찾아 볼 수 없다.
2.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저지른 문제의 행동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인가, 자기 혼자라도 해야만 했던 일인가, 그리고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대통령으로 이어지며 원세훈 씨와 맺어온 관계를 볼 때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볼 수 있느냐는 의혹이 풀려야 한다.
3. 국가기관이 선거 불법개입이라는 국기를 흔드는 범죄행위를 저지르고 국가 공안기관끼리 관련 정보를 은폐.폐기한 사건이라면 반국가 범죄에 해당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가관과 개혁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이 사건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