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에서 북송된 탈북 청소년들 중에 일본인 납치 피해자 자녀가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우리 언론이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시작한 추측보도는 1977년 북한에 납치된 마쓰모토 교코라는 일본인의 자녀일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까지로 진전됐다. (마쓰모토 교코는 1977년에 돗토리현 요나고시의 자택에서 뜨개질 교실 갔다 오겠다며 나간 뒤 행방불명된 일본인).
이번 탈북 청소년 북송 사건에서 북한 당국이 유난히 적극적인 외교공세를 펴자 언론은 혹시 고위 권력층 자녀가 포함된 것 아니냐는 추측을 내놨었다. 그러다 납북 일본인의 자녀가 있는 게 아니냐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우리 정부는 ‘아는 바 없다’는 것이고 일본 정부는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일본 언론들은 우리 언론을 인용하며 들썩이고 있다.
북한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1970∼1980년대에 북한은 남한에서 납치한 어부나 일본에서 건너 간 북송 재일동포들에게 간첩교육을 시켜 재일교포나 일본인으로 위장한 뒤 일본과 한국에 침투시키려 했다. 그래서 일본어와 일본 사정을 가르칠 일본인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러나 단순히 교육용 강사가 필요했기 보다는 몰래 납치한 일본인은 북한에 숨겨두고 그 사람의 일본인 신분으로 간첩을 침투시키려 했다고 분석할 수 있다.
북한으로 납치된 일본인은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지만 12건에 피해자는 17명으로 일본은 파악하고 있다. 주로 동해에 접한 니가타, 후쿠이현 등지에서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끌려갔다. 북한은 그런 일 없다고 딱 잡아떼다 결국 2002년 9월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에게 8건에 13명의 일본인을 납치했다고 털어 놓는다. 그 중 8명은 사망했고 남은 5명은 가족상봉을 위해 일본을 일시 방문해도 좋다며 일본행을 허가했다. 그러나 일본은 합의를 깨고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고이즈미 총리가 탄핵을 각오하지 않는 한 간신히 데려 온 납북 피해자를 되돌려 보낼 리 없고 북한과 일본은 서로를 비난하며 냉각기에 들어갔다.
지금도 일본의 강경 우파는 납북 일본인을 핑계로 ‘자위대를 더 강하게 무장시켜야 한다’,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가 바로 한반도로 투입돼 납북일본인을 구해야 한다’며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북한에 그들의 가족이 남아 있다는 것. 2004년 일본은 북한과 협상해 자녀 5명을 일본으로 데려왔는데 얼마나 더 있는지는 파악되지 않는다. 이번에 논란이 된 납북 일본인의 자녀는 이런 맥락이다.
일본인을 일본인이라 부르지 못하고 ...
이 문제에는 일본의 졸렬한 이중성과 편견이 깔려 있다. 북한은 1959년부터 일본의 재일동포들을 북한으로 데려가는 이른바 북송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으로 1984년까지 8만 ~ 9만 명의 재일동포가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건너갔다. 이 가운데 재일동포와 결혼한 일본인 배우자도 1천 5백 명 이상 포함돼 있지만 일본은 납북 피해자로 여기지 않는다. 그 배경은 이렇다.
일본은 전쟁에서 진 뒤 사회를 재건하면서 재일동포를 잠재적 불순분자로 여겼다. 좌파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있고, 일본에 대한 반감도 크고, 다들 가난해서 사회적 비용만 들어가고 국가적으로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한편 북한은 전쟁으로 젊은 사람들이 턱없이 부족해 극심한 인력난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궁리한 것이 재일동포를 대거 북한으로 들여오는 방책이었다. 더구나 재일동포와 함께 재일동포의 자금 및 전문기술들도 유입되니 수지가 맞는 장사였다. 일본은 내쫓고 싶고 북한은 데려오고 싶어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자 북송사업은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지금도 일본은 북송 재일동포와 그 일본인 배우자 문제는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졸렬한 암거래가 있었으니 그렇다.
해방 이후 좌우대립과 6.25전쟁을 치르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재일동포 정책은 반공반일을 내세워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재일동포 중에는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도 있지만 제주 4.3 사건이나 거창양민학살 사건처럼 남쪽에서 국가의 폭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가족들이 많았다. 제주도에서만 4만 내지 5만이 일본으로 건너갔을 정도이다. 그러니 그들이 쉽게 한국으로 돌아올 리는 없었다.
김일성은 이런 빈틈을 노려 재일동포 사회에 지원자금을 대주며 학교를 세우게 하는 등 선심정책을 써 정치적 주도권을 잡아 나갔다. 북한에서 집도 주고 직장도 주고 무상교육도 시켜준다고 하자 재일동포들은 짐을 싸 북한으로 갔다. 그러나 북한은 얼마 후 지옥으로 변했다. 북한 주민들마저 자기들 살던 집을 차지하고 특별대우를 받던 재일동포들을 질시했다. 다급한 불을 끈 북한 당국은 재일동포에 대한 대우를 깎아 내렸다. 재일동포들이 불만을 토로하고 일본 가족에게 폭로 편지를 쓰면서 재일동포는 북한 사회에서 체제불안 요소가 돼 버렸고, 당국의 감시와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일본의 가족친지에게서 돈을 얻어올 때만 대우를 해줬다. 인질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북송사업은 시들해지다 1984년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