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40일째 병원에 입원해 투병 중이다. 오늘(7월18일)은 그의 95회 생일. 오전 8시를 기해 남아공의 전국 학교에서 그의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르고 쾌유를 위해 기도한다. 타타 마디바 ('아버지 만델라'라는 존칭)에게나 가능한 범국민 생일축하 퍼레이드.
지난해에도 7월 18일에 남아공의 각 급 학교 학생 1천200만 명이 오전 8시를 기해 '해피 버스데이 마디바'를 부른 바 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입원한 프리토리아의 메디클리닉 심장병원 입구에는 만델라의 쾌유를 비는 수많은 편지와 꽃, 만델라 사진 등이 놓여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소웨토에서는 두 명의 12살 흑인 소녀가 넬슨 만델라의 건강 회복을 기원하기 위해 100킬로미터를 걸어 프리토리아 병원을 찾기도 했다. 소웨토는 1976년 흑인들의 봉기가 일어난 곳. 학교교육을 백인들의 언어로만 실시하는 것에 맞선 학생들의 저항운동이었고 봉기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경찰의 발포로 사망한 학생 수가 1천 명이 넘는 대학살사건이었다.
만델라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학생 자치활동으로 정학을 당하고 쫓기다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쳐 흑인집단거주 구역에서 살았다. 그러다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흑백차별 철폐운동에 참여했고, ANC내에 청년동맹을 결성하며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무렵인 1948년에 백인들의 정당 '국민당'은 흑백차별을 더욱 강화해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인종차별법을 제정하고 흑백차별을 국가적이고 구조적으로 자행한다. 아파르트헤이트법은 피부색과 언어, 신체로 인간을 구분하고 흑인들의 시민권까지 박탈했다. 흑인은 전체인구의 70%였지만 국토의 13% 안에 갇혀 지냈다.
만델라는 민족회의 청년동맹을 이끌며 아파르트헤이트법에 맞서 싸웠는데 그 방식은 불복종 운동이었다. 만델라가 이름을 높인 사건이 1952년 4월 6일의 비폭력시위. 총지휘를 맡았던 만델라는 이 사건으로 체포당한다. 만델라가 이끈 불복종운동은 전국에 확산됐고, 외국에서도 남아공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 일을 계기로 7천명에 불과했던 ANC의 회원이 10만 명으로 늘어나며 차별 철폐와 반정부 운동의 중심이 된다.
그러자 남아공 백인 정부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혹독한 탄압과 검거에 들어갔다. 만델라는 비폭력저항으로 감옥을 들락거리다 비폭력저항 노선을 결국 포기하고 ‘민족의 화살’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무장 투쟁에 나선다. 결국 이 사건으로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유명한 로벤섬 감옥에 수감됐으며 27년에 걸친 감옥생활을 시작한다. 만델라는 27년 중 13년은 채석장에서 강제노역을 하며 살았다.
1988년 만델라의 70세 생일을 격려하기 위해 영국 런던의 웸블리 운동장에서는 8만 명이 모인 음악회가 개최돼 전 세계 64개국에 중계됐다. 10억이 넘는 세계인들이 이 음악회를 지켜봤다. 우리나라에 만델라의 이름이 제대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라고 볼 수 있다. 1989년 세계 여론과 서구 선진강국들의 제재조치를 견디기 어려워진 남아공 백인 정부는 흑백차별을 중단하기로 하고 만델라와의 대화를 시작했고 1990년 그를 석방한다.
차이가 차별이, 경계가 미움이 되지 않도록
27년 만에 햇빛을 본 만델라의 제일성은 화해였다. "인종차별을 끝내라. 정치범들을 전원 석방하라. 정부도 ANC도 다 같이 무력사용을 포기하라." 만델라의 화해 주장은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만델라가 석방된 뒤 보복 또는 정치적 책임을 지라는 메시지를 보냈더라면 아프리카는 유혈 참사와 함께 어떤 모습이 됐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 공로로 1993년 만델라는 드 클락 대통령과 나란히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다음해에 새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만델라는 대통령직에 오르자마자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백인 정부는 전반적인 사면을 주장했으나 만델라는 이를 거부하고 "범인이 진실을 밝히고 그들의 행동이 정치적 동기였음을 증명하면 개인별로 사면을 행한다"고 정리했다. 진실을 밝히고 사면하고 화해하는 대화와 합의에 의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위원장을 맡은 남아공의 투투 주교는 백인들뿐만 아니라 만델라가 이끌던 ANC의 과오도 밝혀냈다. 1998년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보고서가 완성돼 나오자 흑백 양측이 동시에 반발했다. 감옥의 만델라 대신 밖에서 민주화와 인권평등을 위해 싸웠던 투투 대주교는 피압박자가 얼마나 쉽게 새로운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지를 경고하며 진실을 받아들이라고 버텼다. 그리고 만델라는 위원회의 결과를 받아들였다.
넬슨 만델라를 이끈 이념의 토대는 역시 '우분투'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프리카 정신의 기초인 '우분투'는 "사람이 사람인 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다"라는 공동체 정신을 강조한다.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도록, 경계가 미움이 되지 않도록", "어느 한 사람의 목마름은 우리 모두의 목마름" .... 이런 우분투 정신의 실천에 가장 성실했던 인물이 만델라이다. 만델라는 대중의 우러름을 불편해 한다. 정직하고 아름답게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긴다.
"사람들이 나를 메시아처럼 여기는 건 건전하지 못한 겁니다. 실망 밖에 더하겠습니까. 지도자도 살과 피로 이루어진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주길 바래요. 그래도 영 아니라며 영웅처럼 생각한다면 그것까지는 괜찮은데 그래도 나는 전설은 아닙니다."
"우리가 품은 이상,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꿈과 열망이 우리 생전에 실현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의무를 다하고 이웃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았다는 것만 알아도 충분히 보람 있는 경험이며 아름다운 성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