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 측이 곧 미납 추징금 전액을 내겠다고 한다. 노 씨는 그동안 꾸준히 추징금을 납부해 2천397억 원을 냈고, 남은 액수는 230억 여 원이다. 징수율은 90%를 넘어섰다. 자진해서 내는 건 아니다.
검찰과 국세청이 노 씨가 숨겨 놓은 은닉 부동산과 금융자산을 찾아내고 압박을 가하니 이뤄지는 것이다. 이번에 내겠다는 미납 추징금 230억 원도 이미 드러났으나 노태우 씨와 그의 동생 재우씨, 전 사돈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 등이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바람에 미뤄져 오던 돈이다.
형사 범죄에서도 자수란 범죄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찾아가 밝혀야 자수이다. 포위된 다음에 버티다가 나가는 건 자수가 아니고 투항이다. 자진 납부란 말은 적절하지 않다.
자진 납부? 아니죠, 투항입니다
2001년 대법원 판결 내용부터 정리해 보자. 노태우 씨는 1990년 신 전 회장에게 비자금 230억 원을 건네며 관리를 부탁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돈으로 서울 소공동 서울센터빌딩을 사들였다). 재우 씨에게도 120억 원 정도를 맡겨 놨다. (이 돈으로는 오로라씨에스(옛 미락냉동)라는 회사가 차려졌다). 그리고 나서 노태우 씨에게 대법원에서 추징금 2629억 원이 확정됐다. 그러자 노태우 씨는 2009년 동생에게 돈을 맡겼는데 내놓질 않는다며 소송을 벌였다가 재판에서 졌다. 그리고 다시 두 사람이 가져간 돈을 찾아달라며 진정서와 탄원서를 잇달아 낸다.
이 과정에서 노태우 씨는 추징금을 내놓아 지금까지 남은 건 230억 원. 재우 씨는 53억 여 원을 납부해 자기 몫의 추징금 중 70억 여 원을 남겨놓고 있다. 신 전 회장은 5억1000만원만 납부했다. 재우 씨는 70억 원을 마저 내면 되는데 이번에 150억 원을 내겠다고 한다. 왜 그럴까? 전두환 환수법이 만들어지며 회사 주식에 대한 압류처분 등 현실적인 위험이 커진 탓이다. 신 전 회장이 내야 할 돈은 결국 80억 원이 되었다. 신 회장은 채권추심의 시효가 끝나 의무사항이 아닌데 그래도 내기로 사돈 일가끼리 합의 한 모양이다.
신명수 전 회장 측은 개인 재산 가운데 약 80억 원을 사회에 기부하고 싶다고 검찰에 의사를 타진했으나 검찰은 사회에 기부할 게 아니라 사돈의 미납 추징금을 내라고 제안했다고 전해진다. 국가적으로는 손해인 듯하다. 철저히 수사해 미납 추징금을 다 받아내고 기부는 선한 뜻이라니 따로 받아야 할 것 아닌가? 어쨌거나 그렇게 합쳐서 남은 추징금 230억 원이 채워진다.
일이 이렇게 풀리는 배경은 역시 최근 검찰이 특별환수팀까지 구성해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에게 강한 압박공세를 펴는 것이다. 자칫 검찰의 수사가 비자금만 찾아내는 게 아니라 다른 불법비리행위까지 밝혀내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도 작용 했을 것이다. 전두환 씨 처남 이창석 씨에 대한 수사와 구속이 위기감을 불러 일으켰다고 보여 진다. 노태우 씨를 두고 종종 전두환 씨와 비교해 후한 점수를 주기도 하는 모양인데 몇 가지 짚고 넘어가자.
권력은 독이다, 우리 사회가 썩는다
1. 결코 간과해서 안 될 점은 최고 권력자와 그 주변 실세들이 어떻게 수 천억 원의 돈을 부정.불법하게 챙길 수 있었나 하는 분노이다. 그들이 흥청망청 써버린 돈은 또 얼마나 될까라는 분노도 지우지 말자. 우리 사회의 부패한 정경유착, 그리고 그 돈의 대가로 가진 자를 위해 왜곡되었을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 부정축재한 돈을 숨길 수 있는 허술한 금융제도 .... 모두 쓰디 쓴 역사의 교훈으로 간직해야 한다.
2. 전두환 씨 일가는 왜 안 내놓는 건가? 아마 더 철저한 돈세탁 과정을 거쳤거나 해외로 옮겨 놨을 거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측근과 친지들의 충성심과 단결력에서 노태우 씨 가문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일까?
3. 최근의 비자금 추징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악착같이 뒤지고 응징하면 이룰 수 있다. 기업에 대한 세무조사도 제대로 하면 비자금이 발각되고 자수하지 않고 숨긴 기업과 인물들은 엄히 처벌해야 겁을 먹고 내놓을 것 내놓는다. 경기 침체가 어쩌구 라는 핑계에 후퇴해서는 안 된다.
부도덕한 권력은 독이다. 권력을 쥔 사람과 그 주변을 망친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사회로 흘러나와 모두를 병들게 한다. 그 뿌리를 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