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미향의 저녁스케치

2023/05/18 <노트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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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갈색 나무 대문을 여니 삐걱 오래된 나무 대문은 기이한 소리를 냅니다. 낡은 기와지붕은 검은 차광막에 둘러싸여 내려앉은 지 오래.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습니다. 수도 옆 장독대 위엔 빈 용기 몇 개가 나뒹굴고 마당 한쪽 작은 화단엔 덩굴 식물이 그물망 사이 봄 햇살에 깜빡 졸고 있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친정집 정리에 들어갔습니다. 어머니의 유품 정리. 마당에서 두어 칸 아래 한낮에도 어두운 부엌. 오후의 햇살이 잠깐 머물다 가버리는 툇마루. 추운 겨울, 동장군의 기세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환기구 역할까지 도맡아 했던 방문은 문살만 앙상하게 남긴 채 쓸쓸하기만 합니다. 쩍쩍 금이 간 황토벽 안방과 작은방은 켜켜이 쌓인 먼지에 거미줄로 엉켜 있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일단 어머니가 사용했던 생활 집기들을 하나하나 들어내고 안방 서랍장 위 카세트를 들어내자 종이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보니 어머니의 손때 묻은 몇 가지 물건들과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습니다. 삐뚤빼뚤 연필로 눌러쓴 자식들의 이름, 생일, 전화번호, 친척들과 지인들의 결혼 날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 장을 넘기니 너무도 익숙한 글씨, 바로 내 글씨였습니다. '육십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노래 가사. 내가 언제 이 노래 가사를 적어 드렸을까. 가사 중에 '팔십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이 부분에서 나는 꾹 눌러놓은 그리움의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어머닌 팔십에 이승에서의 끈을 놓으셨습니다. 어머니가 담가두었던 고추장, 된장, 젓갈 등이 정리되면 이제 집을 비워 줘야 하는데 시간의 톱니바퀴 속에 여든 여섯 홀로 되신 아버지를 몸이 불편한 친정언니에게 맡겨두고 돌아와야 하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인 듯 해 자꾸만 뒤를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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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미향의 저녁스케치By C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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