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미향의 저녁스케치

2023/05/20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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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강까지 나오려 해도 한참을 걸어 내려와야 되는 거 무골. 양쪽 산자락을 가로 걸치면 거미줄을 칠 수 있다고 하여 생긴 이름. 그런 곳이니 생전의 아버지 표현대로 바구미벌레 이마빡만한 땅을 부치며 겨우겨우 농사나 지어오셨습니다. 개 주둥이에 묻은 등겨라도 털어서 끼니 때울 모진 세월 겪어내시며...그토록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게 그것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마을에서 가장 부지런하셨습니다. "뭘 하든 사람이 손을 놀리면 안 돼. 봐라. 허수애비도 저렇게 제 구실은 하질 않니?" 우리가 남의 돈 안 빌리고 살게 된 것은, 그런 아버지의 일 욕심 덕분이었습니다. 다른 집과 달리 우린 안 살림이건, 바깥일이건, 거의가 아버지 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쌀 한줌 장에 내는 것도, 양말 한 켤레 사들이는 것도 다 아버지 소관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진 동전 한 닢 허투로 쓰지 않으셨지요. "개도 돈을 물고 있음 멍생원 대우받는 세상이라. 열심히 살란 뜻이다." 들과 산의 무엇이 되었든 쓸데 있다 싶으면 들여오시는 아버지, 그러니 집안은 늘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하지만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 없이 잘 정리해두십니다. 우리 4남매가 싸움 박질 이라도 하면 "다리 많은 버러지는 쓰러져도 금방 일어서니라. 늬들 핏줄끼리라도 우애 있게 살어야 헌다." 가을엔 놀아도 들에 나가 놀라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달라지셨습니다. 어머니한테 많은 부분의 바깥일을 맡기기신 겁니다. 어머니가 어지간한 일을 막힘없이 뒷감당해낼 능력을 갖추신 건 아마 말년 아버지의 그런 채비 때문이었겠지요. 철 바뀔 때마다 거둔 것들을 꾸려 보내 주시던 정성을 못 받게 된 아쉬움보다, 이젠 들을 수 없는 아버지의 한 마디가 소중하고 그립습니다. 새해 농사가 시작되는 봄. 부지런한 아버지는 하늘 위의 그 땅에서도 흙냄새가 좋다 시며, 먼동 앞세워 들에 나서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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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미향의 저녁스케치By C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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