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미향의 저녁스케치

2023/09/21 <여린 것들에 대한 연민>


Listen Later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그 할머니를 알게 된 것은 소읍에 내려와 얼마 지나지 않았던 2년 전이었습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점심때, 협력업체의 소장이 맛있는 집이 있다고 해서 그 할머니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서 가장 큰 방으로 안내 되었고 잠시 후 할머니가 시키기도 전에 사람 수 데로 칼국수와 파전과 한 주전자의 막걸리와 들어 왔습니다. 그건데 먹어도 먹어도 칼국수는 나 보이고 채 썬 감자와 호박과 부추만 입 안 가득, 그리고 드디어 국수, 바닥에 깔려 있던 쫀득쫀득하고 삐뚤뺴뚤하게 잘린 칼국수가 양념장에서 배어 입 안 가득 펴져옵니다. 그 이후로 나는 한 주일에도 여러 차례 할머니 집에 드나들었습니다. 어느 비가 와 현장작업이 일찍 끝난 날, 그 집에 들어서며 “할머니 밥 좀 얻어먹으러 왔어요.” 그러자 할머니 “그러시게나. 숫 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되지. 큼직하게 썬 돼지호박에 새우젓을 잔뜩 넣어 간을 한 이른바 젓국, 그리고 그 지역에서 많이 잡힌다는 깡치젓을 찐 것. 은근한 맛이 참 좋았습니다. 나는 휴일이나 비가 내리면 현장 기술자들에게 부탁해 할머니 집의 새는 지붕이나 깨진 서까래, 틀어진 창문과 벽 등을 수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올 봄부터 할머니가 가끔씩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난 서울 아들집으로 가네..’하시는 할머니 손을 슬그머니 잡아 보니 그 손은 마치 보리 껍질처럼 거칠고 거북 등짝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습니다. 그게 그 할머니와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이제 그 소읍에서의 공사를 마치고 해단 식을 했습니다. 늦은 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커피 한잔을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데 2년 여의 생활이 중첩된 산 그림자의 실루엣처럼 다가옵니다. 나는 할머니가 어디로 갈지 알고 있습니다. 할머니 손이 거북등처럼 공들여 번 돈으로 사준 도회지의 아들과 딸의 아파트로는 가지 못 한다는 걸..어느 도시 변두리의 요양원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나도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그렇게 했으니까... 그리고..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사치스런 연민은 그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노라고 내 스스로를 위안하는 구차한 강변이라는 것도 ......

See omnystudio.com/listener for privacy information.

...more
View all episodesView all episodes
Download on the App Store

배미향의 저녁스케치By CBS

  • 5
  • 5
  • 5
  • 5
  • 5

5

3 ratings


More shows like 배미향의 저녁스케치

View all
CBS 김현정의 뉴스쇼 by CBS

CBS 김현정의 뉴스쇼

186 Listeners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by CBS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38 Listeners

아름다운 당신에게 강석우입니다. by CBS

아름다운 당신에게 강석우입니다.

3 Listeners

FM POPS 한동준 입니다 by CBS

FM POPS 한동준 입니다

0 Listeners

새롭게 하소서 by CBS

새롭게 하소서

7 Listeners

정다운의 뉴스톡 530 by CBS

정다운의 뉴스톡 530

7 Listeners

변상욱 기자수첩[김현정의 뉴스쇼 2부] by CBS

변상욱 기자수첩[김현정의 뉴스쇼 2부]

40 Listeners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by 세바시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50 Listeners

세바시 청년 by CBS

세바시 청년

1 Listen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