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미향의 저녁스케치

2023/09/25 <내 삶의 길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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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결혼한 딸이 명절에 못 올 것 같다며 미리 왔습니다. 자식은 뒷전이고 손자가 오니 너무 좋았습니다. 작은 입으로 "할미~" 하고 부를 땐 가슴이 녹아내립니다. 옛날 어른들이 집안에 아이들 소리가 나야 사는 집 같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엄마 너무 더워서 냉커피 마셔야겠다." 딸이 냉장고로 가자 손자도 뛰어갑니다. 그런 뒤 갑자기 아이 물음소리가 들립니다. 놀라서 가 보니 손자가 발을 잡고 울고 있습니다. 냉동고 문은 활짝 열려있고 딸은 "괜찮아? 발 보자. 엄마~냉동고에 음식 이렇게 쌓아두지 말라고 몇 번 말해요? 봐봐 결국 문 열다가 꽁꽁 언 음식 떨어져서 다쳤잖아?" 딸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예전에 엄마 집에 들러 냉장고 청소를 하면서 검은 봉지에 쌓여있는 음식을 버리던 생각이 났습니다. 일일이 꺼내 확인하면 봄에 데쳐서 둔 나물도 있고 언제 적 고기인지도 모를 고기는 색이 바래져있고 별의별 음식이 다 나왔죠. 엄마한테 냉동고에 이렇게 오래 넣어두면 맛도 없고 신선함이 떨어진다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그걸 왜버려? 다 돈인데." 하셨죠. 그런데 이제 내가 엄마랑 똑 같이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부터 다리가 아파 자주 가던 산에도 못 가게 되고, 친구들 만나서 밥 먹고 수다 떨고 하던 것도 점점 안하게 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뭘 버린다는 게 괜히 마음이 휑해지더라고요. 넓은 집에 혼자 있는 게 쓸쓸해 살림살이로 채우고 있는 건 아닌지...딸은 안의 내용물이 잘 보이도록 투명 비닐에 넣고 밖에다 갈치 마늘 떡..등 큰 글씨를 붙여놓았습니다. 그렇게 해놓으니 깔끔하고 좋았습니다. 차 한잔을 마시며 돌아가신 엄마를 떠올렸습니다. 엄마가 냉장고에 묵은 음식을 가득 쟁여놓으셨을 때 잔소리하지 말고 엄마의 등을 한번 안아드릴걸....아름답게 단풍이 들면 엄마가 좋아하셨던 단풍사진 들고 추모공원에 가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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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미향의 저녁스케치By C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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