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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하는 기술, 준비 없는 사회 — 한국 시니어 사회에 던지는 경고
기술은 앞서가고, 대비는 뒤처진다
인공지능(AI)이 몰고 올 변화의 폭과 속도를 둘러싸고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낙관론자들은 AI가 에너지와 의료, 농업 등 전 산업에 걸쳐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것이라 전망하는 반면, 신중론자들은 이 기술이 고용 시장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것이라 우려합니다. 그러나 정작 기업들은 저마다 더 빠르고 강력한 AI 모델을 내놓기 위한 경쟁에만 몰두할 뿐, 이 기술이 몰고 올 사회적 충격에 대해서는 명확한 대비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런 가운데 세계적인 기술 기업가로부터 나온 무거운 경고가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의 이례적 경고: "아무런 계획이 없다"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이자 자선사업가인 빌 게이츠는 최근 자신의 개인 웹사이트에 12페이지 분량의 에세이를 발표하며, AI가 고용과 인류의 삶에 미칠 위험성에 대해 이례적으로 강경한 어조로 경고했습니다. 그는 최상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더라도 AI 시대로의 전환이 인류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시기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진단하며, 현재 지도자와 전문가, 지역 사회 그 누구도 이 문제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는 그가 2023년 발표했던 에세이와는 확연히 다른 어조입니다. 당시 그는 AI를 인터넷과 개인용 컴퓨터(PC)의 보급에 견줄 만한 혁신으로서 기대감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이번 에세이에서도 에너지와 의료, 농업 분야에서의 AI의 순기능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전환 과정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할 경우 상황이 얼마나 악화될 수 있는지에 훨씬 더 큰 무게를 실었습니다. 그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고 단언하며 보다 강력한 제도적 규율을 촉구했습니다. 게이츠 벤처스(Gates Ventures) 측은 그가 지금 이 시점에 목소리를 낸 이유에 대해, 사회가 이 전환을 준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박함 때문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는 미국 의회 관계자들과도 이 문제를 직접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히며, 실업률이 급격히 치솟기 전인 바로 지금이 행동에 나설 기회라고 강조했습니다.(월스트리트저널, 2026년 8월 27일 자 B1면 보도)
속도의 경제, 그리고 계획의 부재
이러한 간극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기업의 생존과 성장은 경쟁사보다 빠른 기술 개발과 시장 선점에 달려 있는 반면, 그 기술이 초래할 사회적 비용을 계산하고 완충하는 일은 애초에 개별 기업의 책임 범위 밖에 놓여 있습니다. 규제와 사회 안전망은 대개 위기가 현실화된 이후에야 뒤늦게 정비되어 온 것이 역사에서 반복되어 온 패턴입니다. 문제는 AI가 초래할 노동시장 충격의 속도가 과거 산업혁명기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는 데 있습니다. 교육과 재훈련 체계가 새로운 기술 환경에 적응하는 데는 통상 수년이 걸리지만, AI 모델의 성능은 불과 몇 달 단위로 갱신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AI 개발은 국경을 넘나드는 반면, 이를 규율할 노동 정책과 사회 안전망은 여전히 개별 국가 단위에 머물러 있어 통일된 대응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준비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게이츠의 경고는 바로 이 속도의 비대칭을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경고는 한국 사회에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 중이며 노동인구 감소 압박을 받고 있는 한국은, 여기에 AI로 인한 일자리 재편까지 겹칠 경우 이중, 삼중의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특히 정년을 앞두거나 이미 정년을 지난 시니어 세대는 재고용 시장에서부터 이미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AI발 고용 충격이 본격화된다면 이러한 어려움은 한층 가중될 소지가 큽니다.
기술의 진보 자체를 막을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될 것입니다. 다만 그 진보가 사회 구성원 다수의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질서 있게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시니어 세대를 포함한 중장년 노동자에 대한 선제적 직무 전환 지원과 사회보험 사각지대 해소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이러한 균형 위에서만 전통적인 노동 질서와 세대 간 신뢰라는 사회의 안전판을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빌 게이츠의 경고가 일회성 우려에 그치지 않고, 한국 사회가 한발 앞서 준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증상을 검색하고 스스로 진단
손녀가 “나 우울증이야”라고 말할 때
미국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2026년 8월 25일 자 오피니언면에 심리치료 전문용어(therapy-speak)의 확산을 다룬 정신과 임상의의 글을 실었습니다. 필자가 진료 현장에서 관찰한 변화는 이렇습니다. 과거의 젊은 환자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듣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상담실을 찾는 10대 소녀와 젊은 여성들은 자기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ADHD), 강박장애, 불안장애, 우울증 같은 병명을 먼저 내놓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그 병명을 얻은 경로는 병원이 아니었습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증상을 검색하고, 짧은 영상 플랫폼에서 자가 진단 퀴즈를 풀고, 친구들과 서로의 상태를 대조해 본 결과였습니다. 학교 성적이나 가정 형편, 성향과도 무관하게 이 흐름은 폭넓게 퍼져 있다고 필자는 적었습니다.
왜 병명이 위로가 되는가
이 대목에서 임상의의 관찰은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젊은 환자들이 말하는 진단명은 반드시 의학적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설명하기 어려운 개인적 고통을 담아 둘 그릇, 즉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서사를 찾으려는 대처 기제에 가깝다는 분석입니다.
필자가 소개한 사례들은 구체적입니다. 어떤 소녀는 우울증이라고 말해야 어른이 자신을 신경 써 줄 것 같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다른 소녀는 ADHD라는 이름표를 통해 활발한 온라인 공동체에 소속되면서 외로움을 덜었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젊은 여성들은 가까운 사람을 향한 분노와 그 감정에 대한 죄책감이라는 진짜 원인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자기 뇌의 결함 탓으로 돌리는 편이 덜 무서웠다고 합니다. 필자는 이를 두고, 심리치료 전문용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정리했습니다.
물론 자가 진단이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도 있었다고 필자는 덧붙였습니다. 다만 상당수는 불편한 감정과 사회적 인정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 타협한 결과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언어는 밝히기도 하고 가리기도 합니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이 현상을 나약함이나 자기 탐닉으로 몰아붙이는 태도의 위험입니다. 필자는 정신의학의 진단 범주가 다른 의학 분야보다 유연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한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병명을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겪는 사람은 둘도 없기에, 임상에서는 병명보다 사람을 먼저 이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려도 분명히 밝힙니다.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진단 용어를 앞세우면, 곁에 있는 가족과 친구는 자신이 도울 능력이 없다고 느끼고 전문가에게 맡긴 채 물러서게 됩니다. 젊은이가 스스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도 중간에 끊길 수 있습니다. 필자가 인용한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말처럼, 어떤 이름은 사물의 한 면을 비추면서 다른 면을 가려 버립니다.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
이 이야기는 결코 남의 나라 사정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짧은 영상과 검색 몇 번으로 자신의 상태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손주 세대가 식탁에서 낯선 심리학 용어를 꺼낼 때, 시니어 세대가 보이는 반응은 대체로 두 갈래입니다. 큰일이 났다며 지나치게 놀라거나, 다 괜찮으니 마음 굳게 먹으라며 서둘러 덮으려 하는 것입니다.
필자의 지적대로 두 반응 모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과잉 반응은 문제의 초점을 아이의 고통에서 어른의 두려움으로 옮겨 놓습니다. 성급한 안심시키기는 아이의 고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신호로 읽힙니다.
대신 필자가 권하는 것은 작은 번역의 행동입니다. ADHD라고 말하는 아이는 머릿속이 산만하고 감당하기 벅차며 자신이 엉망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말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불안하다는 말은 마음이 쓰이고 자신이 없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우울증이라는 단어에 놀라기 전에, 그 아이가 왜 절망스럽고 외로운지를 먼저 헤아려 보라는 것입니다. 상대를 반박하기 위한 되묻기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한 되묻기입니다.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심각하게
저는 이 대목에서 시니어 세대가 가진 자산을 봅니다. 우리 세대는 마음의 고통을 말할 언어가 부족했던 시절을 통과해 왔습니다. 참는 것이 미덕이었고, 병원 문턱을 넘는 일은 흠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결핍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우리는 몸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요즘 젊은 세대가 감정을 말한다는 사실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다만 이름표가 성장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진단은 출발선이지 종착지가 아닙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설명할 언어를 갖는 것과, 그 언어 뒤에 숨어 책임과 관계로부터 물러서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지원과 요구는 함께 가야 합니다. 아이의 고통을 진지하게 듣되,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는 사실도 조용히 일러 주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그 균형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오랜 세월을 살아 낸 시니어입니다. 유행어의 표면에 흔들리지 않고, 그 아래 흐르는 진짜 감정을 알아보는 눈은 경험에서 나옵니다. 손주가 낯선 용어를 꺼낼 때 놀라지도 무시하지도 않고 조용히 되묻는 그 한마디가, 어쩌면 어떤 처방보다 먼저 필요한 첫걸음일 것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프랑스 일간지가 들여다본 서울의 ‘펫팸’ 현상과 그 이면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Le Figaro)가 2026년 8월 21일 자 지면에서 서울을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아시아의 열풍’ 기획 시리즈의 두 번째 편으로, 서울 특파원이 강남과 청담동, 코엑스 전시장을 직접 취재해 쓴 기사입니다. 제목은 도발적입니다. 아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반려견이 채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숫자가 먼저 말합니다
기사가 인용한 가장 상징적인 지표는 유모차입니다. 국내 전자상거래 플랫폼 지마켓 집계를 근거로, 2023년 반려견용 유모차 판매량이 유아용 유모차 판매량을 넘어섰다고 전했습니다. 같은 해 서울의 합계출산율은 가임 여성 1명당 0.55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을 기록했습니다. 인구를 현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2.1명의 4분의 1에 불과한 수치입니다.
시장의 규모도 함께 소개했습니다. 반려동물 관련 산업, 이른바 펫 이코노미(pet economy)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추산 약 8조 원(약 53억 달러)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반려인 수는 인구의 약 30퍼센트에 해당하는 1,500만 명으로, 10년이 채 안 되는 사이 두 배 가까이 늘었다고 기사는 전합니다. 정치권이 이들을 하나의 유권자 집단으로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현지 동물보호단체 관계자의 관측도 함께 실렸습니다.
취재 현장에서 확인된 풍경도 구체적입니다. 반려견에게 사람이 먹는 이탈리아 요리를 내놓는 식당, 개 이름을 새긴 금도금 명판이 달린 80만 원(약 474유로)짜리 고급 유모차, 백내장 예방용이라며 판매되는 30만 원(약 200유로) 상당의 반려견 선글라스, 운구와 입관식과 화장까지 갖춘 반려동물 장례 서비스가 소개되었습니다. 항공사가 반려동물 전용 좌석을 시범 운영한 사례도 언급되었습니다.
한 세대 만에 뒤집힌 인식
기사가 주목한 것은 변화의 속도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개고기를 소비하던 사회가 반려견을 가족 구성원으로 대우하는 사회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2024년 제정된 개 식용 종식 특별법에 따라 2027년 2월 7일부터 식용 목적의 사육과 도살, 유통이 전면 금지됩니다. 종로 일대 전통 음식점들이 이미 손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현장 관찰도 실렸습니다.
이러한 급격한 전환을 프랑스 기자는 흥미로운 사회 현상으로 보면서도, 그 배경에 놓인 구조적 압력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왜 아이 대신 반려견인가
기사가 지목한 원인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주거 비용입니다. 2017년부터 2021년 사이 서울 부동산 가격이 두 배로 뛰었고 금리마저 오르면서, 아파트 구입이 사실상 도달 불가능한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택 마련은 여전히 결혼의 사실상 전제 조건으로 작동합니다. 진입 장벽이 결합 자체를 가로막는 구조입니다.
둘째, 교육 경쟁입니다. 유치원 단계부터 명문대 입학 경쟁이 시작되고, 야간 학원 수업이 가계를 압박합니다. 기사는 사교육비가 10년 만에 60퍼센트 급증해 연간 200억 달러(약 27조 6,000억 원)를 넘어섰다고 전했습니다.
셋째, 정서적 공백입니다. 취재에 응한 30대 프리랜서는 “개는 새로운 아기”라고 말하며 서울에서 아이를 키울 여력이 없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또 다른 응답자는 “아무도 당신의 반려견이 어느 대학에 다니는지 묻지 않는다”는 말로 압박 없는 관계의 매력을 요약했습니다.
다만 기사는 반려 문화 역시 과시 경쟁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대형견은 넓은 집이 필요하기에 부의 상징이 되고, 반려동물은 인스타그램에서 새로운 전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니어 세대가 눈여겨볼 대목
이 기사를 남의 이야기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세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우선 부양 구조의 문제입니다. 출산율 붕괴는 20년 뒤 연금과 건강보험의 지속 가능성 문제로 되돌아옵니다. 지금 청년이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를 청년의 가치관 탓으로만 돌리면 해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주거와 교육이라는 두 개의 벽을 낮추는 일이 먼저입니다.
다음으로 시니어 자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반려동물은 이미 많은 시니어 가정에서 정서적 동반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반려동물의 기대 수명, 병원비, 돌봄 부담을 충분히 계산하지 않은 채 입양했다가 어려움을 겪는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애정만으로는 감당되지 않는 영역이 분명히 있습니다.
끝으로 세대 간 이해의 문제입니다. 기사에 등장한 30대 카페 주인은 반려견을 아끼면서도 “동물을 사람처럼 대해서는 안 되며, 반려견이 아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두 아이를 갖기를 꿈꾼다고 했습니다. 청년 세대를 하나의 덩어리로 재단하는 일이 얼마나 부정확한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맺으며
가족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 자체를 개탄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형태가 달라졌다고 해서 가족이 감당해 온 기능까지 사라져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세대를 잇고, 서로를 돌보며, 사회를 지탱해 온 그 기능은 여전히 누군가가 맡아야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청년을 나무라는 목소리가 아니라, 아이를 낳고 기르는 선택이 무모한 모험이 되지 않도록 조건을 정비하는 일입니다. 지원할 것은 확실히 지원하고, 요구할 것은 분명히 요구하는 균형입니다. 그것이 오랜 세월 가정을 지켜 온 시니어 세대가 지금 사회에 건넬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조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 2026년 8월 21일 자 오피니언 지면에는 영국 노동조합회의(TUC) 폴 노박(Paul Nowak) 사무총장의 기고문이 실렸습니다. 영국 정부가 추진 중인 착취적 제로 시간 계약(zero-hours contracts) 금지 법안을 두고 기업 로비 단체들이 내세운 비용 추산이 부풀려졌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제로 시간 계약이란 근무 시간을 미리 정하지 않고, 사용자가 필요할 때마다 호출해 일을 시키는 고용 형태를 말합니다. 계약은 존재하지만 보장된 근무 시간은 없습니다.
쟁점의 실체
논쟁의 발단은 같은 신문이 8월 12일 자로 보도한 기사였습니다. 제로 시간 계약을 규제할 경우 영국 기업이 연간 최대 50억 파운드(약 9조 2,500억 원)의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노박 사무총장은 이 수치가 매우 넓은 추정 구간의 최상단 값일 뿐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같은 추정에서 가장 낮은 금액은 3억 5,000만 파운드(약 6,475억 원)로, 두 수치의 차이는 열네 배에 이릅니다.
더 주목할 대목은 최상단 수치가 성립하는 전제 조건입니다. 그에 따르면 50억 파운드라는 금액에 도달하려면 고용주들이 새 법을 사실상 무시하고 임박한 근무 취소를 계속하며, 그 결과 노동자에게 29억 파운드(약 5조 3,650억 원)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상황을 가정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법을 지키기만 해도 추산 비용의 절반 가까이는 애초에 발생하지 않습니다. 위법을 전제로 산출한 비용을 규제 반대의 근거로 삼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는 지적입니다.
누가 비용을 부담하고 있는가
노박 사무총장은 불안정 노동자 세 명 중 한 명이 근무 취소와 시간 단축 등으로 연평균 5,000파운드(약 925만 원) 이상의 소득 손실을 겪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금액은 통계 수치에 그치지 않습니다. 주거를 유지할 수 있는지, 난방을 켤 수 있는지, 자녀에게 따뜻한 식사를 차릴 수 있는지를 가르는 실질적 경계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기업이 부담할 비용은 최대치로 부각하면서, 불안정 고용을 보전하기 위해 복지제도(Universal Credit)를 통해 납세자가 이미 지출하고 있는 비용은 계산에서 빠져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수십 년 전 최저임금 도입 당시 동원된 논리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입니다.
균형 잡힌 시각을 위하여
다만 이 기고문은 노동조합 대표의 의견이며, 반대편의 주장 역시 함께 살펴야 공정합니다. 사용자 단체들은 호출형 근로가 계절적 수요 변동이 큰 소매·요식·물류 업종의 현실적 대응 수단이며, 규제가 지나치면 채용 자체가 줄어 가장 약한 노동자가 먼저 배제된다고 반박해 왔습니다. 실제로 유연 근무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학생이나 은퇴 후 소득 보완을 원하는 계층도 존재합니다. 문제는 유연성 자체가 아니라, 그 유연성의 위험을 누가 떠안느냐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주는 시사점
이 논쟁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노동시장에도 주 15시간 미만 초단시간 근로가 상당한 규모로 존재하며, 그 상당 부분을 시니어 세대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공공형 일자리, 시설 관리, 경비, 배송 보조, 플랫폼 호출 노동에 이르기까지 근무 일정이 사후에 통보되거나 갑작스레 취소되는 사례는 드물지 않습니다. 초단시간 근로는 주휴수당과 퇴직급여 적용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아, 근로시간이 조금만 조정되어도 소득과 사회보험 자격이 함께 흔들립니다.
시니어 노동자에게 예측 가능성은 젊은 세대보다 더 절실합니다. 병원 진료 일정, 손자녀 돌봄, 연금 수급 시기와의 조율이 모두 근무 일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질서와 안정은 보수적 가치의 핵심입니다. 계약이 지켜지고 약속한 일정이 통보 없이 뒤집히지 않는 것, 이는 규제가 아니라 신뢰의 기본입니다. 기업의 활력을 위축시키는 과잉 입법은 경계해야 하지만, 지원(Fördern)과 요구(Fordern)는 함께 가야 합니다. 유연성을 허용하되 최소한의 사전 통보 기간과 근무 취소 시 보상 기준을 명확히 세우는 것, 그리고 그 기준을 예외 없이 적용하는 것이 우리가 취할 합리적 균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풀려진 숫자로 벌이는 공방보다, 검증된 자료를 놓고 벌이는 토론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사회 역시 초단시간 근로 실태에 대한 정확한 통계부터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음주 문제를 겪는 미국인의 비율이 최근 5년 사이 뚜렷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 약물남용 및 정신건강서비스청(SAMHSA)의 최신 전국 약물 사용 및 건강 조사에 따르면, 12세 이상 미국인 가운데 알코올 사용 장애(AUD·Alcohol Use Disorder) 진단 기준에 해당하는 비율은 2021년 10.6%에서 2025년 8.9%로 낮아졌습니다. 인원으로는 약 300만 명이 감소한 규모입니다.
다만 이 수치를 해석할 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해당 조사의 방법론이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변경돼 2021년 이전 자료와 직접 비교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컬럼비아대학교와 미시간대학교 등의 장기 연구, 갤럽 조사 등 다른 자료에서도 미국인의 음주 감소 현상이 확인되고 있어 단순한 통계상의 착시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입니다.
알코올 사용 장애는 단순히 술을 많이 마시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건강이나 직장생활, 가족관계 등에 문제가 발생하는데도 음주를 계속하거나 스스로 음주량을 통제하기 어려운 상태를 말합니다. 현대 의학에서는 이를 ‘술을 끊을 수 있는 사람’과 ‘끊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누기보다 연속적인 스펙트럼으로 이해합니다.
임상적으로는 갈망, 계획보다 많은 음주, 음주를 줄이거나 중단하려는 반복적인 실패 등 11개 증상을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해당 증상이 2~3개이면 경증, 4~5개이면 중등도, 6개 이상이면 중증 알코올 사용 장애로 분류합니다.
이번 감소에서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경증 장애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감소입니다. 전체 문제 음주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경증 집단에서 감소 폭이 크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중등도와 중증 장애의 감소 폭은 상대적으로 작았습니다. 전문가들이 이번 변화를 공중보건 측면에서 의미 있는 성과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왜 미국인들은 술을 덜 마시게 되었을까요. 전문가들은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음주를 당연한 사회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던 문화가 약해진 것이 중요한 배경으로 거론됩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술이 암을 비롯한 여러 질환의 위험을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도 늘었습니다. 술 대신 운동이나 취미, 온라인 활동 등 다른 형태의 여가를 선택하는 문화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비만 치료제로 널리 알려진 세마글루타이드(semaglutide) 계열 약물이 음주 욕구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연구도 발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알코올 사용 장애 감소를 이 약물의 영향으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약물의 효과가 상대적으로 중증 음주자에게서 더 크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진 반면, 이번 통계에서는 오히려 중증 장애의 감소 폭이 가장 작았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가 미국 정부의 공중보건 정책 변화와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최근 음주 관련 식생활 지침에서는 과거 남성 하루 2잔, 여성 하루 1잔이라는 구체적인 기준 대신 보다 포괄적인 ‘음주 제한’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면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국민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알코올 관련 공중보건 조직과 연구 인력의 축소도 변수입니다. 개인과 사회의 음주 습관이 개선되고 있다고 해서 정부 차원의 감시와 예방 체계까지 약화시켜도 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추세가 지속되도록 정확한 통계를 축적하고 위험 음주자를 조기에 발견하며, 중증 환자에게는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는 체계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술은 오랫동안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의 중요한 매개였지만, 건강수명이 길어진 시대에는 음주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시니어에게는 젊은 시절의 음주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현명한 선택은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신체의 알코올 처리 능력과 약물에 대한 반응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음주량을 자연스럽게 줄이는 것은 건강관리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미국의 변화가 보여주는 것은 ‘절주’가 반드시 강제적인 금욕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건강에 관한 정보가 축적되고 사회적 분위기가 변하며 술을 대신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이 늘어나면 개인의 선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정책 역시 이러한 자발적인 변화를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설계될 필요가 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 말할 필요도 없고, 술을 즐기는 사람을 문제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음주가 건강과 가족관계,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스스로 돌아보는 일입니다. 특히 음주를 줄이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거나, 건강상의 문제가 생겼는데도 계속 술을 찾는다면 단순한 ‘절제력 부족’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의료적 도움이 필요한 신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나타난 음주 감소세가 일시적인 현상인지 장기적인 사회 변화인지는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합니다. 그러나 건강을 위해 술을 덜 마시려는 선택이 개인의 결심을 넘어 하나의 사회적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술을 얼마나 마실 것인가 역시 결국 그 목표를 향해 자신의 생활습관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절주는 거창한 결심이라기보다 앞으로의 삶을 조금 더 건강하게 설계하는 작은 선택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
젊었을 때에는 눈앞의 일과 앞으로 이루어야 할 목표가 중요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이미 지나온 시간과 그 안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놓쳤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롭 모스(Robb Moss)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더 벤드 인 더 리버(The Bend in the River)』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특별한 성공을 거둔 유명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온 다섯 친구의 인생을 수십 년에 걸쳐 다시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오히려 깊은 울림을 줍니다.
모스 감독은 1978년 단편영화 『리버독스(Riverdogs)』에서 당시 20대였던 자신과 친구들의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이들은 콜로라도강에서 래프팅 가이드로 일하며 젊음과 자유를 만끽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2003년, 감독은 다시 카메라를 들고 이들을 찾아 『더 세임 리버 트와이스(The Same River Twice)』를 만들었습니다. 젊음의 한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중년이 되어 가족과 직업, 책임과 관계의 무게를 짊어진 모습을 기록한 작품이었습니다.
이번 영화는 다시 약 20년의 시간이 흐른 뒤 시작됩니다. 대니 실버(Danny Silver), 짐 티케너(Jim Tickenor), 캐시 쇼(Cathy Shaw), 제프 골든(Jeff Golden), 해리 와서만(Harry Wasserman) 등 다섯 친구는 어느덧 70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감독은 과거 영화의 장면과 현재의 대화를 교차시키면서 시간이 한 사람의 얼굴과 몸뿐 아니라 생각과 가치관까지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줍니다.
젊은 시절의 화면 속 인물들은 강변을 자유롭게 누비며 자신들의 미래가 얼마나 길게 펼쳐져 있는지 의식하지 않는 듯합니다. 중년의 모습에서는 가족과 직업에 대한 고민이 나타나고, 70대가 된 현재에는 지나온 삶을 평가하는 시선이 두드러집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서로 다른 시기의 모습을 한 화면에서 바라보게 되면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는 젊었을 때 정말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살았던 것일까요.
영화 속 친구들은 자신들이 젊었을 당시의 모습을 다시 보면서 그때는 자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몰랐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시에는 나이 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알지 못했다는 고백도 이어집니다. 젊을 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가운데 상당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가 작아지고, 반대로 별것 아니라고 여겼던 관계와 순간들이 인생에서 훨씬 중요한 것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이 듦이 가져오는 가장 현실적인 지혜인지도 모릅니다. 젊은 사람에게는 선택할 시간이 많기 때문에 하나의 실패나 후회가 인생 전체를 결정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70대에 이르면 인생은 이미 상당 부분 현실이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했는지뿐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도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일부가 됩니다. 영화 속 한 인물의 말처럼, 이 시점에서는 삶이 제공한 것을 이미 했거나 하지 않은 것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후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유머가 있고 인간적인 따뜻함이 있습니다. 이들은 유명 인사도, 역사책에 기록될 정도의 특별한 인물도 아닙니다. 일부는 공직에 도전했고, 각자의 삶에서 실패와 갈등을 경험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평범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평범함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는 관객 자신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특히 과거의 인간관계와 선택을 다시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세월의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당시에는 자신에게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행동도 시간이 지나면 다르게 보일 수 있고, 반대로 그때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인생에서 오래 남는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과거의 장면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벤드 인 더 리버』가 시니어에게 특히 의미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시니어 세대는 이미 수십 년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젊은 세대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시간의 변화를 알고 있습니다. 경제적 성공도, 사회적 지위도, 경쟁에서의 승리도 시간이 지나면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오래 남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 가족과의 기억, 자신이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그리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영화는 거창한 성공의 공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다시 바라보는 모습을 통해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 지나온 시간보다 짧아졌을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되는가, 그리고 그때까지도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계속 얻는 과정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알게 되면서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젊었을 때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더 벤드 인 더 리버』는 다섯 친구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합니다. 젊은 날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달라졌는지, 한때 중요했던 것들은 지금도 중요한지, 그리고 정작 소중했던 것들을 우리는 얼마나 잘 지켜왔는지를 묻게 합니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갑니다. 그러나 그 세월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마지막에 남는 삶의 표정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는 것만으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지금까지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남은 시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아직 가능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단순히 젊음을 잃어가는 일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살아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관점과 분별력을 갖게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나온 수많은 경험 속에서 천천히 쌓입니다.
『더 벤드 인 더 리버』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강물처럼 흘러온 한 사람의 인생입니다. 강물의 방향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굽이를 돌아선 뒤 어디를 바라볼 것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후반부에 필요한 것은 지나온 길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그 길에서 얻은 지혜를 바탕으로 남은 길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일 것입니다.
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
도로변에 선 카메라 한 대가 미국 사회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자동차 번호판을 자동으로 읽어 기록하는 감시 장비가 훼손되는 사건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가 지난 8월 19일 자로 전한 바에 따르면, 동부 테네시주에서 강 안내인으로 일하며 무소속 연방 하원의원 후보로 출마한 서른일곱 살의 애덤 하이머먼 씨는 지난 7월 예배가 진행 중이던 교회 인근의 장비를 포함해 모두 네 대의 카메라에 총격을 가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대학생, 컴퓨터 기술자, 심지어 공군 소속 기술자까지 유사한 혐의로 고발되었고, 미네소타주 위노나에서는 시내에 설치된 여덟 대가 모두 절단된 뒤 사라졌습니다.
문제의 장비는 자동 번호판 인식기(ALPR·Automated License Plate Recognition)라 불립니다. 감시 장비 위치를 시민들이 직접 등록하는 사이트 디플록(DeFlock.org)의 집계로는 미국 전역에 13만 대 이상이 설치되어 있다고 합니다(집계 주체가 민간 크라우드소싱이므로 수치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대표 기업인 플록 세이프티는 6천 개가 넘는 지역사회에서 장비를 운영하며 월 200억 건의 번호판 기록을 수집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수사에는 유용하나, 기록은 남습니다
이 기술의 효용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운영사는 자사 장비가 지난해 발생한 대학 총격 사건의 범인 신원을 특정하는 데 기여했다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이 장비가 특정 범죄자만을 골라 보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병원을 드나든 기록, 사격장을 찾은 기록, 특정 판매점 앞을 지나간 기록이 모두 남습니다. 정부 감시를 감독하는 비영리 단체의 연구 책임자 엘레니 마니스 씨는 원하는 때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자유가 침해되는 사안이기에 이 비판이 진영을 가리지 않는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우려는 현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전·현직 연인을 추적하는 등 인가되지 않은 목적으로 장비를 사용한 혐의로 최소 50명의 경찰관이 기소되거나 고발되었습니다. 이민 당국 요원들이 지역 기관을 경유해 전국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한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논란이 커지자 운영사는 검색 시 형사 사건 번호 기재를 의무화하고 데이터 보관 기간을 30일에서 7일로 줄이는 개선안을 내놓았습니다. 최근 몇 달 사이 100곳의 지방자치단체가 계약을 중단하거나 해지하였습니다.
분노의 정체는 기술이 아니라 절차입니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반발의 성격입니다. 시민들은 기술 자체를 몰라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동의한 적 없는 감시가 조용히 늘어났고, 반대 의견을 전달할 통로가 막혀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하이머먼 씨 역시 조용히 편지나 쓰라는 조언에 사람들이 지쳤다는 취지로 말하였습니다. 우파 논객 터커 칼슨 씨가 훼손 행위자들을 애국적 시민으로 묘사하고, 반대 진영의 정치 활동가 릭 윌슨 씨가 장비를 방해하는 도구를 방송에서 언급한 사실은 이 사안이 좌우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의 변호 비용 모금 사이트에는 1만 3천 달러(약 1,807만 원, 1달러 1,390원 기준·환율은 게재 전 확인 필요)가 넘게 모였습니다.
그러나 본지는 이 저항 방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유든 공유든 타인의 재산을 파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미시간주 워터포드 경찰은 스물네 살 피의자가 카메라를 훼손하던 차량의 번호판이 바로 그 카메라에 찍혀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감시가 싫어 감시 장비를 부수다가 감시에 걸린 셈이니, 이보다 분명한 역설도 드뭅니다. 온라인에서 허위 알리바이를 대신 제공하는 행태 또한 공동체의 신뢰를 갉아먹을 뿐입니다.
우리 사회가 먼저 점검해야 할 것들
한국은 미국보다 폐쇄회로 텔레비전과 차량번호 인식 설비가 훨씬 촘촘한 나라입니다. 아파트 주차장, 공공 청사, 도심 도로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설비는 시니어 세대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어 왔습니다. 인지 저하로 길을 잃은 분을 찾아내고, 야간 골목의 범죄를 억제하며, 뺑소니 차량을 추적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안전을 지키는 장치를 무턱대고 걷어내자는 주장은 무책임합니다.
다만 우리가 미국의 사례에서 배워야 할 것은 기술의 존폐가 아니라 관리의 원칙입니다. 누가, 어떤 근거로, 얼마 동안 기록을 보관하고 열람하는지가 명확해야 합니다. 열람 사유를 기록으로 남기고, 목적을 벗어난 조회를 실질적으로 제재하며, 보관 기간을 필요한 최소한으로 정하는 일은 기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오래 쓰기 위한 조건입니다. 지원과 요구는 함께 가야 합니다. 공적 안전을 위한 장비 도입을 지원하되, 운용 주체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절차적 책임을 엄격히 요구해야 합니다.
시니어의 경험이 필요한 자리입니다
우리 세대는 통금이 있던 시절과 지문 날인이 당연하던 시절을 지나, 손 안의 기기 하나로 모든 것이 기록되는 시대까지 살아왔습니다. 안전이 절실하다는 것도 알고, 안전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쉽게 남용될 수 있는지도 압니다. 그 균형 감각은 어느 세대도 대신 갖지 못하는 자산입니다.
기술을 부수는 손이 아니라, 규칙을 세우는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질서를 지키면서도 자유를 잃지 않는 길을 찾는 일, 그것이 우리 시니어 세대가 이 사회에 내어놓을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기여라고 생각합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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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배급과 끝없는 정전, 인내의 임계점
세상에는 기다림을 훈련받지 않고도 기다림의 전문가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 뉴욕타임스 국제판이 지난 8월 18일 오피니언 면에 실은 마이클 J. 부스타만테 마이애미대학교 교수의 기고문은 오늘날 쿠바 국민들의 처지를 바로 그렇게 요약합니다. 하루치 빵 배급을 기다리고, 초만원 버스를 기다리고, 섬을 떠날 비자를 기다리는 삶입니다. 여기에 하루 한두 시간만 들어오는 전기를 기다리고, 해외 친척이 보내주는 상비약을 기다리는 일이 더해졌습니다.
이 기다림이 서서히 조여오는 질식으로 바뀐 시점을 필자는 두 가지로 짚습니다. 하나는 감염병 대유행이 섬 경제를 깊은 침체로 몰아넣은 일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행정부가 지난 1월 사실상의 석유 봉쇄를 시행한 일입니다. 전력망이 무너지자 냄비를 두드리는 항의, 이른바 카세롤라소(cacerolazo)와 불붙은 쓰레기로 만든 거리 봉쇄가 거의 매일 밤 벌어진다고 합니다. 정부 브리핑 도중 실수로 화면에 노출된 자료에서 당국이 '사회적 폭발(estallido social)'을 우려하고 있음이 드러났다는 대목은, 통치자들 스스로 한계를 감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붕괴를 기대하는 시선과 그렇지 않은 현실
일부, 특히 해외 이주 쿠바인 사회에서는 1989년 동유럽 공산 정권의 연쇄 붕괴가 이 섬에서 재현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필자의 진단은 냉정합니다. 당시 동유럽의 변화는 대중의 불만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배 엘리트 내부의 분열과 실질적 지지 기반을 가진 야당이 함께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쿠바에서는 강압적 국가기구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탄압의 위협이 야당의 힘을 약화시켰으며, 무엇보다 대규모 동원의 자리를 대규모 이민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2020년 이후 최대 200만 명이 섬을 떠난 것으로 필자는 전합니다. 분노가 광장으로 모이는 대신 국경 밖으로 흩어진 셈입니다.
바깥에서 변화가 올 가능성도 필자는 회의적으로 봅니다. 미국 국무장관과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접촉을 통해 일정한 타협 가능성을 내비쳤으나, 지도부 교체 요구가 거부되면서 2차 제재, 이른바 세컨더리 보이콧이 시행되었고 외국 기업들이 철수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경제 자유화 조치나 저명한 정치범 석방도 교착을 풀지 못했습니다. 필자는 군사적 개입 시나리오에 대해서도 1898년 미군 점령 이후 미국의 이해에 종속된 공화국이 탄생했던 역사를 상기시키며, 개입이 민주주의를 보장하기보다 새로운 종속 질서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고 경계합니다.
구조를 보는 눈, 이념보다 살림입니다
여기서 저는 이 글이 좌우의 문제로 소비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쿠바의 곤경은 수십 년에 걸친 권위주의 통치와 경제 운영의 실패라는 내부 원인, 그리고 외부의 제재라는 외부 원인이 맞물린 결과입니다. 어느 한쪽만 지목하는 설명은 절반의 진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양측이 상대가 먼저 양보하기를 기다리는 밀고 당기기, 스페인어로 티라 이 아플로하(tira y afloja)를 이어가는 동안 그 비용을 온전히 치르는 쪽은 평범한 시민이라는 사실입니다. 정부는 기다릴 여유가 있으나 국민은 그렇지 못하다는 필자의 결론은, 정치의 시간과 생활의 시간이 결코 같지 않다는 오래된 진실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독서는 다시 광장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요즘 신문과 방송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문해력이 무너지고 있다는 경고가 쏟아집니다. 미국에서는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의 읽기 성취도가 2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내려앉았고, 대학생들조차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8월 17일 자 뉴욕타임스 국제판에 실린 피터 슈미트의 기고문은 이 익숙한 비관론에 흥미로운 반론을 제기합니다. 문해력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는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19 봉쇄와 소셜 미디어 속에서 성년을 맞은 미국의 젊은 세대가 지금 갈망하는 것은 화면 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로 몸을 부딪치며 살아가는 세계의 관계라는 진단입니다. 함께 읽고, 묻고, 생각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의 낯섦을 마주 보는 일 말입니다. 그리고 책이야말로 그런 만남을 조직하는 데 가장 강력한 매개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입니다.
모임이 된 책, 파티가 된 독서
실제 사례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조용히 각자 책을 읽기 위해 모이는 커뮤니티인 사일런트 북 클럽은 현재 60개국에 2,000개가 넘는 지부를 두고 있습니다. 배드 비치 북 클럽이 여는 독서 수련회와 여름 캠프에는 열다섯 명에서 서른 명가량이 주말 내내 함께 머뭅니다. 문학과 요리를 결합한 컨섬션 북클럽은 소설의 세계를 주제가 있는 만찬으로 재현합니다. 뉴욕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열린 앨런 긴즈버그 시 낭독회에는 수백 명이 몰렸습니다. 오클라호마주 털사의 한 서점 관계자는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대체로 내향적인 성향이라, 오히려 서로 통하는 사람을 확인할 공간이 절실하다고 설명합니다.
필자 자신도 지난달 브루클린 강변에서 월트 휘트먼의 시를 밤새워 낭독하는 모임을 준비했습니다. 스물다섯 명이 신청했으나 예순 명 가까이 모였고, 새벽 두 시 무렵 함께 목청껏 소리를 지른 뒤 찾아온 정적 속에서 한 대학 졸업생이 사실 휘트먼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하자고 제안했다는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혼자 읽기가 오히려 새로운 방식이었습니다
여기서 짚어둘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육자들이 지키려는 방식, 즉 홀로 조용히 앉아 눈으로만 읽는 묵독은 사실 인류사에서 비교적 늦게 등장한 관행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소리를 내지 않은 채 눈으로만 책장을 따라가던 장면을 신기한 일처럼 기록했습니다. 그가 굳이 이를 적어둔 것 자체가, 고대 세계의 독서란 글을 아는 이와 모르는 이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소리 내어 읽는 공적 행위였음을 말해 줍니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역사서를 낭독한 것으로 전해지고, 로마 제국에서 낭송은 유력한 오락이자 토론의 형식이었습니다. 인쇄술의 확산과 문해력의 대중화가 비로소 고독한 묵독을 독서의 표준 이미지로 굳혔을 뿐입니다.
시니어 세대에게 주는 시사점
이 대목에서 우리 시니어 독자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방과 서당, 마을 정자에서 함께 읽고 함께 외우던 기억을 가진 세대가 바로 우리입니다. 지금 미국의 젊은이들이 새롭게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실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일에 가깝습니다.
물론 냉정하게 볼 부분도 있습니다. 스마트폰 과다 사용과 인공지능에 대한 지나친 인지적 의존이 젊은 세대의 읽기 능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함께 모여 낭독하는 즐거움이 긴 글을 끝까지 붙들고 씨름하는 훈련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정독과 완독의 규율은 여전히 학교와 가정이 지켜야 할 기본입니다.
다만 그 규율을 지키는 방법이 반드시 고립일 필요는 없습니다. 지역 도서관과 복지관, 종교 시설에서 시니어가 주도하는 낭독 모임을 만들고, 손자녀 세대를 초대해 함께 소리 내어 읽는 자리를 마련한다면, 이는 문해력 회복인 동시에 세대 간 다리를 놓는 일이 됩니다. 젊은 세대의 조바심과 시니어 세대의 축적된 독서 경험이 만나는 지점에서 공동체의 언어가 회복됩니다.
책은 정보를 나르는 도구로서의 역할은 줄어들지 몰라도, 사람을 한자리에 모으는 힘은 오히려 커지고 있습니다. 읽는 일이 다시 광장으로 나오는 이 흐름을, 우리 시니어 세대가 뒷짐 지고 구경할 이유는 없습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미국 '거리 의학'이 던지는 질문 — 스스로 병원에 오지 못하는 시니어는 누가 돌보는가
병원 문 앞에서 멈춰 서는 사람들
의료 제도의 성패는 흔히 병원 안에서 측정됩니다. 의료진의 수준, 장비의 성능, 수술 성공률 같은 지표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지표에는 한 가지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환자가 스스로 병원 문을 열고 들어온다는 전제입니다.
이 전제가 무너지는 지점에 시니어가 있습니다. 거동이 불편해 버스 두어 번을 갈아탈 수 없는 분, 인지 기능이 떨어져 예약 시간을 지키기 어려운 분, 과거의 진료 경험에서 상처를 입어 병원 자체를 기피하게 된 분들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하면 오시라"는 말은 사실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미국이 30여 년에 걸쳐 확인한 것
미국에서는 1990년대에 짐 위더스(Jim Withers) 박사가 병원 밖으로 나가 취약계층을 직접 진료하기 시작했고, 이 방식은 오늘날 '거리 의학(Street Medicine)'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150개 이상의 프로그램으로 확산되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성과 지표입니다. 남캘리포니아대학교(USC) 프로그램의 경우 대상 환자의 응급실 방문이 약 80퍼센트 줄었고, 입원 기간은 평균 2.5일 단축되었으며, 재입원율은 3분의 2가량 감소했다고 합니다. 매일 수개월간 약을 복용해야 하는 C형 간염 치료에서도 완치율이 80퍼센트를 넘었습니다. 찾아가는 방식이 온정주의적 시혜가 아니라 임상적으로 유효한 전략임을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미국 공공의료보험인 메디케이드(Medicaid)는 2023년 10월 이 진료 방식에 처음으로 공식 수가를 인정했습니다. 비주류로 취급받던 활동이 제도권에 들어선 것입니다.
제도권 진입이 불러온 딜레마
그런데 현장의 의료진은 오히려 우려를 표합니다. 제도에 편입되는 순간 이 활동이 생산성 지표와 수익성의 잣대로 평가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환자 한 사람을 찾아내 이동을 돕고 상처를 소독하는 데 한 시간 넘게 쓰는 방식은, 분 단위로 회전율을 계산하는 병원 회계 기준에서는 비효율로 기록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의료 책임자는 비용 절감이 이 일의 부산물일 수는 있어도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비용만 따진다면 가장 값싼 선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경고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국 시니어 정책에 주는 시사점
우리 사회에도 방문진료 시범사업, 재택의료센터, 장기요양 재가급여 등 찾아가는 서비스가 이미 존재합니다. 문제는 규모와 지속성입니다.
첫째, 이동 지원의 실효성입니다. 미국 사례에서 환자는 교통 지원 자격이 있어도 사전 예약을 하지 못해 이용에 실패했습니다. 우리의 이동지원 서비스 역시 예약 절차와 대기 방식이 시니어의 실제 생활 조건에 맞는지 점검이 필요합니다.
둘째, 처방의 현실 적합성입니다. 화장실 이용이 어려운 환자에게 이뇨제를 처방하면 복약이 중단됩니다. 주거 환경과 보호자 유무를 고려하지 않은 처방은 서류상으로만 정확할 뿐입니다.
셋째, 수가 체계의 설계입니다. 찾아가는 진료의 가치를 진료 건수가 아닌 응급실 이용 감소, 재입원 억제, 재가 생활 유지 기간으로 측정하는 기준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온정이 아니라 기준의 문제입니다
찾아가는 진료는 동정심의 표현이 아닙니다. 위더스 박사의 표현처럼 소방서와 같은 사회 기반 시설로 이해되어야 할 공공 서비스입니다. 불이 나면 소방차가 출동하듯, 스스로 나올 수 없는 시니어에게는 의료가 찾아가는 것이 원칙이어야 합니다.
다만 저는 무제한의 확대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재원은 유한하고, 세대 간 부담의 형평도 지켜져야 합니다. 필요한 것은 대상의 명확한 기준, 성과의 객관적 측정, 그리고 재정의 지속 가능성입니다. 지원(Fördern)과 요구(Fordern)는 함께 가야 합니다.
시니어는 돌봄의 수혜자이기 이전에 이 사회의 안전망을 지켜온 세대입니다. 그 세대가 병원 문 앞에서 발길을 돌리지 않도록 하는 일은 시혜가 아니라 사회가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의 이행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출처: The New York Times, Opinion 지면(A18~A19) 게재 칼럼. 미국 '거리 의학' 현장 취재 기사. 본 칼럼은 원문의 직접 인용 없이 사실관계를 요약·재구성하고, 시니어 정책 관점으로 논지를 재설정한 것입니다.
※ 본문의 수치(응급실 방문 80퍼센트 감소, 입원 기간 2.5일 단축, 재입원율 3분의 2 감소, C형 간염 완치율 80퍼센트 이상, 메디케이드 수가 인정 시점)는 모두 원 기사에 근거한 것으로, 별도의 독립 검증은 거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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