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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적화라는 이름의 유혹
땀이 흥건한 요가원에서 강사가 나지막이 말합니다. "호흡을 최적화하십시오." 얼핏 자연스럽게 들리는 이 한마디는 사실 수천 년 전통을 지닌 요가 수련에 비교적 최근에 끼어든 낯선 손님입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에 실린 구루 마다반(Guru Madhavan)의 기고문은 바로 이 장면에서 출발해, 현대인이 자신의 몸을 하나의 정밀기계처럼 여기게 된 사고방식의 뿌리를 되짚습니다.
운동량과 수면 시간, 섭취 칼로리를 숫자로 관리하고 웨어러블 기기로 심박과 혈당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일은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몸을 정교하게 조율하면 언제까지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은, 건강과 노화에 대한 관심이 높은 시니어 세대를 겨냥한 각종 항노화 제품과 건강 정보의 홍수 속에서 더욱 힘을 얻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몸을 기계로 본 400년의 역사
기고문에 따르면 이러한 발상의 뿌리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국의 의학자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는 1628년 저서에서 심장을 펌프에, 혈액 순환을 하나의 순환 고리에 비유하며 신체를 기계로 이해하는 관점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어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동물의 몸을 자동인형(automata)에 견주었고,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역학 법칙은 뼈와 인대의 움직임조차 수학 공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발상에 힘을 실었습니다. 18세기 프랑스의 의사 라 메트리(Julien Offray de La Mettrie)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사고와 감정도 물질의 작용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으며, 20세기 초 프레더릭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의 '과학적 관리법'은 공장 노동자의 생산성 관리 기법을 인간의 몸 전반으로 확장시켰습니다. 이 같은 환원주의적 접근은 인류에게 방대한 과학적 지식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상업적으로도 적지 않은 이익을 가져다주었기에 그 한계를 간과하는 경향을 낳았다고 기고문은 짚습니다.
다만 기고문은 이러한 기계론적 은유가 막힌 동맥을 치료하거나 손상된 관절을 교체하는 것처럼 특정한 의료 상황에서는 유용할 수 있어도, 삶 전체를 이끄는 근본 원리로 삼기에는 위험하다고 지적합니다.
진화의학의 선구자인 랜돌프 네스(Randolph Nesse)는 이러한 착각을 암묵적 창조론(tacit creationism)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 몸이 마치 정밀한 설계도에 따라 오차 없이 제작된 것처럼 여기지만, 실제로는 오랜 진화 과정에서 쌓인 '타협'의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후두로 가는 신경(recurrent laryngeal nerve)이 굳이 가슴까지 내려갔다가 대동맥을 돌아 다시 올라오는 비효율적인 경로를 갖게 된 것도, 시신경이 망막을 빠져나가는 자리에는 광수용체가 없어 이른바 맹점이 생기는 것도, 아기의 머리와 어깨가 좁은 산도를 지나야 하는 출산의 고통도 모두 그러한 진화적 타협의 흔적이라는 설명입니다. 장내 미생물군 유전체(마이크로바이옴) 역시 신경계·면역계와 긴밀히 신호를 주고받는데,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이 신호 체계를 교란하면 가라앉아야 할 염증 반응이 오히려 길게 이어지는 사례도 몸이 지닌 복잡한 연결망의 한 단면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정작 요가 수련이 뿌리를 둔 고대 인도 철학(상키야 철학)은 몸과 마음이라는 물질적 영역과 이를 지켜보는 순수한 의식을 구분하며, 인간을 단순한 신체적 과정으로 환원하는 것에 오히려 저항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결과를 향해 몸을 다그치기보다 관찰과 깨달음 그 자체를 소중히 여겨온 전통인 셈입니다.
시니어에게 필요한 것은 균형입니다
이러한 지적은 시니어 세대에게 특별한 울림을 줍니다. 나이가 들며 관절이 예전 같지 않고 각종 건강 지표가 젊은 시절과 달라졌다고 해서, 이를 곧바로 '고장'이나 '실패'로 단정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오랜 세월 함께해 온 몸이 지나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 있습니다.
일부 항노화 제품과 극단적인 건강관리법이 '젊음의 회복'과 '완벽한 최적화'를 앞세워 시니어 소비자를 파고드는 상황에서, 이러한 기계론적 환상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태도는 불필요한 불안과 과소비, 때로는 무리한 운동으로 인한 부상으로까지 이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현대 의학이 제공하는 정밀한 진단과 치료의 혜택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기적인 건강검진과 전문의의 진료는 여전히 중요한 삶의 안전장치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숫자만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오랜 경험과 삶의 지혜를 쌓아 온 시니어 자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몸을 부품의 집합이 아닌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존중하는 태도, 그리고 완벽한 최적화보다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에 차분히 귀 기울이는 절제된 균형 감각이야말로, 오랜 세월 몸과 마음을 함께 다스려 온 시니어 세대가 오히려 젊은 세대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지혜일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몸에 대한 겸허한 이해와 현대 의학이 제공하는 합리적인 도움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라 하겠습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2018년 이후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은 한 언론인이 있습니다. 스페인 일간지 엘파이스(El País)가 지난 8월 23일자 오피니언면에 실은 이 칼럼니스트의 카라카스 방문기는, 재난과 궁핍이 뒤섞인 나라의 풍경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그런데 그 풍경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무너진 건물도, 텅 빈 상점도 아니었습니다. 거리를 메운 얼굴 대부분이 백발의 시니어였다는 사실입니다. 청년이 떠난 자리를 시니어가 지키고 있는 나라, 베네수엘라의 오늘은 우리에게도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닙니다.
지진이 드러낸 나라의 민낯
지난 6월 24일 저녁, 베네수엘라 서북부 해안 지역에서는 규모 7.2와 7.5의 지진이 30여 초 간격으로 잇달아 발생했습니다. 수도 카라카스와 인근 라구아이라(La Guaira) 일대가 특히 큰 피해를 입어 다수의 건물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국제 구호기구와 외신 집계에 따르면 8월 말 현재 사망자는 6,500명을 넘어선 것으로 파악되며, 참사 발생 두 달이 다 되도록 잔해 속에서 실종자를 찾는 수색 작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가 전한 라구아이라의 풍경은 참혹합니다. 해수욕장은 텅 비었고, 무너진 건물 주변에는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재난은 이미 취약했던 일상 위에 겹쳐졌습니다. 수도 한복판에서조차 수돗물은 일주일에 두 번만 공급되고, 정전은 예고 없이 되풀이됩니다. 공식 통화는 볼리바르이지만 2019년 이후 사실상 달러 경제가 자리를 잡아, 상점 가격표는 대부분 달러로 매겨져 있습니다. 거스름돈으로 줄 동전이 없어 승객이 요금을 웃돈 채로 내는 대중교통 풍경도 이제는 낯설지 않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인구 보너스를 삼켜버린 이주의 물결
낡은 미니버스에 오른 칼럼니스트는 승객 대다수가 시니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대중적인 술집에서도, 도심 거리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13년 동안 베네수엘라는 지도자의 사망과 권위주의 체제의 공고화, 초인플레이션, 대규모 난민 발생, 만성적 정전과 식량난을 차례로 겪어 왔습니다. 여기에 더해 올해 1월 3일에는 미국의 군사작전으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부부가 나포되어 국외로 이송되고, 델시 로드리게스 부통령이 임시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이 작전의 국제법적 정당성을 둘러싸고는 지지와 비판이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어, 논쟁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입니다.
이러한 연쇄적 위기 속에서 800만 명이 넘는 국민이, 그것도 대부분 청장년층이 해외로 떠났습니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는 인구 배당(Demographic Dividend), 즉 두터운 생산연령인구가 경제 성장의 동력이 되는 인구 구조상의 이점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노동 연령대가 통째로 빠져나가면서, 아이들은 부모의 보살핌을 잃었고 시니어들은 곁을 지켜 줄 자녀를 잃었습니다. 빈부 격차 역시 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카라카스 일부 지역에서는 차이 라테 한 잔이 7달러(약 9,700원)에 팔리는 반면, 상당수 국민의 월수입은 최대 50달러(약 6만 9,000원)에 그친다고 칼럼니스트는 전합니다. (환율은 2026년 8월 하순 시장환율인 1달러=약 1,380원을 기준으로 환산하였습니다.)
베네수엘라의 몰락은 전쟁에 가까운 정치적 격변과 극단적 실정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저출산이 근본 원인인 한국의 고령화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지적은 타당합니다. 그러나 두 나라가 공유하는 본질은 같습니다. 생산연령인구가 어떤 이유로든 빠르게 줄어들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남겨진 세대, 즉 어린이와 시니어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입니다. 베네수엘라는 그 가장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줄 뿐입니다.
한국 사회가 새겨야 할 지점은 분명합니다. 화폐 가치와 재정 건전성이 무너지면 연금과 의료보험 같은 사회안전망은 하루아침에 종잇조각이 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안정과 법치, 그리고 절제된 재정 운용이야말로 시니어의 노후와 다음 세대의 미래를 동시에 지켜내는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기는 프레임 대신, 구조적 원인을 직시하고 제도를 미리 정비하는 지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질서와 존엄을 지키는 힘
그럼에도 칼럼니스트는 카라카스 사람들에게서 다정함과 존엄을 잃지 않으려는 안간힘을 발견합니다.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시니어들의 모습에서, 그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으려는 공동체의 저력을 읽어냅니다. 이는 시니어가 단순한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위기 속에서도 공동체의 존엄을 지탱하는 사회적 자산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베네수엘라의 비극이 한국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전통적 질서와 가족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려는 보수적 지혜와, 재정·제도적 지속가능성을 냉철하게 계산하는 합리적 기준이 함께 갈 때에만, 어떤 위기 속에서도 시니어와 다음 세대가 함께 존엄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요즘 서점가에는 성공과 행복을 약속하는 자기계발서가 넘쳐납니다. 그러나 정작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좀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독일의 원로 철학자 오트프리트 회페(Otfried Höffe) 튀빙겐대 명예교수는 최근 독일 일간지 디 벨트(Die Welt)와의 인터뷰에서 바로 이 지점을 정면으로 짚었습니다. 그는 오늘날의 조언서들이 오히려 삶의 본질에서 시선을 딴 데로 돌리고 있다고 진단하며, 참된 마음의 평정(Gelassenheit)에 이르는 길은 화려한 성공 공식이 아니라 세네카와 에피쿠로스 같은 고전 철학자들의 소박한 지혜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회페 교수가 새 저서를 통해 재조명한 것은 유럽의 도덕주의자(Moralist) 전통입니다. 오늘날 이 단어는 흔히 타인에게 손가락질하며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을 연상시키지만, 그가 말하는 도덕주의자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세네카, 에피쿠로스, 라 로슈푸코, 파스칼, 니체로 이어지는 이 지적 전통은 인간의 실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겉으로 내세운 미덕 뒤에 숨은 동기까지 냉철하게 들여다본 사상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공통된 무기는 오랜 경험에서 우러난 처세의 지혜(Weltklugheit)와, 장황하지 않고 간결한 문장이었습니다.
회페 교수는 이를 오늘날의 처세서들과 뚜렷이 대비시킵니다. 현대의 자기계발서가 평범한 언어로 장황하게 조언을 늘어놓는 데 비해, 옛 도덕주의자들은 짧고 날카로운 경구로 세월이 흘러도 곱씹을 만한 지혜를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짧은 글을 선호하는 오늘날의 SNS를 반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이를 소화할 시간조차 갖지 못하는 현대인의 처지를 우려하며, 어린 시절부터 인터넷에 지나치게 노출될 경우 스스로 사고하고 호흡하는 능력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물질과 쾌락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그의 통찰은 이어집니다. 그는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자주 오해받아 왔다고 말하며,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일찍이 쾌락 그 자체를 인생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정작 에피쿠로스가 말한 좋은 삶의 조건은 작은 정원과 소박한 먹거리, 그리고 몇몇 좋은 벗이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회페 교수는 이 이치가 오늘날에도 다르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이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즉 자신과 세계에 대한 신뢰와 안도감은 가난한 가정에서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해외여행에 대한 통념에도 그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낯선 여행지의 언어나 역사를 진지하게 익히는 이가 실제로 얼마나 되는지 되물으며, 평생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고도 학술 서적과 여행자들의 기록, 방문객과의 대화만으로 세계를 이해했던 이마누엘 칸트를 진정한 세계인의 모범으로 제시했습니다. 자원과 소비가 곧 성장이자 미덕으로 여겨지는 오늘의 소비사회에 던지는 무거운 질문이라 할 만합니다.
삶의 본질을 이야기하며 그는 죽음의 문제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가 늘 떠날 채비를 갖추고 살라고 조언했던 대목을 인용하며, 기대수명이 늘고 의학이 발전했다고 해서 삶의 한가운데에 이미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오랜 통찰을 낡은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건강하던 지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일을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겪지 않았습니까. 장례를 치른 뒤 가족과 지인들이 한데 모여 음식을 나누며 슬픔 속에서도 서서히 다시 웃음을 되찾는 독일의 오랜 관습 역시, 상실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인간적인 진리를 보여준다고 그는 덧붙였습니다.
이러한 회페 교수의 통찰은 우리 시니어 세대의 삶의 경험과 맞닿아 있는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않던 시절을 통과해 온 시니어 세대는 소박한 살림 속에서도 가족과 우정, 신의를 지켜온 경험을 몸소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회페 교수가 강조한 처세의 지혜, 즉 온갖 역경 속에서도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는 능력과 다르지 않습니다. SNS를 통해 끊임없이 타인의 성취와 소비를 확인하며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에게, 오히려 시니어 세대의 이러한 삶의 태도는 배움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회페 교수의 조언을 성장과 소비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합니다. 그가 말한 절제는 자기를 억누르는 금욕이 아니라,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하기 위한 합리적 기준을 세우자는 취지에 가깝습니다. 가족의 결속과 벗과의 신의를 지키고,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하루하루를 정직하게 살아가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시대와 국경을 넘어 시니어 세대가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유산이 아닐까 합니다. 눈높이를 낮추되 삶의 본질만은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처세의 지혜일 것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흔들리는 교실, 사라진 기준
최근 여러 나라에서 학교 현장의 혼란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교권은 흔들리고, 다문화·이민 배경을 지닌 학생의 비율은 꾸준히 늘어나며, 교사와 학생, 학교와 지역사회 사이의 신뢰는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른들은 흔히 두 갈래 길에 놓이게 됩니다. 하나는 문제를 외면하거나 소극적으로만 대응하는 방임이며, 다른 하나는 학생의 처지를 지나치게 동정한 나머지 원칙 없이 감싸기만 하는 온정주의입니다.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청소년의 성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최근 독일 베를린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었습니다.
방임과 구원자 증후군 사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이 지난 8월 24일자(하이케 슈몰 기자, 베를린) 지면에서 소개한 바에 따르면, 베를린의 교육자 엔긴 차틱(Engin Çatık)은 폭력과 저성취로 악명 높던 위기 지역 학교 두 곳을 짧은 기간 안에 안정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터키계 손님노동자(Gastarbeiter, 1960년대 노동력 부족을 겪던 독일이 협정을 통해 받아들인 외국인 노동자를 이르는 말) 가정의 후손으로, 부친이 도박으로 가정을 파탄시키고 끝내 장기간 수감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홀로 네 자녀를 키워낸 어머니, 그리고 그를 믿어준 교사와 축구 감독들 덕분에 그는 어려운 환경을 딛고 교육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교장으로 부임한 차틱은 매일 아침 교문에 서서 모든 학생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이름을 기억하며 지각과 복장을 점검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쉬는 시간에 벌어지는 이른바 '목덜미 때리기' 같은 사소해 보이는 장난이 실은 서열 다툼과 맞닿아 있음을 놓치지 않고 지적했습니다. 그가 시종일관 경계한 것은 두 가지, 즉 학생을 방치하는 무관심과, 학생의 처지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원칙 없이 감싸는 이른바 '구원자 증후군(Helfersyndrom)'이었습니다. 그는 설령 베를린 학생의 70퍼센트가 최소 학업 기준에 미달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해당 보도에 인용된 발언으로 공식 통계와는 별도의 확인이 필요한 수치임을 밝혀 둡니다.
방임과 과보호, 두 극단의 함정
차틱의 사례가 시사하는 구조적 원인은 비교적 명확합니다. 청소년에게 명확한 한계와 기대치를 제시하지 않으면 소속감과 자기 존중감을 기를 기회를 잃습니다. 반대로 잘못된 행동조차 문제 삼지 않고 무조건 감싸기만 하면, 학생은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극복해 낼 동기를 갖지 못합니다. 특히 이민자·소수자 가정의 청소년일수록, 자신을 믿어주면서도 잘못은 분명히 지적해 주는 어른을 만난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훗날 극단주의 단체에 포섭될 위험도 달라진다는 것이 해당 보도의 핵심 진단입니다.
다만 이러한 변화가 한 개인의 헌신만으로 지속되기는 어렵습니다. 차틱 자신도 정서적 소진을 겪은 뒤 코칭의 도움을 받았으며, 이후 개별 학교를 넘어 교원 행정 기관으로 자리를 옮겨 교사들이 소진되지 않도록 뒷받침하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결국 애정과 훈육은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 제도적 지원 위에서 함께 작동해야 하는 두 축이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 던지는 질문
이러한 진단은 한국 사회에도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학교 폭력과 교권 침해 논란이 반복되고 다문화 가정 자녀 수가 꾸준히 늘어나는 가운데, 우리 사회 역시 원칙 없는 관용과 애정 없는 통제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시니어 세대의 역할이 새롭게 조명될 수 있습니다.
오랜 사회생활과 자녀 양육의 경험을 축적한 시니어들은 원칙을 지키면서도 애정을 표현할 줄 아는, 이른바 지원(Fördern)과 요구(Fordern)를 함께 실천할 수 있는 세대입니다. 은퇴한 교사와 전문직 종사자를 비롯한 각계 시니어들이 학교 멘토링이나 교육 봉사에 참여한다면, 이는 단순한 사회공헌 차원을 넘어 흔들리는 교육 현장에 실질적인 안정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칙 있는 신뢰가 답이다
방임은 자유가 아니며, 무조건적 포용 역시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믿어주되 잘못은 분명히 짚어 주는 어른, 그리고 그 신뢰가 흔들리지 않도록 곁을 지키는 원칙입니다. 이는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가 지켜 온 어른과 아이 사이의 위계와 책임의 질서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 질서는 일방적 통제가 아니라 합리적 기준과 상호 존중 위에서 작동해야 지속될 수 있습니다. 베를린의 한 교육자가 보여 주었듯, 원칙과 애정을 함께 실천하는 어른이 많아질 때 비로소 다음 세대는 안전하게 자랄 수 있을 것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질주하는 기술, 준비 없는 사회 — 한국 시니어 사회에 던지는 경고
기술은 앞서가고, 대비는 뒤처진다
인공지능(AI)이 몰고 올 변화의 폭과 속도를 둘러싸고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낙관론자들은 AI가 에너지와 의료, 농업 등 전 산업에 걸쳐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것이라 전망하는 반면, 신중론자들은 이 기술이 고용 시장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것이라 우려합니다. 그러나 정작 기업들은 저마다 더 빠르고 강력한 AI 모델을 내놓기 위한 경쟁에만 몰두할 뿐, 이 기술이 몰고 올 사회적 충격에 대해서는 명확한 대비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런 가운데 세계적인 기술 기업가로부터 나온 무거운 경고가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의 이례적 경고: "아무런 계획이 없다"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이자 자선사업가인 빌 게이츠는 최근 자신의 개인 웹사이트에 12페이지 분량의 에세이를 발표하며, AI가 고용과 인류의 삶에 미칠 위험성에 대해 이례적으로 강경한 어조로 경고했습니다. 그는 최상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더라도 AI 시대로의 전환이 인류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시기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진단하며, 현재 지도자와 전문가, 지역 사회 그 누구도 이 문제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는 그가 2023년 발표했던 에세이와는 확연히 다른 어조입니다. 당시 그는 AI를 인터넷과 개인용 컴퓨터(PC)의 보급에 견줄 만한 혁신으로서 기대감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이번 에세이에서도 에너지와 의료, 농업 분야에서의 AI의 순기능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전환 과정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할 경우 상황이 얼마나 악화될 수 있는지에 훨씬 더 큰 무게를 실었습니다. 그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고 단언하며 보다 강력한 제도적 규율을 촉구했습니다. 게이츠 벤처스(Gates Ventures) 측은 그가 지금 이 시점에 목소리를 낸 이유에 대해, 사회가 이 전환을 준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박함 때문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는 미국 의회 관계자들과도 이 문제를 직접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히며, 실업률이 급격히 치솟기 전인 바로 지금이 행동에 나설 기회라고 강조했습니다.(월스트리트저널, 2026년 8월 27일 자 B1면 보도)
속도의 경제, 그리고 계획의 부재
이러한 간극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기업의 생존과 성장은 경쟁사보다 빠른 기술 개발과 시장 선점에 달려 있는 반면, 그 기술이 초래할 사회적 비용을 계산하고 완충하는 일은 애초에 개별 기업의 책임 범위 밖에 놓여 있습니다. 규제와 사회 안전망은 대개 위기가 현실화된 이후에야 뒤늦게 정비되어 온 것이 역사에서 반복되어 온 패턴입니다. 문제는 AI가 초래할 노동시장 충격의 속도가 과거 산업혁명기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는 데 있습니다. 교육과 재훈련 체계가 새로운 기술 환경에 적응하는 데는 통상 수년이 걸리지만, AI 모델의 성능은 불과 몇 달 단위로 갱신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AI 개발은 국경을 넘나드는 반면, 이를 규율할 노동 정책과 사회 안전망은 여전히 개별 국가 단위에 머물러 있어 통일된 대응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준비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게이츠의 경고는 바로 이 속도의 비대칭을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경고는 한국 사회에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 중이며 노동인구 감소 압박을 받고 있는 한국은, 여기에 AI로 인한 일자리 재편까지 겹칠 경우 이중, 삼중의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특히 정년을 앞두거나 이미 정년을 지난 시니어 세대는 재고용 시장에서부터 이미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AI발 고용 충격이 본격화된다면 이러한 어려움은 한층 가중될 소지가 큽니다.
기술의 진보 자체를 막을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될 것입니다. 다만 그 진보가 사회 구성원 다수의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질서 있게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시니어 세대를 포함한 중장년 노동자에 대한 선제적 직무 전환 지원과 사회보험 사각지대 해소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이러한 균형 위에서만 전통적인 노동 질서와 세대 간 신뢰라는 사회의 안전판을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빌 게이츠의 경고가 일회성 우려에 그치지 않고, 한국 사회가 한발 앞서 준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증상을 검색하고 스스로 진단
손녀가 “나 우울증이야”라고 말할 때
미국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2026년 8월 25일 자 오피니언면에 심리치료 전문용어(therapy-speak)의 확산을 다룬 정신과 임상의의 글을 실었습니다. 필자가 진료 현장에서 관찰한 변화는 이렇습니다. 과거의 젊은 환자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듣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상담실을 찾는 10대 소녀와 젊은 여성들은 자기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ADHD), 강박장애, 불안장애, 우울증 같은 병명을 먼저 내놓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그 병명을 얻은 경로는 병원이 아니었습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증상을 검색하고, 짧은 영상 플랫폼에서 자가 진단 퀴즈를 풀고, 친구들과 서로의 상태를 대조해 본 결과였습니다. 학교 성적이나 가정 형편, 성향과도 무관하게 이 흐름은 폭넓게 퍼져 있다고 필자는 적었습니다.
왜 병명이 위로가 되는가
이 대목에서 임상의의 관찰은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젊은 환자들이 말하는 진단명은 반드시 의학적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설명하기 어려운 개인적 고통을 담아 둘 그릇, 즉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서사를 찾으려는 대처 기제에 가깝다는 분석입니다.
필자가 소개한 사례들은 구체적입니다. 어떤 소녀는 우울증이라고 말해야 어른이 자신을 신경 써 줄 것 같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다른 소녀는 ADHD라는 이름표를 통해 활발한 온라인 공동체에 소속되면서 외로움을 덜었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젊은 여성들은 가까운 사람을 향한 분노와 그 감정에 대한 죄책감이라는 진짜 원인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자기 뇌의 결함 탓으로 돌리는 편이 덜 무서웠다고 합니다. 필자는 이를 두고, 심리치료 전문용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정리했습니다.
물론 자가 진단이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도 있었다고 필자는 덧붙였습니다. 다만 상당수는 불편한 감정과 사회적 인정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 타협한 결과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언어는 밝히기도 하고 가리기도 합니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이 현상을 나약함이나 자기 탐닉으로 몰아붙이는 태도의 위험입니다. 필자는 정신의학의 진단 범주가 다른 의학 분야보다 유연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한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병명을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겪는 사람은 둘도 없기에, 임상에서는 병명보다 사람을 먼저 이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려도 분명히 밝힙니다.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진단 용어를 앞세우면, 곁에 있는 가족과 친구는 자신이 도울 능력이 없다고 느끼고 전문가에게 맡긴 채 물러서게 됩니다. 젊은이가 스스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도 중간에 끊길 수 있습니다. 필자가 인용한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말처럼, 어떤 이름은 사물의 한 면을 비추면서 다른 면을 가려 버립니다.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
이 이야기는 결코 남의 나라 사정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짧은 영상과 검색 몇 번으로 자신의 상태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손주 세대가 식탁에서 낯선 심리학 용어를 꺼낼 때, 시니어 세대가 보이는 반응은 대체로 두 갈래입니다. 큰일이 났다며 지나치게 놀라거나, 다 괜찮으니 마음 굳게 먹으라며 서둘러 덮으려 하는 것입니다.
필자의 지적대로 두 반응 모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과잉 반응은 문제의 초점을 아이의 고통에서 어른의 두려움으로 옮겨 놓습니다. 성급한 안심시키기는 아이의 고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신호로 읽힙니다.
대신 필자가 권하는 것은 작은 번역의 행동입니다. ADHD라고 말하는 아이는 머릿속이 산만하고 감당하기 벅차며 자신이 엉망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말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불안하다는 말은 마음이 쓰이고 자신이 없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우울증이라는 단어에 놀라기 전에, 그 아이가 왜 절망스럽고 외로운지를 먼저 헤아려 보라는 것입니다. 상대를 반박하기 위한 되묻기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한 되묻기입니다.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심각하게
저는 이 대목에서 시니어 세대가 가진 자산을 봅니다. 우리 세대는 마음의 고통을 말할 언어가 부족했던 시절을 통과해 왔습니다. 참는 것이 미덕이었고, 병원 문턱을 넘는 일은 흠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결핍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우리는 몸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요즘 젊은 세대가 감정을 말한다는 사실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다만 이름표가 성장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진단은 출발선이지 종착지가 아닙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설명할 언어를 갖는 것과, 그 언어 뒤에 숨어 책임과 관계로부터 물러서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지원과 요구는 함께 가야 합니다. 아이의 고통을 진지하게 듣되,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는 사실도 조용히 일러 주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그 균형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오랜 세월을 살아 낸 시니어입니다. 유행어의 표면에 흔들리지 않고, 그 아래 흐르는 진짜 감정을 알아보는 눈은 경험에서 나옵니다. 손주가 낯선 용어를 꺼낼 때 놀라지도 무시하지도 않고 조용히 되묻는 그 한마디가, 어쩌면 어떤 처방보다 먼저 필요한 첫걸음일 것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프랑스 일간지가 들여다본 서울의 ‘펫팸’ 현상과 그 이면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Le Figaro)가 2026년 8월 21일 자 지면에서 서울을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아시아의 열풍’ 기획 시리즈의 두 번째 편으로, 서울 특파원이 강남과 청담동, 코엑스 전시장을 직접 취재해 쓴 기사입니다. 제목은 도발적입니다. 아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반려견이 채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숫자가 먼저 말합니다
기사가 인용한 가장 상징적인 지표는 유모차입니다. 국내 전자상거래 플랫폼 지마켓 집계를 근거로, 2023년 반려견용 유모차 판매량이 유아용 유모차 판매량을 넘어섰다고 전했습니다. 같은 해 서울의 합계출산율은 가임 여성 1명당 0.55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을 기록했습니다. 인구를 현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2.1명의 4분의 1에 불과한 수치입니다.
시장의 규모도 함께 소개했습니다. 반려동물 관련 산업, 이른바 펫 이코노미(pet economy)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추산 약 8조 원(약 53억 달러)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반려인 수는 인구의 약 30퍼센트에 해당하는 1,500만 명으로, 10년이 채 안 되는 사이 두 배 가까이 늘었다고 기사는 전합니다. 정치권이 이들을 하나의 유권자 집단으로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현지 동물보호단체 관계자의 관측도 함께 실렸습니다.
취재 현장에서 확인된 풍경도 구체적입니다. 반려견에게 사람이 먹는 이탈리아 요리를 내놓는 식당, 개 이름을 새긴 금도금 명판이 달린 80만 원(약 474유로)짜리 고급 유모차, 백내장 예방용이라며 판매되는 30만 원(약 200유로) 상당의 반려견 선글라스, 운구와 입관식과 화장까지 갖춘 반려동물 장례 서비스가 소개되었습니다. 항공사가 반려동물 전용 좌석을 시범 운영한 사례도 언급되었습니다.
한 세대 만에 뒤집힌 인식
기사가 주목한 것은 변화의 속도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개고기를 소비하던 사회가 반려견을 가족 구성원으로 대우하는 사회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2024년 제정된 개 식용 종식 특별법에 따라 2027년 2월 7일부터 식용 목적의 사육과 도살, 유통이 전면 금지됩니다. 종로 일대 전통 음식점들이 이미 손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현장 관찰도 실렸습니다.
이러한 급격한 전환을 프랑스 기자는 흥미로운 사회 현상으로 보면서도, 그 배경에 놓인 구조적 압력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왜 아이 대신 반려견인가
기사가 지목한 원인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주거 비용입니다. 2017년부터 2021년 사이 서울 부동산 가격이 두 배로 뛰었고 금리마저 오르면서, 아파트 구입이 사실상 도달 불가능한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택 마련은 여전히 결혼의 사실상 전제 조건으로 작동합니다. 진입 장벽이 결합 자체를 가로막는 구조입니다.
둘째, 교육 경쟁입니다. 유치원 단계부터 명문대 입학 경쟁이 시작되고, 야간 학원 수업이 가계를 압박합니다. 기사는 사교육비가 10년 만에 60퍼센트 급증해 연간 200억 달러(약 27조 6,000억 원)를 넘어섰다고 전했습니다.
셋째, 정서적 공백입니다. 취재에 응한 30대 프리랜서는 “개는 새로운 아기”라고 말하며 서울에서 아이를 키울 여력이 없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또 다른 응답자는 “아무도 당신의 반려견이 어느 대학에 다니는지 묻지 않는다”는 말로 압박 없는 관계의 매력을 요약했습니다.
다만 기사는 반려 문화 역시 과시 경쟁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대형견은 넓은 집이 필요하기에 부의 상징이 되고, 반려동물은 인스타그램에서 새로운 전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니어 세대가 눈여겨볼 대목
이 기사를 남의 이야기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세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우선 부양 구조의 문제입니다. 출산율 붕괴는 20년 뒤 연금과 건강보험의 지속 가능성 문제로 되돌아옵니다. 지금 청년이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를 청년의 가치관 탓으로만 돌리면 해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주거와 교육이라는 두 개의 벽을 낮추는 일이 먼저입니다.
다음으로 시니어 자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반려동물은 이미 많은 시니어 가정에서 정서적 동반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반려동물의 기대 수명, 병원비, 돌봄 부담을 충분히 계산하지 않은 채 입양했다가 어려움을 겪는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애정만으로는 감당되지 않는 영역이 분명히 있습니다.
끝으로 세대 간 이해의 문제입니다. 기사에 등장한 30대 카페 주인은 반려견을 아끼면서도 “동물을 사람처럼 대해서는 안 되며, 반려견이 아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두 아이를 갖기를 꿈꾼다고 했습니다. 청년 세대를 하나의 덩어리로 재단하는 일이 얼마나 부정확한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맺으며
가족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 자체를 개탄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형태가 달라졌다고 해서 가족이 감당해 온 기능까지 사라져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세대를 잇고, 서로를 돌보며, 사회를 지탱해 온 그 기능은 여전히 누군가가 맡아야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청년을 나무라는 목소리가 아니라, 아이를 낳고 기르는 선택이 무모한 모험이 되지 않도록 조건을 정비하는 일입니다. 지원할 것은 확실히 지원하고, 요구할 것은 분명히 요구하는 균형입니다. 그것이 오랜 세월 가정을 지켜 온 시니어 세대가 지금 사회에 건넬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조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 2026년 8월 21일 자 오피니언 지면에는 영국 노동조합회의(TUC) 폴 노박(Paul Nowak) 사무총장의 기고문이 실렸습니다. 영국 정부가 추진 중인 착취적 제로 시간 계약(zero-hours contracts) 금지 법안을 두고 기업 로비 단체들이 내세운 비용 추산이 부풀려졌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제로 시간 계약이란 근무 시간을 미리 정하지 않고, 사용자가 필요할 때마다 호출해 일을 시키는 고용 형태를 말합니다. 계약은 존재하지만 보장된 근무 시간은 없습니다.
쟁점의 실체
논쟁의 발단은 같은 신문이 8월 12일 자로 보도한 기사였습니다. 제로 시간 계약을 규제할 경우 영국 기업이 연간 최대 50억 파운드(약 9조 2,500억 원)의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노박 사무총장은 이 수치가 매우 넓은 추정 구간의 최상단 값일 뿐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같은 추정에서 가장 낮은 금액은 3억 5,000만 파운드(약 6,475억 원)로, 두 수치의 차이는 열네 배에 이릅니다.
더 주목할 대목은 최상단 수치가 성립하는 전제 조건입니다. 그에 따르면 50억 파운드라는 금액에 도달하려면 고용주들이 새 법을 사실상 무시하고 임박한 근무 취소를 계속하며, 그 결과 노동자에게 29억 파운드(약 5조 3,650억 원)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상황을 가정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법을 지키기만 해도 추산 비용의 절반 가까이는 애초에 발생하지 않습니다. 위법을 전제로 산출한 비용을 규제 반대의 근거로 삼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는 지적입니다.
누가 비용을 부담하고 있는가
노박 사무총장은 불안정 노동자 세 명 중 한 명이 근무 취소와 시간 단축 등으로 연평균 5,000파운드(약 925만 원) 이상의 소득 손실을 겪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금액은 통계 수치에 그치지 않습니다. 주거를 유지할 수 있는지, 난방을 켤 수 있는지, 자녀에게 따뜻한 식사를 차릴 수 있는지를 가르는 실질적 경계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기업이 부담할 비용은 최대치로 부각하면서, 불안정 고용을 보전하기 위해 복지제도(Universal Credit)를 통해 납세자가 이미 지출하고 있는 비용은 계산에서 빠져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수십 년 전 최저임금 도입 당시 동원된 논리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입니다.
균형 잡힌 시각을 위하여
다만 이 기고문은 노동조합 대표의 의견이며, 반대편의 주장 역시 함께 살펴야 공정합니다. 사용자 단체들은 호출형 근로가 계절적 수요 변동이 큰 소매·요식·물류 업종의 현실적 대응 수단이며, 규제가 지나치면 채용 자체가 줄어 가장 약한 노동자가 먼저 배제된다고 반박해 왔습니다. 실제로 유연 근무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학생이나 은퇴 후 소득 보완을 원하는 계층도 존재합니다. 문제는 유연성 자체가 아니라, 그 유연성의 위험을 누가 떠안느냐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주는 시사점
이 논쟁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노동시장에도 주 15시간 미만 초단시간 근로가 상당한 규모로 존재하며, 그 상당 부분을 시니어 세대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공공형 일자리, 시설 관리, 경비, 배송 보조, 플랫폼 호출 노동에 이르기까지 근무 일정이 사후에 통보되거나 갑작스레 취소되는 사례는 드물지 않습니다. 초단시간 근로는 주휴수당과 퇴직급여 적용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아, 근로시간이 조금만 조정되어도 소득과 사회보험 자격이 함께 흔들립니다.
시니어 노동자에게 예측 가능성은 젊은 세대보다 더 절실합니다. 병원 진료 일정, 손자녀 돌봄, 연금 수급 시기와의 조율이 모두 근무 일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질서와 안정은 보수적 가치의 핵심입니다. 계약이 지켜지고 약속한 일정이 통보 없이 뒤집히지 않는 것, 이는 규제가 아니라 신뢰의 기본입니다. 기업의 활력을 위축시키는 과잉 입법은 경계해야 하지만, 지원(Fördern)과 요구(Fordern)는 함께 가야 합니다. 유연성을 허용하되 최소한의 사전 통보 기간과 근무 취소 시 보상 기준을 명확히 세우는 것, 그리고 그 기준을 예외 없이 적용하는 것이 우리가 취할 합리적 균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풀려진 숫자로 벌이는 공방보다, 검증된 자료를 놓고 벌이는 토론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사회 역시 초단시간 근로 실태에 대한 정확한 통계부터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음주 문제를 겪는 미국인의 비율이 최근 5년 사이 뚜렷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 약물남용 및 정신건강서비스청(SAMHSA)의 최신 전국 약물 사용 및 건강 조사에 따르면, 12세 이상 미국인 가운데 알코올 사용 장애(AUD·Alcohol Use Disorder) 진단 기준에 해당하는 비율은 2021년 10.6%에서 2025년 8.9%로 낮아졌습니다. 인원으로는 약 300만 명이 감소한 규모입니다.
다만 이 수치를 해석할 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해당 조사의 방법론이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변경돼 2021년 이전 자료와 직접 비교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컬럼비아대학교와 미시간대학교 등의 장기 연구, 갤럽 조사 등 다른 자료에서도 미국인의 음주 감소 현상이 확인되고 있어 단순한 통계상의 착시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입니다.
알코올 사용 장애는 단순히 술을 많이 마시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건강이나 직장생활, 가족관계 등에 문제가 발생하는데도 음주를 계속하거나 스스로 음주량을 통제하기 어려운 상태를 말합니다. 현대 의학에서는 이를 ‘술을 끊을 수 있는 사람’과 ‘끊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누기보다 연속적인 스펙트럼으로 이해합니다.
임상적으로는 갈망, 계획보다 많은 음주, 음주를 줄이거나 중단하려는 반복적인 실패 등 11개 증상을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해당 증상이 2~3개이면 경증, 4~5개이면 중등도, 6개 이상이면 중증 알코올 사용 장애로 분류합니다.
이번 감소에서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경증 장애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감소입니다. 전체 문제 음주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경증 집단에서 감소 폭이 크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중등도와 중증 장애의 감소 폭은 상대적으로 작았습니다. 전문가들이 이번 변화를 공중보건 측면에서 의미 있는 성과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왜 미국인들은 술을 덜 마시게 되었을까요. 전문가들은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음주를 당연한 사회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던 문화가 약해진 것이 중요한 배경으로 거론됩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술이 암을 비롯한 여러 질환의 위험을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도 늘었습니다. 술 대신 운동이나 취미, 온라인 활동 등 다른 형태의 여가를 선택하는 문화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비만 치료제로 널리 알려진 세마글루타이드(semaglutide) 계열 약물이 음주 욕구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연구도 발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알코올 사용 장애 감소를 이 약물의 영향으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약물의 효과가 상대적으로 중증 음주자에게서 더 크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진 반면, 이번 통계에서는 오히려 중증 장애의 감소 폭이 가장 작았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가 미국 정부의 공중보건 정책 변화와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최근 음주 관련 식생활 지침에서는 과거 남성 하루 2잔, 여성 하루 1잔이라는 구체적인 기준 대신 보다 포괄적인 ‘음주 제한’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면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국민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알코올 관련 공중보건 조직과 연구 인력의 축소도 변수입니다. 개인과 사회의 음주 습관이 개선되고 있다고 해서 정부 차원의 감시와 예방 체계까지 약화시켜도 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추세가 지속되도록 정확한 통계를 축적하고 위험 음주자를 조기에 발견하며, 중증 환자에게는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는 체계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술은 오랫동안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의 중요한 매개였지만, 건강수명이 길어진 시대에는 음주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시니어에게는 젊은 시절의 음주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현명한 선택은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신체의 알코올 처리 능력과 약물에 대한 반응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음주량을 자연스럽게 줄이는 것은 건강관리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미국의 변화가 보여주는 것은 ‘절주’가 반드시 강제적인 금욕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건강에 관한 정보가 축적되고 사회적 분위기가 변하며 술을 대신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이 늘어나면 개인의 선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정책 역시 이러한 자발적인 변화를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설계될 필요가 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 말할 필요도 없고, 술을 즐기는 사람을 문제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음주가 건강과 가족관계,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스스로 돌아보는 일입니다. 특히 음주를 줄이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거나, 건강상의 문제가 생겼는데도 계속 술을 찾는다면 단순한 ‘절제력 부족’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의료적 도움이 필요한 신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나타난 음주 감소세가 일시적인 현상인지 장기적인 사회 변화인지는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합니다. 그러나 건강을 위해 술을 덜 마시려는 선택이 개인의 결심을 넘어 하나의 사회적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술을 얼마나 마실 것인가 역시 결국 그 목표를 향해 자신의 생활습관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절주는 거창한 결심이라기보다 앞으로의 삶을 조금 더 건강하게 설계하는 작은 선택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
젊었을 때에는 눈앞의 일과 앞으로 이루어야 할 목표가 중요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이미 지나온 시간과 그 안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놓쳤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롭 모스(Robb Moss)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더 벤드 인 더 리버(The Bend in the River)』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특별한 성공을 거둔 유명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온 다섯 친구의 인생을 수십 년에 걸쳐 다시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오히려 깊은 울림을 줍니다.
모스 감독은 1978년 단편영화 『리버독스(Riverdogs)』에서 당시 20대였던 자신과 친구들의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이들은 콜로라도강에서 래프팅 가이드로 일하며 젊음과 자유를 만끽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2003년, 감독은 다시 카메라를 들고 이들을 찾아 『더 세임 리버 트와이스(The Same River Twice)』를 만들었습니다. 젊음의 한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중년이 되어 가족과 직업, 책임과 관계의 무게를 짊어진 모습을 기록한 작품이었습니다.
이번 영화는 다시 약 20년의 시간이 흐른 뒤 시작됩니다. 대니 실버(Danny Silver), 짐 티케너(Jim Tickenor), 캐시 쇼(Cathy Shaw), 제프 골든(Jeff Golden), 해리 와서만(Harry Wasserman) 등 다섯 친구는 어느덧 70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감독은 과거 영화의 장면과 현재의 대화를 교차시키면서 시간이 한 사람의 얼굴과 몸뿐 아니라 생각과 가치관까지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줍니다.
젊은 시절의 화면 속 인물들은 강변을 자유롭게 누비며 자신들의 미래가 얼마나 길게 펼쳐져 있는지 의식하지 않는 듯합니다. 중년의 모습에서는 가족과 직업에 대한 고민이 나타나고, 70대가 된 현재에는 지나온 삶을 평가하는 시선이 두드러집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서로 다른 시기의 모습을 한 화면에서 바라보게 되면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는 젊었을 때 정말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살았던 것일까요.
영화 속 친구들은 자신들이 젊었을 당시의 모습을 다시 보면서 그때는 자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몰랐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시에는 나이 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알지 못했다는 고백도 이어집니다. 젊을 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가운데 상당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가 작아지고, 반대로 별것 아니라고 여겼던 관계와 순간들이 인생에서 훨씬 중요한 것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이 듦이 가져오는 가장 현실적인 지혜인지도 모릅니다. 젊은 사람에게는 선택할 시간이 많기 때문에 하나의 실패나 후회가 인생 전체를 결정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70대에 이르면 인생은 이미 상당 부분 현실이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했는지뿐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도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일부가 됩니다. 영화 속 한 인물의 말처럼, 이 시점에서는 삶이 제공한 것을 이미 했거나 하지 않은 것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후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유머가 있고 인간적인 따뜻함이 있습니다. 이들은 유명 인사도, 역사책에 기록될 정도의 특별한 인물도 아닙니다. 일부는 공직에 도전했고, 각자의 삶에서 실패와 갈등을 경험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평범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평범함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는 관객 자신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특히 과거의 인간관계와 선택을 다시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세월의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당시에는 자신에게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행동도 시간이 지나면 다르게 보일 수 있고, 반대로 그때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인생에서 오래 남는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과거의 장면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벤드 인 더 리버』가 시니어에게 특히 의미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시니어 세대는 이미 수십 년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젊은 세대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시간의 변화를 알고 있습니다. 경제적 성공도, 사회적 지위도, 경쟁에서의 승리도 시간이 지나면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오래 남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 가족과의 기억, 자신이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그리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영화는 거창한 성공의 공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다시 바라보는 모습을 통해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 지나온 시간보다 짧아졌을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되는가, 그리고 그때까지도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계속 얻는 과정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알게 되면서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젊었을 때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더 벤드 인 더 리버』는 다섯 친구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합니다. 젊은 날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달라졌는지, 한때 중요했던 것들은 지금도 중요한지, 그리고 정작 소중했던 것들을 우리는 얼마나 잘 지켜왔는지를 묻게 합니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갑니다. 그러나 그 세월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마지막에 남는 삶의 표정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는 것만으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지금까지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남은 시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아직 가능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단순히 젊음을 잃어가는 일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살아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관점과 분별력을 갖게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나온 수많은 경험 속에서 천천히 쌓입니다.
『더 벤드 인 더 리버』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강물처럼 흘러온 한 사람의 인생입니다. 강물의 방향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굽이를 돌아선 뒤 어디를 바라볼 것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후반부에 필요한 것은 지나온 길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그 길에서 얻은 지혜를 바탕으로 남은 길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일 것입니다.
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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