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By 김형래NewsNews Com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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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episodes

  • [아침마다 지혜 #484] 코딩은 여전히 유효한가 — 라즈베리 파이 창업자가 던진 질문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적 노동을 상당 부분 대체하리라는 전망이 확산되면서, 정작 다음 세대에게 프로그래밍을 가르칠 필요가 있느냐는 회의론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짧은 문장으로 지시만 내리면 인공지능이 알아서 코드를 작성해 주는 이른바 바이브 코딩(vibe coding)이 확산되면서 나온 주장입니다. 그러나 정작 초저가 컴퓨터 한 대로 전 세계 수천만 어린이에게 프로그래밍의 문을 열어준 당사자는 이러한 통념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영국의 신용카드 크기 컴퓨터 라즈베리 파이(Raspberry Pi)를 만든 에벤 업턴(Eben Upton, 48세) 창업자가 그 주인공입니다.

    코딩은 여전히 유효한가

    업턴은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코딩은 인공지능 시대에도 여전히 현대적 형태의 문해력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는 컴퓨터에 단순히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좁은 의미의 코딩과, 문제를 계산 가능한 형태로 재구성하는 사고 방식으로서의 프로그래밍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를 익히지 못한 사람은 인공지능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이를 설계한 기업이나 정부에 무의식적으로 좌우될 위험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는 프로그램을 하지 않으면 프로그램을 당하게 된다는 소프트웨어 업계의 오랜 경구를 재차 인용했습니다.

    업턴이 2008년 동료들과 함께 설립한 비영리 자선단체 라즈베리 파이 재단은 지난해 말까지 총 1억 1,200만 파운드(약 2,184억원)를 청소년 코딩 교육에 투입했습니다. 그 결과 230만 명의 학생이 코딩 클럽을 거쳤고, 25만 명 이상의 교사가 관련 훈련을 받았습니다. 최초 25파운드(약 4만9천원)에 불과했던 이 저가 컴퓨터가 촉발한 교육 운동은, 지난해 케임브리지 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지원자를 1,759명까지 끌어올려 합격률이 7%에 그치는 최고 인기 학과로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인공지능 버블에 대한 냉철한 시각

    흥미로운 대목은 정작 첨단 기술 기업을 이끄는 업턴 자신이 실리콘밸리발 인공지능 낙관론에는 냉담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초지능 도래를 기정사실처럼 말하는 미국 빅테크 경영진들을 향해 다소 구세주적인 분위기를 풍긴다고 꼬집었습니다. 공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인공지능의 생산성 향상 곡선은 무한히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에서 정체되는 S자형 곡선, 이른바 시그모이드(sigmoid) 곡선을 그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그의 진단입니다. 인간의 지능이 인공지능이 결코 넘어서지 못할 점근선(asymptote)으로 남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업턴은 오히려 기술이 정치 권력과 다시 결합하는 현상을 더 큰 위협으로 지목했습니다. 통제 불능 인공지능이 인류를 멸종시킬 확률을 뜻하는 이른바 파멸 확률(p(doom)) 논쟁에 대해, 그는 그 실체는 폭주하는 기계가 아니라 아마도 러시아와 같은 권위주의 국가일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산업혁명 이래 영국이 세계에 남긴 유산은 상업과 정치 권력을 분리해 생활 수준을 끌어올린 데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실제로 그는 초기 중국에 의존하던 생산 라인을 로봇 공학을 활용해 영국 웨일스 지역으로 되돌리는 리쇼어링(reshoring)에 성공하며, 대량 생산은 반드시 저임금 국가에 맡겨야 한다는 통념도 함께 깨뜨렸습니다.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

    이러한 사례는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손자녀 세대의 교육 방향을 고민하는 시니어라면,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리라는 막연한 기대보다 사고력과 문해력의 기초를 다지는 교육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원칙을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울러 제조업 기반을 해외로 넘긴 뒤 좀처럼 되돌리지 못하는 우리 산업 현실에서, 로봇 공학을 통한 생산 기지의 국내 복귀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해 볼 대목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기술이 소수 권력에 집중될 때 사회 질서와 안전이 흔들릴 수 있다는 그의 경고는, 오랜 세월 격변을 지켜봐 온 시니어 세대의 경험적 지혜와도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화려한 장밋빛 전망과 근거 없는 공포 모두를 경계하며 냉철한 사실에 기반해 판단하려는 업턴의 태도는, 급변하는 기술 환경 속에서도 지켜야 할 기본과 원칙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거대한 기술 물결 앞에서 무비판적으로 편승하기보다, 검증된 원칙과 기초 역량을 굳건히 지키며 합리적 균형을 찾아가는 자세야말로 오늘의 시니어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지혜일 것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17 min
  • [아침마다 지혜 #483] 화려한 거리에 서서(Easy Street): 미국의 새로운 부유층 '에브리웨어 밀리어네어'

    자수성가한 소상공인과 자영업 창업가들이 주도하는 미국 부의 지형 변화

    미국에서 부(富)의 상징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부유층이라 하면 뉴욕 월스트리트의 금융인이나 실리콘밸리의 빅테크 창업자를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미국 경제 매체들이 잇달아 조명하고 있는 새로운 부유층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등장했습니다. 대도시가 아니라 미국 전역의 중소도시와 외곽 지역에서, 화려한 학력이나 거대한 벤처 자금 없이 지역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실물 서비스를 제공하며 견고한 자산을 일군 소상공인과 자영업 창업가들입니다. 미국 언론은 이들을 '에브리웨어 밀리어네어(Everywhere Millionaire)'라 부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밀리어네어는 순자산 100만 달러(약 13억 4,000만 원, 2026년 9월 7일자 원/달러 환율 약 1,338원 적용) 이상을 보유한 사람을 뜻하는데, 이 계층이 이제 특정 대도시가 아니라 미국 어디에서나(Everywhere) 고르게 발견된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입니다.

    배관과 세차장에서 찾은 부의 공식

    이들의 사업 영역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뚜렷합니다. 배관, 전기 공사, 냉난방시스템(HVAC) 설치, 세차장, 조경, 지역 물류와 정비업 등 누구나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생활 밀착형 업종이 대부분입니다. 최첨단 기술 산업에 비하면 겉보기에는 소박하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경기 변동의 충격을 상대적으로 덜 받으면서 꾸준한 현금 흐름을 만들어내는 알짜 사업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유휴 자본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고 디지털 마케팅과 체계적인 경영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과거의 낡은 소상공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고수익 사업체로 사업을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과시 대신 재투자, 중심 대신 지역

    이들의 생활 방식 역시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값비싼 명품이나 과시형 소비 대신 사업에 대한 재투자, 지역 부동산 매입, 실용적인 자산 운용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또한 전통적인 엘리트 계층이 주도해 온 정치·사회적 담론의 중심에 서기보다, 자신이 뿌리내린 지역 공동체 안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쪽을 택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를 축적하는 방식뿐 아니라 부를 대하는 태도 자체가 기존 부유층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소비자 맞춤형 자영업 부유층의 증가는 특정 대도시에 집중되었던 미국 부의 무게중심을 전국으로 분산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던지는 질문

    이러한 흐름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국내에서도 청년층의 취업난과 함께, 은퇴 이후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는 시니어들의 창업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창업이라 하면 고위험 고수익을 좇는 정보기술(IT) 스타트업이나 유행에 편승한 프랜차이즈 쪽으로 관심이 쏠린 경향이 있었습니다. 에브리웨어 밀리어네어의 사례는 화려한 아이템보다 실질적인 수요가 존재하는 생활 밀착형 실물 산업에서도 충분히 자수성가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특히 오랜 직장 생활을 통해 전문성과 신뢰, 그리고 인적 네트워크를 쌓아온 시니어 세대야말로 이러한 실물 서비스 창업에서 남다른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계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면이라는 오래된 답

    물론 하나의 성공 사례를 무비판적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지역 밀착형 서비스업 역시 초기 자본과 숙련된 기술, 오랜 시간에 걸친 신뢰 구축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만큼, 손쉬운 성공의 지름길로 오인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럼에도 이번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근본적인 교훈은 분명합니다. 부는 화려한 간판이나 유행하는 산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실한 노동과 실물 경제에 대한 우직한 헌신에서도 얼마든지 쌓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도시에 집중되었던 부의 무게중심이 전국 각지의 평범한 지역 사회로 분산되는 이 흐름은, 근면과 성실이라는 전통적 가치가 여전히 유효한 성공의 토대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습니다. 화려함보다 실속을, 유행보다 본질을 좇는 자수성가의 가치를 우리 사회도 진지하게 되새겨 볼 시점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23 min
  • [아침마다 지혜 #482] 대를 이을 사람이 없다

    — 독일 중소기업 승계 위기가 던지는 경고

    독일 중소기업(Mittelstand)계가 심각한 세대교체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최근 독일 유력 일간지 디벨트(Die Welt)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독일 중소기업 네 곳 중 한 곳은 현재 경영진이 물러난 이후 가까운 시일 내 혹은 장기적으로 폐업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배경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47%는 자녀 세대의 가업 승계 의지 부족을 주된 이유로 꼽았으며, 거의 비슷한 비율의 응답자가 과도한 관료주의적 규제 부담 또한 문제로 지적하였습니다.

    독일재건은행(KfW, Kreditanstalt für Wiederaufbau)이 발표한 '2025 중소기업 승계 모니터링' 보고서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구체적인 수치로 보여줍니다. 2029년 말까지 은퇴를 계획하는 기업가는 56만 9,000명에 이르는 반면, 같은 기간 후계자를 찾고자 하는 중소기업은 54만 5,000곳에 그칠 것으로 예측되었습니다. 물러나려는 소유주의 수가 이를 이어받으려는 후계자의 수를 앞지르는 역전 현상이 이번 조사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본(Bonn) 소재 중소기업연구소(IfM, Institut für Mittelstandsforschung)의 분석 역시 이러한 흐름을 뒷받침합니다. 이 연구소에 따르면 2026년부터 2030년까지 승계할 가치가 있는 우량 가족기업 약 18만 6,000개가 세대교체 시기를 맞이하는데, 이 가운데 절반가량만이 가족 구성원에 의해 계속 운영될 것으로 전망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직원 인수(20%)나 외부 매각(30%)의 형태로 넘어갈 것으로 예측됩니다. 기관별로 구체적인 수치에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거대한 승계 공백이 다가오고 있다는 큰 흐름에는 이견이 없는 셈입니다.

    이러한 위기의 근본 원인은 크게 두 가지 구조적 흐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구구조의 변화입니다. 베이비붐 세대가 대거 은퇴를 맞이하는 시점에 뒤따르는 세대의 규모 자체가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유례없이 큰 규모의 세대교체가 짧은 기간에 몰리고 있습니다. 둘째는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사업을 잇기보다 자신만의 진로를 택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전통적인 가족 승계 방식이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독일 내 창업 활동 자체가 위축되면서 잠재적 인수자의 절대 수가 줄어드는 이중고까지 겹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연령대별 창업 성향의 차이입니다. 청년층은 기존 기업을 인수하는 방식을 상대적으로 선호하는 반면, 고령의 창업 희망자는 오히려 신규 창업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대다수의 창업이 기존 기업 인수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창업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독일발 보고서는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한국 역시 저출산과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며 중소기업 및 가업 승계 문제가 오랫동안 사회적 과제로 제기되어 왔습니다. 정부가 가업상속공제 제도를 통해 요건 완화와 지원 확대를 꾸준히 모색해 온 것도 이러한 위기의식의 반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제도적 지원만으로는 근본적인 해법이 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랜 시간 축적된 시니어 경영인의 경험과 지혜, 그리고 검증된 사업 노하우가 다음 세대에게 매력적인 자산으로 인식되도록 사회적 인식을 전환하는 일입니다. 실제로 기업 인수는 신규 창업에 비해 검증된 비즈니스 모델과 숙련된 인력, 안정적인 거래처를 처음부터 갖출 수 있다는 점에서 경제적으로도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기업 승계는 단순히 소유권이 넘어가는 사무적 절차가 아니라, 한 세대가 쌓아 올린 경험과 신뢰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사회적 자산의 계승 과정입니다. 시니어 세대가 평생에 걸쳐 축적한 전문성과 경영 노하우를 단절시키지 않고 온전히 물려줄 수 있도록, 세대 간 대립이 아닌 연대의 관점에서 제도적 뒷받침과 사회적 공감대를 함께 마련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동시에 승계를 받는 다음 세대 역시 전통과 원칙이라는 안전판 위에서 합리적 기준에 따라 책임 있게 그 몫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앞선 세대가 지켜온 질서와 가치가 흔들림 없이 이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및 편집자 주]

    본 칼럼은 2026년 9월 16일 자 독일 일간지 디벨트(Die Welt) 중소기업(Mittelstand) 섹션 14면에 실린 커스틴 슈비거(Kirsten Schwieger) 기자의 기사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인용된 수치는 KfW(독일재건은행)의 '2025 중소기업 승계 모니터링' 및 본(Bonn) 중소기업연구소(IfM)의 예측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원문 발행처의 통계를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21 min
  • [아침마다 지혜 #481] 아흔일곱 수학자와 열다섯 소녀, 백 년 난제를 풀다

    은퇴는 쓸모의 끝이 아니라, 배운 것을 다음 세대에 건네는 시간입니다

    미국 뉴욕타임스 국제판은 2026년 9월 16일 자 과학면에서 한 은퇴 수학자와 10대 제자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주인공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2004년 은퇴한 위상수학자 조안 버먼(Joan Birman) 박사와, 같은 동네에 살던 고등학생 바수다 바라트람(Vasudha Bharathram)입니다. 두 사람은 글래스고대학교의 타라 브렌들(Tara Brendle) 교수와 힘을 합쳐 약 100년 동안 풀리지 않던 수학 난제를 해결했고, 지난 7월 그 결과를 논문으로 공개했습니다.

    이야기는 2019년 여름의 이메일 한 통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92세였던 버먼 박사는 수학을 더 깊이 배우고 싶다는 한 고등학생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은퇴 뒤에도 이런 요청은 간간이 이어졌지만 박사는 선뜻 나설 생각이 없었다고 합니다. 남편과 2년 전에 사별한 그는 세 자녀를 키운 교외의 집을 정리하고 대학 연구실과 가까운 아파트로 옮겨 혼자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에서는 누가 시켜서 쓴 것이 아닌 진심이 읽혔고, 며칠 뒤 그는 만나 보겠다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대학 수준의 추상대수학 교재를 먼저 구해 읽어 오라고 일렀습니다.

    그해 7월, 막 15세가 된 바라트람이 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아파트 로비에 나타났습니다. 세 살 때 인도로 갔다가 8학년 때 뉴욕으로 돌아온 학생이었습니다. 박사는 자신의 전공인 위상수학(topology)이 고정된 좌표에 묶이지 않고 늘어나고 휘어지는 도형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설명했고, 머리를 땋은 모양처럼 여러 가닥이 엇갈린 브레이드(braid)를 연필로 그려 보였습니다. 며칠 뒤 학생은 풀이 과정을 빼곡히 적은 노트 여러 장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습니다. 어려운 문제에 겁 없이 덤빈 대담함도 놀라웠지만, 박사가 더 눈여겨본 것은 남다른 길로 정답에 이르는 독창성이었습니다. 글씨가 엉망이라는 스승의 지적을 받자 학생은 다음부터 답을 타자로 쳐 왔습니다.

    버먼 박사 자신도 늦게 핀 학자였습니다. 세 자녀를 키우며 시간제 엔지니어로 일하던 그는 34세에 야간 수학 강좌를 듣기 시작했고, 1968년 박사학위를 마쳤을 때는 41세였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거절당해도 문제 삼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가 택한 브레이드 연구는 당시 침체된 분야로 여겨졌지만, 그는 이를 매듭 이론을 비롯한 여러 영역과 연결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1984년 본 존스(Vaughan Jones)가 새로운 다항식을 발견했을 때 그 쓰임새를 확인하러 찾아간 곳도 버먼 박사의 연구실이었고, 존스는 훗날 필즈상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이 도전한 문제는 부라우 표현(Burau representation)의 충실성

    (faithfulness)입니다. 브레이드라는 도형을 다항식의 묶음으로 옮겨 적을 때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가닥이 3개 이하이면 정보가 온전히 보존되고 5개 이상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져 있었지만, 4가닥의 경우는 박사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오랫동안 아무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박사는 교재를 함께 읽던 초기부터 이 문제를 마음에 두고 있었고,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된 직후 제자에게 이미 확립된 3가닥 사례부터 다시 살펴보라고 권했습니다.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박사는 길에서 쓰러졌고 심장박동기 수술도 받았지만, 화상 수업과 공원 벤치에서의 만남은 끊기지 않았습니다. 초기 작업을 검토한 밴더빌트대학교의 댄 마갈릿(Dan Margalit) 교수는 성공을 낙관하지 않으면서도 격려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박사는 자신의 옛 박사과정 제자인 브렌들 교수를 불러들였고, 브렌들 교수는 도식의 오류를 곧바로 짚어 내며 세 번째 동료가 되었습니다. 돌파구는 지난겨울에 열렸습니다. 4가닥 브레이드를 5가닥의 세계 속에서 다시 해석하자, 정보 손실을 의심하게 만들던 다항식 항들의 상쇄가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브렌들 교수는 이를 수학 인생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순간으로 꼽았다고 합니다. 그사이 바라트람은 스승의 추천서를 들고 단 한 곳 지원한 프린스턴대학교에 진학했고, 지금은 대학원 첫해를 시작하며 4차원 공간의 매듭으로 연구를 넓히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 이야기에서 세 가지를 읽습니다.

    첫째, 성취는 요행이 아니라 축적에서 나옵니다. 백 년 난제가 풀린 것은 하루아침의 영감 덕분이 아니었습니다. 스승이 수십 년 품어 온 질문과 제자가 7년 동안 이어 간 성실함이 있었습니다.

    둘째, 가르침에는 엄격함이 있어야 합니다. 박사는 어린 학생을 어린아이로 대하지 않고, 어려운 교재를 주며 악필을 지적했고, 학생은 그 기준에 맞추려 애쓰며 자랐습니다.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 곧 배려라고 여기는 요즘의 풍조를 돌아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셋째, 은퇴는 물러남이 아닙니다. 박사는 대학까지 17달러(약 2만 4천 원, 1달러 1,400원 기준)의 택시비를 들여서라도 수학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에 살기를 고집했고, 동료 학자는 97세인 그에게 수학이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이 사례를 모든 시니어가 따라야 할 표준으로 삼을 일은 아닙니다. 건강과 형편은 저마다 다르고, 이번 논문도 앞으로 학계의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그럼에도 평생 쌓은 경험과 기준은 다음 세대에게 건넬 때 비로소 제값을 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제자로 받아 함께 일하던 딸을 잃은 뒤 오랫동안 어린 제자 받기를 사양했던 박사가 다시 마음을 연 데에는 낯선 소녀의 진심 어린 편지 한 통이 있었습니다.

    우리 시니어에게도 그런 편지가 올 수 있습니다. 그때 귀찮다고 밀어내지 않고 생각해 보겠다고 답할 수 있는 준비가 품격 있는 노년의 출발점이라고 필자는 믿습니다.

    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

    15 min
  • [아침마다 지혜 #480] 제임스 카메론 감독, '무모한 도박'은 어떻게 '확신의 결단'이 되었나

    - 영화 「타이타닉」이 남긴 교훈

    1997년 개봉한 영화 「타이타닉」은 극장에 걸리기 전까지만 해도 할리우드에서 가장 위험한 도박으로 꼽혔습니다. 독일 일간지 디 벨트(Die Welt)는 2026년 9월 14일자 지면에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감수했던 위험과 결단의 과정을 다시 조명했습니다. 30년 가까이 지난 이야기를 오늘 다시 꺼내는 이유는, 세상의 우려 속에서도 끝내 결과로 증명해 낸 한 사람의 신념이 시니어 세대에게도 적지 않은 울림을 주기 때문입니다.

    할리우드 세트장에 담기지 않은 배

    카메론 감독은 당시 이미 「터미네이터」, 「에일리언 2」, 「어비스」 등으로 명성을 쌓은 인물이었습니다. 동시에 촬영 현장이 극도로 고되고, 배우와 스태프에게 결코 온화하지 않은 감독으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해저를 배경으로 한 「어비스」 촬영 때는 일부 배우가 익사 직전까지 몰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습니다.

    열정적인 다이버이자 해양 탐험가였던 그는 1912년 북대서양에서 침몰한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의 이야기를 거대한 규모로 스크린에 옮기고자 했습니다. 그는 1991년 「터미네이터 2」에서 컴퓨터 그래픽 활용의 새 이정표를 세운 바 있지만, 당시 기술로는 한계가 뚜렷했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장면을 실제 세트와 물리적 특수효과로 구현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공간이었습니다. 기존 할리우드 스튜디오로는 여객선과 항구 시설, 수백 명이 등장하는 침몰 장면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카메론 감독은 제작사를 설득해 멕시코 해안의 부지 16헥타르를 사들이고 전용 스튜디오를 새로 지었습니다. 그곳에 실물 크기의 선박을 재현하되, 비용을 줄이기 위해 선체의 한쪽 면만 제작했습니다.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장면은 좌우를 뒤집어 촬영하는 방식으로 해결했습니다. 침몰 장면을 위해서는 대형 유압 장치로 선미 세트를 들어 올려 가파르게 기울였고, 거대한 수조 안에 설치한 선실 세트는 촬영 한 번이면 파손되었기 때문에 배우들은 단 한 번의 기회에 위험한 연기를 해내야 했습니다. 감독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수심 약 3,800미터 해저의 실제 난파선까지 직접 내려가 촬영을 감행했습니다.

    쏟아진 회의론

    언론과 평론가, 제작사 간부들은 이 엄청난 투자가 과연 회수될 수 있을지 깊이 의심했습니다. 사고가 잇따른다는 촬영 소식이 전해지면서, 1963년 「클레오파트라」나 1980년 「천국의 문」처럼 영화사에 남을 실패작이 되리라는 전망이 우세했습니다.

    작품의 방향을 두고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제작사는 침몰 장면 중심의 재난 영화를 원했지만, 감독은 이를 바다 위에서 펼쳐지는 비극적 사랑 이야기이자 재난 대서사시로 설계했습니다. 회의론자들은 멜로 드라마를 좋아하는 관객은 참혹한 침몰 장면을 꺼리고, 재난 영화를 기대한 관객은 사랑 이야기에 흥미를 잃을 것이라며 이도 저도 아닌 기획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결과로 증명한 확신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 주연한 이 영화는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키며 당시 영화 역사상 최고 흥행작에 올랐습니다. 제작비는 약 2억 달러(약 2,800억 원)로 알려졌는데, 첫 개봉 당시 전 세계 흥행 수입은 약 18억 달러(약 2조 5,200억 원)를 넘어선 것으로 전해집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11개 부문을 휩쓸었고, 카메론 감독은 시상대에서 영화 속 명대사를 빌려 스스로를 세상의 왕이라고 외쳤습니다.

    무모함과 결단을 가르는 기준

    이 이야기를 단순한 성공 신화로만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카메론 감독의 도전이 무모함에 그치지 않은 데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수십 년 바다를 누빈 경험, 이전 작품에서 검증된 기술적 역량, 그리고 선체를 절반만 짓는 식의 치밀한 비용 관리가 뒷받침되었습니다. 확신은 막연한 자신감이 아니라 축적된 실력과 준비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동시에 짚어야 할 대목도 있습니다. 배우와 스태프가 위험에 노출된 현장은 결과가 좋았다고 해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거액의 투자를 앞두고 제작사가 제기한 우려 또한 조직을 지키기 위한 합리적 견제였습니다. 위대한 성취는 한 사람의 신념과 이를 냉정하게 검증하는 목소리가 함께 있을 때 더욱 건강해집니다.

    시니어 세대에게 주는 시사점

    오늘의 시니어 세대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수없이 들으며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대를 건너온 분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판단력은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다만 경험에서 비롯된 확신이 고집으로 굳어지지 않으려면, 근거를 갖추고, 준비를 철저히 하며, 결과에 책임지는 태도가 함께해야 합니다. 또한 반대 의견에 귀를 여는 유연함도 필요합니다.

    젊은 세대가 새로운 도전 앞에서 주저할 때, 시니어 세대가 들려줄 수 있는 조언은 무작정 해 보라는 격려도, 위험하니 그만두라는 만류도 아닐 것입니다. 준비된 도전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준비되지 않은 모험은 신중해야 한다는 균형 잡힌 지혜입니다. 침몰한 배를 다시 띄워 낸 한 감독의 이야기는, 책임과 준비라는 오래된 가치가 여전히 성공의 가장 튼튼한 토대임을 일깨워 줍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18 min
  • [아침마다 지혜 #479] 3,085개의 안타가 증언한 한 시대

    히로시마의 섬광을 딛고 일어선 재일한국인 야구 전설 장훈 선생, 86세로 영면하다

     

    일본 프로야구 통산 최다 안타 기록의 주인공 장훈(張勲 チャン・フン, 張本 勲 はりもと いさお 하리모토 이사오) 선생이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본의 대기록 보유 선수들로 구성된 엘리트 단체인 골든 플레이어스 클럽(Golden Players Club)은 장훈 선생이 지난 수요일 별세했다고 발표했으나, 구체적인 사인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애를 요약하는 숫자는 단연 3,085라는 안타 기록입니다. 1980년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통산 3,000안타 고지를 밟았고, 은퇴 시점의 최종 기록인 3,085안타는 지금까지도 일본 프로야구 통산 최다 안타로 남아 있습니다. 23년의 선수 생활 동안 504개의 홈런을 때렸고, 2,752경기에 출전했으며, 올스타에는 열여덟 차례 선정되었습니다. '타격 기계'라는 별명은 과장된 수식이 아니라 기록이 스스로 붙여 준 이름이었습니다. 1990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숫자 뒤에 놓인 출발점은 참혹했습니다. 장훈 선생은 1940년 히로시마에서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네 살 때 오른손에 심각한 화상을 입어 손의 운동 능력을 대부분 잃었습니다. 운동선수에게 손은 생명과 같은 도구입니다. 그 도구의 절반을 잃은 소년이 훗날 일본 야구사에서 가장 정교한 타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결핍이 곧 운명의 선고는 아니라는 점을 웅변합니다. 그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처음부터 왼손타자로 야구를 배웠습니다.

    1945년 8월 6일, 미군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때 그의 나이는 다섯 살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산 뒤편에 있어 폭발의 직접적인 충격파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피를 흘리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정신을 차렸다고 훗날 증언했습니다. 폭심지 근처에 있던 누나는 심각한 화상을 입고 며칠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훈 선생은 그 며칠 동안 이어진 누나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평생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가 식당을 운영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초등학생 때 야구를 시작한 소년은 중학교 시절 분명한 목표 하나를 품습니다.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편안한 삶을 드릴 수 있을 만큼 돈을 벌기 위해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소박하다 못해 투박한 동기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23년 동안 그라운드에 세운 힘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바로 그 소박한 효심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빠르게 증명했습니다. 1959년 도에이 플라이어스(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에 입단해 115안타를 기록하며 신인왕에 올랐고, 이듬해 첫 올스타에 선정되었습니다. 1961년에는 첫 타격왕 타이틀을 차지했으며, 선수 생활 중 유일하게 일본시리즈 우승을 맛본 1962년에는 처음으로 30홈런 시즌을 만들어 냈습니다. 197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 통산 868홈런의 오 사다하루(왕정치) 선수와 한솥밥을 먹었고, 1980년 지금의 지바 롯데 마린스로 옮겨 통산 3,000안타와 500홈런을 완성한 뒤 1981년 방망이를 내려놓았습니다.

    은퇴 후 그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이름을 떨친 인기 야구 해설가로 제2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반전과 핵군축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 계기는 정치적 각성이 아니라 일종의 충격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젊은 세대 가운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후 그는 TBS 방송 인터뷰 등을 통해 섬광과 폭발, 그리고 의식을 잃었던 그날의 기억을 반복해서 증언했습니다.

    그는 "야구 선수로서 나는 언젠가 원폭 후유증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항상 걱정했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전성기의 기록 뒤에는 자신의 몸을 믿지 못하는 불안이 늘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만년의 그는 피폭 생존자들의 고령화를 자주 우려했고, '살아 있는 마지막 전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 고통스러운 역사를 계속 전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구분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의 증언은 특정한 정치적 주장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섯 살 아이가 두 눈으로 본 것에 대한 사실의 기록이었습니다. 역사의 해석은 세대마다 갈릴 수 있으나, 겪은 사람이 남긴 목격담은 해석 이전의 자산입니다. 그 자산이 사라지면 후대는 판단할 재료조차 잃게 됩니다. 증언자가 한 사람씩 세상을 떠나는 지금, 우리가 안타까워해야 할 것은 한 유명인의 부고가 아니라 검증 가능한 기억이 통째로 소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훈 선생의 생애는 우리 시니어 세대에게 두 가지를 묻습니다. 첫째, 조건이 나쁘다는 이유로 스스로 접어 둔 일은 없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그는 오른손을 잃은 채 왼손으로 3,085개의 안타를 쳤습니다. 둘째, 우리가 살아온 시간을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건네고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전쟁과 가난, 산업화와 외환위기를 통과한 우리 세대 역시 저마다 증언자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경험은 한 세대가 끝나는 순간 함께 끝납니다.

    한 소년이 어머니를 편히 모시겠다는 마음으로 방망이를 들었고, 그 성실이 23년 동안 쌓여 누구도 넘지 못한 기록이 되었으며, 노년의 그는 그 이름값을 기억을 전하는 일에 썼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

    14 min
  • [아침마다 지혜 #478] 고등어 통조림에 고등어가 없다는 소식

    우리 식탁에는 무엇이 없어지고 있나요?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가 2026년 9월 12일 자 지면을 통해, 영국 주요 슈퍼마켓에서 팔리는 고등어 통조림에 더 이상 진짜 고등어가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도하였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통조림 공급업체인 프린스(Princes)는 원재료를 대서양 고등어에서 칠레전갱이(Chilean jack mackerel)로 바꾸었습니다. 이름은 비슷하게 불리지만 전갱이과(Carangidae)에 속하는 전혀 다른 어종으로, 페루전갱이라고도 불리며 주로 남미 해역에서 잡힙니다. 테스코(Tesco)와 세인즈버리(Sainsbury's)가 이 제품을 판매하고 있고, 리들(Lidl)과 웨이트로즈(Waitrose)를 포함한 다른 대형 유통업체들도 신선 고등어 취급을 줄여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웨이트로즈는 지난 4월 남획 우려를 이유로 기존 재고가 소진되는 대로 통조림 제품을 단계적으로 중단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 대체가 단순한 상표 문제로 그치지 않는 까닭은 영양 성분의 차이에 있습니다. 보도된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칠레전갱이는 진짜 고등어에 비해 100그램당 열량이 100킬로칼로리가량 적고, 오메가-3 함량은 절반 수준에 머무릅니다. 소비자들은 가시가 굵어진 점과 금속성 냄새에 대해서도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니어 독자 여러분께서 고등어 통조림을 찾으시는 이유가 대체로 값이 저렴하고 보관이 쉬우며 등푸른생선의 지방산을 간편하게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결코 사소한 변화가 아닙니다.

    바뀐 배경에는 자원 고갈이라는 엄연한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국제해양탐사협의회(ICES)에 따르면 지난 10년 사이 고등어 자원량은 4분의 3이 줄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지난해 북동 대서양 어획량을 70퍼센트 이상 감축해야 자원 고갈을 막을 수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럼에도 2010년 이후 설정된 어획 쿼터는 과학적 권고치보다 평균 39퍼센트 높았습니다. 영국과 노르웨이, 유럽연합, 러시아,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페로 제도 사이에서 벌어진 이른바 고등어 전쟁이 그 배경이며, 일부 관리 조치가 시행되고는 있으나 단속과 이행이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이 최근에도 나왔습니다.

    여기까지는 자연이 정한 한계에 인간이 뒤늦게 적응하는 과정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업계 자료를 근거로 한 보도에 따르면 칠레전갱이의 도매가격은 대서양 고등어의 약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지만, 여러 슈퍼마켓에서는 통조림을 이전과 비슷한 가격에 팔고 있습니다. 리들과 같은 일부 유통업체는 어종이 다름에도 고등어라는 표지판 아래 전갱이 제품을 진열하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리들 영국 법인은 책임 있게 관리되는 어장에서 수산물을 조달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훈제 고등어의 다음 구매 시점 이전에 조달 정책과 과학적 권고 부합 여부를 다시 검토하겠다는 취지로 답하였습니다.

    영국의 소비자 단체 위치(Which?)의 식품 정책 책임자 슈 데이비스(Sue Davies)는 통조림 생선이 주 2회 생선 섭취, 그중 1회는 등푸른생선이라는 권장 기준을 지키는 저렴하고 편리한 수단이라는 점을 짚으면서, 제조업체가 이러한 생필품의 품질을 조용히 낮추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소비자가 영양가가 현저히 떨어진 제품에 같은 값을 치르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급망 압박과 지속가능성 문제가 실재한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배합이나 원재료를 바꿀 때는 소비자에게 완전하고 솔직하게 알릴 의무가 있다고 그는 강조하였습니다. 비용을 줄이려 원재료를 슬그머니 바꾸는 이른바 스킴플레이션(skimpflation)이 점차 흔해지고 있으나, 소비자가 집에 가져가 먹어보기 전까지는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점에서 특히 온당치 못하다는 지적도 덧붙였습니다. 업계에서 오래 일한 스튜어트 하퍼(Stewart Harper) 전 노스 대서양 피싱 컴퍼니(North Atlantic Fishing Company) 사장 역시 파이낸셜 타임스(FT)와의 대담에서, 가까운 바다의 생선 대신 먼 곳에서 실어온 생선을 먹게 된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그 손해가 결국 소비자에게 돌아간다는 취지로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 사안을 기업을 나무라는 이야기로만 읽지 않습니다. 어족 자원이 줄면 값이 오르고, 값이 오르면 대체재를 찾는 것은 시장의 자연스러운 작동입니다. 어느 기업도 없는 고등어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가 있습니다. 파는 쪽과 사는 쪽이 같은 정보를 보고 값을 흥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재료가 바뀌었는데 이름과 가격이 그대로라면, 그것은 경쟁이 아니라 정보의 비대칭을 이용한 이익입니다. 시장을 신뢰하는 사람일수록 표시와 공시의 정직성에 더 엄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문제가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우리 식탁에 오르는 고등어 역시 상당 부분을 원양과 수입에 기대고 있으며, 통조림과 가공품의 원재료 표기는 뒷면의 작은 글씨에 적혀 있습니다. 시니어 세대에게 통조림 한 통은 단백질과 불포화지방산을 손쉽게 챙기는 현실적인 수단입니다. 그렇기에 제품 뒷면의 원재료명과 원산지, 100그램당 영양성분을 한 번 더 확인하시는 습관이 결국 가장 확실한 자기 방어가 됩니다. 아울러 우리 관계 당국도 어종명 표기와 가공품 원재료 변경 고지에 관한 기준이 소비자가 알아볼 수 있는 수준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값이 싸진 것도 아니고 몸에 더 이로워진 것도 아닌데 내용물만 조용히 바뀌었다면, 소비자는 마땅히 그 사실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 정직한 표시는 규제의 부담이 아니라 시장의 자산입니다.

    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

    14 min
  • [아침마다 지혜 #477] 영국 하원의 선택, 시니어에게 던진 질문

    지난 금요일 영국 하원에서 말기 환자의 조력자살을 허용하려던 법안이 반대 286표, 찬성 270표로 부결되었습니다. 열여섯 표 차이였습니다. 불과 1년 전 같은 의사당에서 314대 291로 통과되었던 사안이 정반대의 결론에 이른 것이니, 이 문제가 얼마나 깊은 균열 위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부결된 법안은 「말기 성인 환자 법안(Terminally Ill Adults bill)」이라 불렸습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에 거주하는 성인 가운데 의사로부터 기대여명 6개월 미만이라는 진단을 받은 사람이 치명적인 약물을 처방받아 스스로 투약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의사가 직접 주사를 놓는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신청자는 증인이 서명한 두 장의 선언서를 통해 의사를 밝혀야 하고, 두 명의 독립적인 의사가 진단을 확인하며 환자가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았고 강요당하지 않았음을 보증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판사와 사회복지사, 정신과 의사 세 사람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사례를 검토해 만장일치로 서명하는 절차까지 두었습니다. 의사와 약사, 요양시설은 참여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받았습니다. 절차만 놓고 보면 상당히 촘촘한 설계였습니다.

    그럼에도 부결된 이유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 측이 가장 집요하게 파고든 지점은 안전장치의 두께가 아니라, 그 장치가 지켜야 할 사람들의 처지였습니다. 시니어와 장애인, 빈곤층이 가족이나 사회에 짐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죽음을 선택하도록 떠밀릴 수 있다는 우려였습니다. 서류상의 절차가 아무리 정교해도, 병실에서 자녀의 지친 얼굴을 마주한 시니어 환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심사할 수는 없다는 지적입니다.

    여기에 완화의료(palliative care)의 현실이 겹쳤습니다. 올해 유방암 말기 진단을 받고 보건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노동당 애슐리 달튼 의원은 토론에서, 필요한 모든 사람이 양질의 완화의료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진정한 선택권이 없다는 취지로 발언했습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면서도 서둘러 만든 법이 통과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고 밝힌 대목에서, 찬반 양측 의원들이 그를 끌어안았다고 전해집니다. 당사자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이번 표결의 성격을 압축해 보여줍니다. 고통을 덜어줄 다른 길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선택지로 먼저 제도화하는 것이 과연 자기결정권의 확대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물론 찬성 측의 호소도 가볍지 않았습니다. 발의자 중 한 사람인 킴 리드비터 의원은 생을 마감하려 강가로 향하던 말기 암 환자가 전동휠체어의 배터리가 다해 그 자리에서 흐느끼다 발견된 사연을 전했습니다. 또 다른 발의자 로렌 에드워즈 의원은 표결 직후 현행법이 그대로 두기에는 너무 잔인하다며 이 사안이 반드시 다시 다뤄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여론조사에서는 영국인의 4분의 3가량이 원칙적 합법화에 찬성한다고 나타납니다. 그러나 원칙에 대한 찬성과 구체적 제도에 대한 동의는 다른 문제였던 셈입니다.

    정치적 변수도 있었습니다. 지난해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졌던 키어 스타머 전 총리와 달리, 지난 7월 취임한 앤디 번햄 총리는 조력자살 표결에 앞서 완화의료와 돌봄 체계 강화가 먼저라는 입장을 밝히고 이번 표결에서는 기권했습니다. 앞선 법안이 상원에서 1,200건이 넘는 수정안 제출로 사실상 지연 저지되었던 전례도 남아 있습니다. 분석가들은 2029년으로 예상되는 다음 총선 전까지 전면적인 재추진은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로써 영국은 조력자살을 어떤 형태로든 허용하는 나라들의 대열에서 당분간 비켜서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1997년 연방대법원이 판단을 각 주에 맡긴 뒤 오리건주를 시작으로 현재 13개 주와 워싱턴 D.C. 등 14개 관할 구역에서 허용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벨기에, 스페인, 네덜란드에도 관련 법률이 있고, 일부는 시한부 진단을 요건으로 두지 않습니다. 프랑스 의회도 최근 관련 법안을 승인했습니다. 1942년부터 조력자살이 합법인 스위스에는 매년 500명 이상이 이 제도를 이용하기 위해 국경을 넘습니다. 여든여섯 살의 방송인 출신 활동가 에스더 란첸은 법안 처리가 늦어지는 사이 스위스로 떠날 기력조차 잃었다며, 건강하고 여유 있는 사람만 선택할 수 있는 현실을 문제 삼았습니다.

    우리 사회도 이 논의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된 지 여러 해가 지났고, 조력존엄사를 둘러싼 입법 논의도 이미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영국의 이번 표결이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은 찬반의 승패가 아니라 순서에 있다고 봅니다. 통증을 제대로 다스려 주는 의료, 혼자 앓지 않게 하는 돌봄, 가족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적 부양 구조가 먼저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 토대가 없는 상태에서 주어지는 선택권은 자유가 아니라 압력이 되기 쉽습니다. 시니어 세대가 마지막 순간에 붙들어야 할 것은 떠날 권리이기 이전에, 끝까지 존중받으며 머무를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20 min
  • [아침마다 지혜 #476] 행복만 좇는 삶은 과연 행복할까

    쇼펜하우어·보부아르·니체가 건네는 경고, "안락한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지 말라"


     여름이 저물어 갑니다. 바닷가의 파도 소리나 숲 그늘의 고요함을 벌써 그리워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상담가나 요가 강사들은 이런 곳을 '나만의 행복한 장소'라고 부르곤 합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그런 장소 하나쯤은 품고 삽니다. 그러나 그 안락함이 인생의 최종 목적지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우리 사회에서 은퇴 설계라고 하면 대개 비슷한 그림이 떠오릅니다. 평생 부지런히 일해 모은 재산으로 남은 생을 편안히 누리는 삶, 여행과 맛집과 취미로 채워진 나날입니다. 미국 버지니아대학교 마크 에드먼드슨 교수는 최근 뉴욕타임스 국제판 기고에서 바로 이 통념에 질문을 던졌습니다. 쾌락과 안락으로서의 행복이 과연 삶의 궁극적 목표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즐거움을 향한 오래된 찬가

    행복을 쾌락으로 이해하는 전통은 뿌리가 깊습니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인간이 즐거움을 최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살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향락의 삶을 산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1897년 감옥에서 쓴 긴 편지 『옥중기(De Profundis)』에서 즐거움을 위해 살았던 순간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에드먼드슨 교수는 이런 행복을 완전히 배척하지는 않되, 경계하며 절제된 분량으로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에 섭니다. 그 근거로 세 명의 철학자를 증인으로 불러냅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두 번째 적, 권태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두 적으로 고통과 권태를 꼽았습니다. 인간은 지성을 동원해 고통을 피하지만, 고통에서 벗어나는 순간 쉬지 못하는 마음은 새로운 자극을 찾아 헤맵니다. 그 끝에 도박으로 재산을 잃고, 불륜으로 가정을 깨뜨리며, 공연한 다툼을 벌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삶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에서 사교 모임, 연극, 카드놀이, 음주, 여행 같은 오락은 잠시의 처방일 뿐 곧 다시 지루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해법은 지성을 채울 대상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수집, 자연 관찰, 외국어 공부, 좋은 책을 읽고 요약하는 일 등입니다. 에드먼드슨 교수는 사람들이 행복의 상징으로 여기는 금빛 해변과 폭포 풍경 상당수가 실은 권태의 덫이라고 지적합니다.

    보부아르가 권한 '자신만의 프로젝트'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 역시 수동적 행복보다 능동적 활동을 옹호했습니다. 그녀는 장폴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이미 완성된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는 태도인 즉자존재(être-en-soi)를 가장 위험한 유혹으로 보았습니다. 사회가 승인하는 외모와 행동의 규범에 순응해 흠 없는 모습을 보이려는 삶입니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특히 여성이 이런 압력을 강하게 받는다고 비판했지만, 남성 역시 하나의 정체성에 갇히라는 요구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 대안이 대자존재(être-pour-soi)입니다. 주어진 정체성만으로는 삶의 의미가 보장되지 않음을 깨닫고, 스스로 세운 '프로젝트'를 통해 가치를 만들어 가며 삶을 빚는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행복하지는 않을지라도 자유를 스스로 떠맡았기에 삶이 의미를 얻는다는 것이 보부아르의 생각이었습니다.

    니체가 경고한 '마지막 인간'

    세 번째 증인은 프리드리히 니체입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마지막 인간(der letzte Mensch)'이라는 인간형을 그렸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소소한 즐거움만 누리고, 결코 전력을 다하지 않으며, 큰 결실을 위해 무언가를 걸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약간의 자극과 공허한 오락이 그의 기쁨입니다. 작품 속 차라투스트라가 이 인간형을 경계하라고 외치자, 군중은 도리어 자신들을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환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마지막 인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은퇴 이후의 긴 시간이 던지는 질문

    에드먼드슨 교수의 결론은 균형 잡혀 있습니다. 모든 만족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쾌락보다 의미를 추구하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의미를 좇는 사람에게도 휴식은 필요합니다. 니체조차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한동안 안락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다만 행복한 장소에 너무 오래 머물거나 평생 그곳에 눌러앉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경고는 한국의 시니어에게 특히 무겁게 다가옵니다. 수명이 늘어나면서 퇴직 이후의 시간은 어느 세대보다 길어졌습니다. 그 긴 시간을 휴식과 오락만으로 채운다면 권태가 찾아오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무료함 끝에 도박이나 과음, 과도한 스마트폰 사용에 빠지는 일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대로 배움을 이어 가고, 지역 사회에서 봉사하고, 평생의 경험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시니어들의 삶은 한결 단단합니다.

    쉬되 멈추지 않는 삶

    우리 선조들은 이 지혜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주역(周易)』은 하늘의 운행이 굳건하듯 군자는 스스로 힘써 쉬지 않는다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을 가르쳤습니다. 근면과 절제, 자기 수양을 삶의 근본으로 삼은 전통적 가치는 서구 철학자들의 결론과 놀랍도록 맞닿아 있습니다. 은퇴는 일에서 물러나는 것이지, 삶의 책임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평생 치열하게 살아온 시니어에게 휴식은 마땅한 권리이며, 쉼을 게으름으로 몰아세울 이유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쉼과 의미의 균형입니다. 바닷가에서 한 계절을 보냈다면, 다음 계절에는 책 한 권을 읽고 정리하거나, 새 언어를 익히거나,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세워 보시기 바랍니다. 행복은 붙잡으려 할수록 달아나지만, 의미 있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 곁에는 어느새 와 있기 마련입니다. 편안한 자리를 잠시 즐기되 그곳에 주저앉지 않는 삶, 그것이 긴 인생 후반전을 품위 있게 사는 길일 것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24 min
  • [아침마다 지혜 #475] 마지막 선물, 호스피스 돌봄과 사후 뇌 기증이 의학 진단과 공중보건에 갖는 의미

    죽음을 준비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죽음을 미리 입에 올리는 일은 금기에 가까웠습니다. 수의를 미리 마련하고 묏자리를 살펴 두는 것까지는 미덕으로 여겼으나, 임종의 순간을 어떻게 맞을지 가족과 마주 앉아 의논하는 일은 불경한 짓으로 치부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서구 사회에서는 임종을 맞는 과정 자체를 미리 설계하고 곁에서 돕는 새로운 직역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임종 둘라(death doula)라 불리는 이들이 그 주인공입니다. 산모의 출산을 곁에서 돕는 둘라의 역할을 삶의 마지막 국면으로 옮겨 온 셈입니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요커(The New Yorker)》는 지난 8월 17일 자에 알렉산드라 슈워츠 기자가 취재한 임종 둘라와 호스피스 돌봄의 변화에 관한 장편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리고 9월 14일 자 독자편지란에는 이 기사를 읽은 한 임상 신경병리학자의 짧은 편지가 게재되었습니다. 뉴욕주 하이폴스에 거주하는 R. D. 폴커스 박사가 보낸 글입니다.

    한 신경병리학자가 짚어낸 대목

    폴커스 박사가 주목한 것은 기사 본문의 화려한 서사가 아니라, 많은 독자가 무심코 지나쳤을 법한 짧은 한 장면이었습니다. 둘라로 일하는 버지니아 창이 자신이 돌보던 엘리너 레너드에게 과학 연구를 위한 사후 뇌 기증을 권했고, 레너드가 이를 반기며 받아들였다는 대목입니다.

    사후 인간의 뇌를 직접 관찰하고 연구해 온 오랜 경력의 전문가로서, 폴커스 박사는 이러한 기증이 극히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고 단언하였습니다. 그가 제시한 근거는 명료합니다. 임상 생체지표(biomarker)와 뇌 영상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였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해답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알츠하이머병이나 특정 유형의 뇌졸중을 비롯한 상당수 질환은 진단을 최종적으로 확정하기 위해 여전히 사후 조직 분석을 필수적으로 요구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의 검사 결과는 어디까지나 추정에 머무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확진의 마지막 열쇠는 세상을 떠난 뒤에야 손에 쥘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박사는 이러한 기증이 그 밖에도 수많은 공중보건상의 이점을 제공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선의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편지에서 가장 실질적인 대목은 마지막 괄호 안에 담겨 있습니다. 폴커스 박사는 뇌 기증이 운전면허증이나 신분증에 장기 기증자(organ donor)라고 표시해 두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뇌 은행(brain bank)이나 미국 국립보건원(NIH)을 통해 별도의 등록과 진행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적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장기 기증은 다른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이식이 목적이며, 연구를 위한 뇌 기증은 목적도 절차도 관리 기관도 다릅니다. 더구나 뇌 조직은 사망 이후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채취되어야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인의 뜻이 아무리 굳건하여도 그 뜻이 문서로 등록되어 있지 않고 가족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선의는 임종의 혼란 속에서 그대로 흩어지고 맙니다. 뜻을 세우는 일과 절차를 밟아 두는 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새겨야 할 대목

    우리나라도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다. 치매를 비롯한 뇌 질환은 이미 시니어 세대와 그 가족이 감당해야 할 가장 무거운 짐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럼에도 뇌 연구에 필요한 조직 자원의 확보는 여전히 넉넉하지 않은 형편입니다. 국내에서도 뇌 연구 전문기관을 중심으로 뇌 조직 기증과 보관을 담당하는 체계가 운영되고 있으나, 일반 시민에게 그 존재와 절차가 충분히 알려져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경계해야 합니다. 기증을 미덕으로 권장하는 일과, 기증을 사회적 압력으로 만드는 일은 전혀 다릅니다. 자신의 몸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끝까지 본인의 결정에 속하며, 유족의 정서와 가족의 합의 또한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죽음을 지나치게 담담한 기술적 절차로만 다루는 서구식 접근을 그대로 옮겨 오는 것도 신중할 일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알지 못해서 선택하지 못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시니어 세대는 평생 가족과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를 남기는 일에 익숙한 세대입니다. 재산을 남기고 이름을 남기고 가르침을 남겨 왔습니다. 그 오랜 습관의 연장선에서, 자신이 앓았던 병의 정체를 후손과 후학에게 밝혀 주는 일 또한 하나의 유산이 될 수 있습니다. 폴커스 박사의 편지가 우리에게 건네는 조언은 결국 단순합니다. 뜻이 있다면 미리 알아보고, 미리 등록하고, 미리 가족에게 말해 두시라는 것입니다. 준비된 뜻만이 마지막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독자 실용 정보

    보건복지상담센터 129
    치매상담콜센터 1899-9988
    국민건강보험공단 1577-1000

    연구 목적의 뇌 조직 기증 절차는 일반 장기 기증 등록과 별개이며, 국내에서는 뇌 연구 전문기관 및 관련 의료기관을 통해 문의하실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등록 방법과 요건은 기관에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및 편집자 주: 원문 출처: The New Yorker 2026년 9월 14일 자 5쪽 독자편지란(THE MAIL), R. D. 폴커스(의학박사, 뉴욕주 하이폴스) 기고. 인용 대상 기사는 알렉산드라 슈워츠, 2026년 8월 17일 자 리포트. 본 칼럼은 원문을 직접 인용하지 않고 사실 관계를 재구성하여 작성하였습니다.

    국내 뇌 조직 기증 관련 기관명과 절차, 사후 조직 채취 소요 시간에 관한 서술은 확인이 필요한 사항으로, 게재 전 검토를 권고드립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19 min

About 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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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깨달은 교훈, 나이 들어 알게 된 진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마음의 힘까지—짧지만 깊이 있는 메시지로 하루의 방향을 잡아드립니다. 시니어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울림이 있는 아침 인사. 커피 한 잔과 함께 듣는 ‘아침마다 지혜’로 오늘도 마음을 단단히, 부드럽게 채워보세요. 37년간의 1막을 이겨내고 인터넷 신문사 편집장으로…